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로 공개되는 응송 스님 자료에 있는 추사 친필본
추사의 이 편지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로, 1853년 섣달 16일,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인데, 응송스님의 연구 자료 속에 들어 있던 친필본 사진판 자료이다. 과천 시절, 추사의 일상을 잘 드러낸 편지이며, 새로 간행된 〈유마경〉, 〈능엄경주〉를 얻은 후, 이 경전을 읽는 즐거움을 “매우 볼만하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 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으니 초의는 나를 잊었는가. 나는 즉 (그대를)잊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대를)잊지 않은 것은 비록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고, 또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최근 새로 출판한 유마경 2권과 능엄주를 얻었는데, 매우 볼만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그대를)잊겠습니까. 근일에 운구와 함께 지냈던 일 년은 흡족했습니다. 운구와 함께 노쇠해지지 않기를 밤낮으로 소망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을 눈으로 꿰뚫어 보고 싶은 것은 차와 편지일 뿐입니다. (늘)볼 수 없음이 애석하여 마침 강진의 인편에 거듭 차와 편지를 재촉하니 늙은이의 탐욕을 막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새 달력을 인편에 보냅니다. 이만 1853년 12월 16일 경가화남(一截無聲聞 艸衣其忘我耶 我則不忘耳 其不忘者 雖欲忘不可得 又何以可得也 近日有新刻維摩經二楞註 甚可觀閱 此經時其何以忘之也 近日與雲句共處恰一年矣 與雲句無衰壞 日夕所望 所望而眼欲穿者茶信耳 能不見憐 適憑康津便 又此催茶信 老?之不能制如是耳 新蓂付從 不宣 癸丑臘十六 庚迦和南)

이 편지보다 앞선 시기의 편지는 〈완당전집〉〈여초의〉36신과 〈여초의〉37신이다. 이 편지는 대략 1853년 2월27일과 이 해 여름에 보낸 것인데, 이 해 섣달 16일에 보낸 이 편지에 “일 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다”고 한 것과는 시기적인 차이를 보인다. 1853년 여름 이후 편지의 내왕이 없었다하더라도 실제 두절된 것은 7개월에 불과한데, 일 년이라 말한 것. 이 내막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의 발굴이 기다려진다. 한편 그는 “초의는 나를 잊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대를)잊지 않은 것은 비록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고, 또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시 상황적으로 초의와 소식이 두절되었지만 자신은 한순간도 초의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 입수한 〈유마경〉과 〈능엄경〉의 탐독은 그의 일상을 흡족하게 만든 듯. 이런 상황이므로 “어찌 (그대를)잊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참으로 이들의 인간적인 교유와 보인(輔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특히 〈능엄경〉에 밝았던 운구 승려를 언급한 대목이 눈에 띤다. 당시 추사는 운구(雲句)와 일 년을 함께 지내며 〈능엄경〉을 강론했음을 알 수 있다. 운구(雲句)에 대한 내력은 그가 권돈인에게 보낸 〈여권이재(與權彛齋)〉21신에 자세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이 승려 한민(漢旻)은 자칭 운구라고 하는 자입니다. 작년부터 나와 내왕했는데, 신근(信根)이 대단하고 원력(願力)도 대단합니다. 비록 제승(諸乘)을 두루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금강경(金剛經)〉·〈능엄경(楞嚴經)〉에 대한 공부가 대단하고, 그 정진(精進)하는 정성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으니 당시 〈〈능엄경〉〉에 대한 의문을 운구와 담론하며, 흡족한 나날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운구를 떠나보내며, 쓴 〈증운구상인(贈雲句上人)〉에 “중략…정의 뿌리는 어디에 박혔는지(情根根何處) 머뭇거리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구나(??不忍別)”라 하였다. 진정 정의 뿌리는 얼마나 단단하기에 이리 머뭇거리며 떠지지 못하는 것일까. 공각의 소생을 논했던 추사, 탈속한 경계에서 선적인 삶을 경주했던 그에게도 인간의 정은 이리도 그의 발목을 잡는 아쉬운 회한으로 드러나는 실상(實相)인가. 늘 초의를 “볼 수 없음이 애석하여 마침 강진의 인편에 거듭 차와 편지를 재촉”하는 자신, 차를 탐하고 초의를 그리는 늙은이의 탐욕은 제어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를 청하는 은근한 말이 더욱 돋보인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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