“지극히 목숨 돌이켜 절합니다”

믿는 마음 극상표시가 ‘귀명’

돌아가는 ‘一心’ 삼보에 두는

광명·정대·화합의 절대 자리

 4-1. 귀경례(歸敬禮)

그리고 이는 신심(信心)의 극(極)을 표시하는 말이다. 믿는 마음의 극상(極上)을 표시하여 귀명(歸命)이라고 한다. 신하가 임금을 안 믿으면 신하 노릇도 안 된다. 부부간에도 친구사이에도 이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신(信)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그러므로 신의(信義) 즉 믿는 마음의 극을 표시하는 데는 오직 귀명을 끌어온다.

그런데 돌아가는 바의 일심(一心)을 우리가 어디에다 두느냐 하면 그것은 삼보(三寶)이다. 밝고 바르고 사이 좋은 평화로운 그곳, 광명(光明)과 정대(正大)와 화합(和合)의 그 절대적인 자리에다 우리의 목숨을 돌이켜 놓는다. 이 목숨을 돌이킨다는 말 가운데에는 그것이 첫 번째이면서 설상 두 번째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환원지의(還源之義)가 들어 있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우리 중생(衆生)은 눈과, 귀와, 코와, 맛을 아는 설근(舌根)과 촉각으로서 신근(身根)과, 의식 작용하는 의(意)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을 가지고 있으며 이 육근은 한 마음으로 좇아서 일어난다. 그러면서 육근은 항용 그 근원되는 마음과는 등지는, 배반하는 일이 많다.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생기고 귀에 솔깃한 소리를 들으면 그리로 쏠리고 구수한 냄새를 맡으면 그만 혀가 동한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자기 본 마음과는 늘 배치되는 행동을 하기 일쑤이다. 치산육진(馳散六塵)이라는 것이다.

육진(六塵)은 육근의 대상으로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가지다. 눈으로 보는 대상은 색(色), 귀의 대상은 소리, 코의 대상은 후각으로 맡는 냄새,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촉각(觸覺)을 의(意)로는 삼스카라(Samskeeres)인 무릇 만들어진 개념에 얽매이게 된다.

옥을 보면 갖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고, 흘리고, 맛을 보고 싶고, 아름다움에 빠지고, 이리 쏠리고 저리 기울어지고, 이렇듯 육진에 자꾸 치산(馳散)해서 한정없이 흩어져 돌아다닌다. 얽매이고 끄들려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궁리를 하고 허둥거린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잡동사니 허튼 생각일랑 다 버리고 본래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이를 환원지의(還源之義)가 있다고 하고 귀명(歸命)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하는 것은 목숨을 돌이켜 가장 높으신 어른, 부처님께 나의 이 목숨을 바치나이다 하는 소리가 되지만 그 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자기 본래의 양심에 돌아간다는 뜻이다. 자기의 지성스런 생각을 낸다는 것은 자기 내부의 지성스런 자리에 돌아가 있다는 소리가 되며 그래야만 의의가 있다.

원효대사께서는 이 귀명(歸命)하는 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범부(凡夫)에서 비롯하여 성인(聖人)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는 제각기 여섯가지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고함질러 우는 것이 힘이다. 무조건하고 억지를 부려 울어대어야 모든 일이 된다.

여자는 바가지 긁는 것이 힘이다. 성질을 내어 포독 포독 쏘아붙일라치면 남자는 그만 바가지 소리가 귀찮아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준다. 바라문(婆羅門), 공부하는 사람은 참는 것이 힘이다. 모든 일을 항상 신중히 생각해서 하되 다른 사람보다 아주 내 몸을 낮추어서 말한다. 그 참고 인내하는 것이 힘이 된다.

왕은 버티는 것이 힘이다. 거만하게 턱 버티고 도사리고 앉아 있어야 그 위엄에 억눌려 모든 일이 명령대로 된다. 정치하는 자들은 세력을 모아 가지고 버티고 앉아서는 권세를 부리는 것으로써 능사를 삼는 비민주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아라한(阿羅漢), 학자는 정진(精進)하는 것이 힘이다. 전문적으로 연구에 모든 힘을 기울여 오로지 정진할 따름인 것이다.

부처님은 사랑의 대자비(大慈悲)로써 힘을 삼는다. 이렇듯 지심귀명(至心歸命)이 제각기 다 다르지만, 우리가 오직 부처님만을 대은교주(大恩敎主), 사생자부(四生慈父), 삼계대사(三界大師)로 받들어 모시는 까닭은 그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기 때문이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이름이다. 욕계는 현실의 물질세계(物質世界), 색계는 준이상세계(準理想世界), 무색계는 이상세계(理想世界)다. 부처님은 이 삼계의 큰 스승이었다. 사생(四生)이란 인도 사상으로 생물의 태어나는 양상을 네가지로 분류한 것. 태란습화(胎卵濕化)로 나누었는데, 물론 오늘날 생물학의 분류와는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약기(略記)하면 다음과 같다.

태생(胎生)은 어머니의 태(胎)로서 분만되는 형태, 난생(卵生)은 알로서 태어나는 것, 습생(濕生)은 시궁창의 질척 질척한 습기 속에서 벌레며 박테리아등속이 생겨나는 것, 화생(化生)은 이끼며 곰팡이 등이 화해서 돋아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 사생의 자비스런 아버지시기도 하다. 아등본사(我等本師)는 우리의 근본 스승이시라는 것.

불(佛)은 각행(行覺)이 궁만자재(窮滿自在)한 분을 이르는 말이다. 깨달은 행동이 자유 자재하여 꽉 찼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색용(色用)을 칭찬해서 오근(五根)이 서로 잘 쓰이고 십신(十身)이 서로 잘 짜이어서 자재(自在)롭다는 것인데 오근호용(五根互用)은 열반경(涅槃經)의 팔자재(八自在)를 설명하는 글 가운데 나오고, 십신상작(十身相作)은 화엄경(華嚴經)의 십지품(十地品)에서 말하였다. 이렇듯 우리가 칭탄하는 불(佛)이란 그가 깨달았다든지, 깨쳤다든지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함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망녕된 생각을 떠난 것을 말함이다. 망녕되어 허둥지둥하는 그런 것은 미(迷)해 있는 상태며, 이와는 달리 그 지혜(智慧)스럽고 덕화(德化)있는 것이, 조금도 암영(暗影)이나 어두운 구석이라곤 없이 눈부신 광명(光明)이 두루 비치어 변조법계(遍照法界)해서 우주의 어느 곳에나 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또한 이것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고 그자재가 항상 큰 지혜의 광명을 발한다는 것을 각(覺)이라고 하며 깨쳤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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