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 청계사 '마음따라 향기법문' 5차 108선원 순례
고운사 고금당선원 · 봉정사

고금당 선원에서 108선원순례 단원들이 좌선 삼매에 빠져있다. 추운 날씨에도 이들은 선원을 찾아 정진하는 스님들을 격려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금당선원 중 최고(古) 선원 찾아
호성 스님 “공덕 지대할 것” 격려
암 완치 단원 동행, 기쁨 함께 해
소지의식서 축원금 모아 나눔행 결의
 
걸망을 진 보현보살들이 금당선원 앞 계단을 내려선다. 투명한 눈빛에 잡념을 털어낸 듯한 맑은 표정을 지은 이들은 청계사를 나선 108선원 순례단원들이다. 석 달 만에 선원을 다시 찾아 나선 이들은 그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선방 수좌 스님들의 공부가 잘되길 빌고, 제 스스로의 마음가짐도 새롭게 하기 위해 이렇게 나섰어요.”
 
조심스레 지난 기간의 공부가 어떠했느냐 말을 건네자 한 단원은 이렇게 답한다. 지난해 선방을 찾아 나선지 다섯번째. 짧으면 짧은 순례지만 오가는 답 속에는 깊이가 느껴졌다.
 
이번 순례길은 의성 고운사와 안동 봉정사를 거치는 여정이었다. 고운사 고금당선원에 방부를 들인 스님들을 공양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신라 신문왕 원년에 만들어진 의성 고운사는 천년고찰임에도 찾는 이들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없는 사찰이었다. 야트막한 산봉우리 사이에 시선을 가로막는 담이 없어 건물들을 쉽게 오갈 수 있었다.
 
여타한 사찰은 거의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나 유독 고운사만큼은 의성과 안동 사이에 입산한 계곡에 자리해 있다. 창건 당시 인적과 교통이 지극히 소외도고 불편하였을 것임에도 한때 366동으로 3000여 대중이 수도 정진하였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고운사(孤雲寺)는 의상 스님이 처음 창건 당시 ‘높이 뜬 구름’ 의미의 고운사(高雲寺)라고 이름했던 것을 신라 명문장인 고운 최치원이 기거하며 고운사(孤雲寺)로 이름 붙여졌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석학으로 이름난 함홍선사가 후학을 지도할 때는 무려 500명의 대중 스님들이 수행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그 규모가 많이 쇠퇴했지만 지금도 송림은 푸르렀다.
 
고운사에서 순례단은 육법공양을 올렸다.
이십 여 채가 조금 넘는 건물은 그 숲 사이를 알뜰히 둘러 자리했다. 새로이 조성한 일주문을 지나면 고운사에서 유명한 보는 이를 따라본다는 호랑이 벽화가 길손을 맞이한다. 우화루 서편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는 자리를 옮기면 호랑이 눈이 계속 따라다닌다. 마치 “누가 내 눈을 피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날 순례에는 문화해설사가 함께했다. 먼저 찾은 지장전에서 문화해설사는 재미있는 얘기를 건넸다.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를 다녀왔느냐?”라는 질문부터 먼저 한다는 얘기다. 고운사에는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영험한 지장보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동제일지장기도도량이라는 설명에 순례단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장전을 나와 대웅전에 들어서자 고운사 주지 호성 스님이 순례단을 맞이했다.
 
호성 스님은 “어리석은 이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똑똑한 이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100배 낫고, 똑똑한 이보다 지혜로운 이, 지혜로운 이보다 벽지불이, 벽지불보다 무심도인에게 올리는 공양이 100배 낫다는 말이 있다”며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이 바로 무심 도인으로 그 공덕이 지대할 것”이라고 순례단을 격려했다.

예불 후 사찰 참배를 이어갔다. 대웅전 앞마당 끝에서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당선원 구역이다. 한국에 있는 세군데 금당선원 중 가장 오래됐다는 고금당 선원으로 원래 주불전이었던 곳을 현재 참선을 하는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금당선원에는 11명이 방부를 들였는데 결재 중이라 스님들의 신발만이 가지런했다. 순례단은 잠시 방선인 틈을 타 스님들의 좌복 앞에 앉아 입정에 들었다. 몇 차례 선원을 다녀서인지 이제 순례단의 모습만큼은 어느 스님 못지않았다.

선방을 나오자 정진하면 기운이 솟구쳐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머리가 맑아지고 잡념이 사라진다고 입승 스님은 소개했다.

입승 법륜 스님은 “금당선원 중 첫 번째로 오래돼 고금당선원으로 불린다”며 “산의 기운이 맑고 센 곳이라 전강, 고우, 혜국, 철산 스님 등 여러 선승들이 거쳐 갔다. 근래에는 근일 스님이 조실로서 후학 지도에 나서고 계시다”고 소개했다.

고운사를 뒤로 순례단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마을로 향했다. 평소 사찰에서 공양을 하지만 이날만큼은 특별히 순례를 앞두고 암 완치 판정을 받은 단원이 대중공양을 올렸다. 순례단은 함께 식사하며 단원의 완쾌를 기뻐했다.

고금당선원 좌선 후 순례단원의 표정은 활기가 넘쳤다.
점심식사 이후 찾은 안동 봉정사(鳳停寺)는 고즈녁함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봉정사는 672년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그의 제자인 능인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봉정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있다. 좌우로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양날개를 이루고 있어 화엄강당을 축으로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의 두 축으로 구성돼있다. 한절에 중심이 둘 있는 배치는 봉정사가 유일하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아제아제바라아제’ 등의 촬영지가 되며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해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한 뒤 수많은 이가 찾았다니 기대가 됐다.

사찰 초입에서 순례단을 맞이한 문화해설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지니고 있다는 상징성이 이 절의 유서깊음을 드러내지만 무엇보다 고려 중엽의 극락전, 조선 초기 대웅전, 조선 후기 고금당과 화엄당강이 있어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흐름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고 의미를 전했다.

문화해설사의 의상 스님이 도력으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렸는데 종이 봉황이 앉은 곳이 지금의 봉정사였기에 이 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 했다는 설화를 듣던 순례단은 “의상 스님 화엄사상 1호점이네요”하며 활짝 웃었다.
순례를 하며 천년고찰을 찾아가보면 사찰 전체가 신축건물들로 인하여 옛 멋을 찾아보기 힘든경우가 많지만 봉정사는 고풍스런 각 시대별 건물들이 옛 단청을 간직한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함께 둘러본 봉정사에서는 각자 쓴 소원지를 태우는 소지의식이 진행됐다. 그동안의 소지의식과 달리 이날 의식에서는 축원금이 모연됐다. 순례단은 이날 모은 돈을 연말 복지관에 사용하기로 했다.

자연 순례단 회장이 선원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다.
순례단 단장 성행 스님은 “향후 쌍계사, 동화사 선원에도 들릴 예정”이라며 “초심으로 돌아가 지속적으로 선원 순례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또 “먼지가 내리면 먼지가 쌓이듯, 비가 내리면 비가 젖듯, 자연스럽게 상을 내지 말고 정진을 계속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시공을 초월해 긴 세월을 묵묵히 얘기하는 봉정사의 모습에서 순례단은 발길을 쉬이 돌리지 못했다. 봉정사를 돌아 나오는 길 순례단의 마음을 담은 작은 돌무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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