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송 스님이 소장했던 추사 친필 사진 도판.
추사의 이 편지는 1854년 4월에 보낸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이다. 이 편지를 살펴보니 과천으로 찾아온 순 스님 편에 초의의 편지를 받은 추사는 뛰듯이 기뻤던지 ‘눈이 환하게 밝아지듯’ 마음이 상쾌해졌다고 하였다. 이는 초의의 편지를 받은 후,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 듯, 경쾌해진 그의 감회를 이리 표현한 것이다. ‘金?(금비)’란 무엇일까. 이는 금으로 만든 젓가락이다. 고대 인도에서 맹인의 안막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불가에서는 맹인의 가린 막을 금비로 제거하듯, 중생의 무지한 막을 말끔히 제거해 준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과천 시절 불교에 몰입했던 추사의 일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초의노추의 선궤에게, 승연암에서 쓰다.

순 승려가 오면서 (가져온)그대의 편지는 눈이 환하게 밝아지듯 매우 상쾌합니다. 또 순의 말로는 그대의 모습이 오히려 나처럼 늙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산중의 대나무 (맑은)기운이 원천의 덕을 길러 준 효험이 신령해서인가. 듣자니 화엄으로 사람을 제도하는 것은 어떤 공덕이며, 어떤 복인가. 그러나 화엄의 큰 뜻은 법당 앞 우거진 풀에 머문 지 오래입니다. 지금 드러난 발심을 깊이 새긴 것은 만나기 어려운 기이한 인연입니다. 봄이 되면 반드시 지팡이를 휘날리며 오셔서 발심을 도와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거듭 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인가하리라 생각합니다. 순이 돌아간다기에 나오지 않는 글을 억지로 씁니다. 나머지는 이만 1854년 4월 5일 노과(艸衣老錐禪, 勝蓮庵書

順衲之來 梵函如金?甚快 且順之言 師之梵相 尙不如我衰頹 是山中竹氣之所養泉德之?靈歟 聞以花嚴度人 何等功何等福 然華大義 法堂前艸深久矣 見今發心重刻者 是難値之奇緣 開春必飛一來 助發之如何 順許亦申復及之 想印可也 因順歸 艱艸不 姑不宣 甲寅 四月 五日老果)

 

이 편지는 원래 응송 스님이 소장했던 사진판 자료이다. 추사의 나이, 69세 되던 해에 보낸 편지로, 아끼는 벗, 초의를 노추(老錐)라 불렀다는 점이 흥미롭다. 노추는 노고추(老古錐)의 준말로, 초의의 수행이 오래 수행하여 그 선기(禪機)가 송곳처럼 날카롭고 예민하다는 의미로 쓰인 듯하다. 초의를 한껏 높여 부른 말이라 여겨진다. 또 피봉에 ‘승연암(勝蓮庵)에서 쓰다’라고 하였다. 과천 시절 그가 살던 집의 당호(堂號)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당호는 이 편지를 통해 처음 확인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승연’이란 그의 호는 1850년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도 사용한 바 있고, 백파의 법손 설두(雪竇:1824~1889)에게 써준 ‘백벽(百蘗)’에도 썼다.

따라서 추사 자신은 이미 속진의 고통을 벗어나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불학과 수행에 몰두했던 그의 과천 시절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던 시기였음이 확인된다. 이미 늙어 버린 추사였지만 동갑의 초의는 오히려 ‘나처럼 늙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결과는 바로 ‘산중의 대나무 (맑은)기운이 원천의 덕을 길러 준 효험이 신령해서인가’라고 놀린다. 특별히 대나무를 아꼈던 초의는 〈종죽(種竹)〉을 지어 ‘(대나무의)비고 곧음엔 지극한 이치를 품었고/ 바르고 꼿꼿함은 천기를 잡았다’고 노래했다. 이어 ‘무서리가 한번이라도 내리면/ 초목들은 모두 떨어지지만/ 무성한 기개 더욱 굳세고/ 푸릇푸릇한 대나무 빛 점점 더 푸르네’고 말했다.

초의가 이 편지를 받았을 당시엔 일지암에서 내려와 새로 지은 대광명전에서 수행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대광명전 초입에 들어서면 울창한 대나무 군락이 장관이다. 이 대밭은 초의가 조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광명전 뜰 앞의 대나무는 초의의 선기를 닮았는지 지금도 푸른 기상을 드날리며, 곧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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