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스님 열반 70주년 ‘만해의 길을 가다’- ① 충남 홍성 만해 스님 생가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스님은 한국 근현대 인물 중 가장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깨달음의 길을 걸었던 수행자였으며, 격랑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안았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고, 시대의 아픔과 진리의 열망을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이었다. 또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부르짖었던 민족주의자요, 항일운동가였다. 이 모든 것이 6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만해 스님을 평가하는 수식이다.
올해는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가장 다각적 평가를 받는 만해 스님의 열반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본지에는 이에 맞춰 만해 스님이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그 사상과 유훈을 돌아보고 한국불교의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옛 홍주 결성서 1879년 출생
유학자 부친 영향… 한학 공부
9세에 書經 능통 ‘신동’ 평가
동학운동, 홍주의병 등 접하며
시작한 ‘시대적 고민’은 출가로

▲ 문학체험관 앞 만해 스님의 흉상.
충청남도 홍성(洪成)은 예로부터 의인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고려 충신인 최영 장군을 비롯해 조선시대 사육신 성삼문과 항일 투사 김좌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두 ‘의(義)’라는 기재를 충직히 지켜온 인물들이다.

한국불교사의 한 획을 그은 만해 한용운 스님도 홍성이 자랑하는 위인이다. 실제 홍성군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홍성 8경’ 중 하나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가지를 꼽는다.

현재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는 만해 스님이 살았던 생가와 체험관이 함께 복원돼 있다. 총 3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만해 문학체험관은 대지면적 2803㎡, 연건평 1090㎡ 규모의 2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2007년 10월 개관했다. 전시실에는 만해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60점의 유품과 작품을 비롯해 만해의 사상과 작품 세계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시청각 영상시설이 설치됐다.

세미나실과 창작실은 만해를 연구하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어린이 체험실은 흔적체험용 탁본, 영상시설, 300여권의 만해 관련 도서, 정보검색용 컴퓨터, 퀴즈코너 등을 설치하는 등 어린이들의 유익한 체험의 장으로 꾸며졌다. 지자체 별로 스토리 텔링을 통해 관광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만해 스님의 삶과 사상은 매력적인 아이템임은 분명했다.

만해 문학체험관 위에는 스님의 생가지가 복원돼 있다. 지금으로부터 135년 전인 1879년 8월 29일 이곳에서 만해 스님은 유학자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方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요, 어릴 적 이름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이었다.

만해 스님의 할아버지 영우(永祐)는 훈율원 첨사, 증조부 광후(光厚)는 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역시 충훈부 도사를 지낸 양반 계층이었지만 가세는 매우 곤궁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들어 한국불교근현대사 연구 전문가인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자신의 저서 〈첫 키스로 만해를 만나다〉에서 만해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 즉 잔반의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나타난 정치·사회적인 변동이 만해 스님의 가문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만해 스님의 아버지와 증조부 모두 관직에 올라있는 명실상부한 양반이었으며, 스님의 유년 시절 동리 사람들이 그의 집을 ‘한초시댁’으로 부른 것도 유사한 이유”라면서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은 중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만해 스님이 출생했을 당시에는 양반으로서의 생활에서 이탈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스님 생가. 새롭게 복원된 것으로 2007년에는 만해 스님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문학 체험관도 개관됐다.
만해 스님이 태어났을 시기는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되고 있는 말 그대로 ‘격랑의 시대’였다. 스님이 태어나기 3년 전인 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으로 최초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 체결로 조선은 세계에 문호를 열고 신문물을 받아들이게 됐지만, 일본에게는 한국을 침략하는 첫 교두보 역할을 했다. 

스님의 성장하는 시기의 정세는 더욱 소연해졌다. 만해 스님이 6세이던 1884년 갑신정변이일어났으며, 한성조약이 체결됐다. 이듬해인 1885년에는 영국 극동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한 뒤 영국 국기를 계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요새를 만들었다. 

이 당시 어린 만해 스님은 서당을 다니며 한학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의 위인들이 그렇듯이 스님 역시 상당한 수재였던 것 같다. 9세 때 원나라 당시의 잡극(雜劇:元曲)의 명작인 〈서상기(西廂記)〉를 읽었으며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 유교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에 능통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이 ‘신동’이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 어린 만해가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였다. 스님은 〈대학(大學)〉을 읽으며 책의 군데군데를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경을 칠 일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서당 훈장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어린 만해는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9세에 〈서경〉을 읽고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자해(自解) 통달했다고 하는 천재였지만, 훈장은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한다.

뛰어난 한학 실력으로 만해 스님은 14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제안으로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개중에는 만해 스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지만, 스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였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스님은 천안 전씨(全氏)와 결혼해 평범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 만해 스님이 어릴 적 배운 한학 교재.
하지만 시대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1889년에는 강원도 정선에서, 1890년에는 경상도 함창, 강원도 고성, 제주 등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1892년에는 함경도 함흥에서 민란이 일어난데 이어 동학교도들이 교조 신원을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1893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총65건이 발생했다.

그만큼 민심은 어지러웠고 정세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만해 스님이 16세가 되던 1894년 1월 10일 마침내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던져졌고, 이는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다. 소년이었던 만해 스님에게 동학농민운동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 스님이 18세가 되던 1896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스님도 이 운동에 동참한다. 의병군은 홍주 호방을 습격해 1000냥의 군자금을 탈취했다는 통설도 존재하며, 이때부터 항일운동의 정신이 스님 안에서 싹트고 있었다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의(義)’의 기개는 선친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만해 스님이 잡지 〈삼천리〉 1933년 9월호에 기고한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 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걸사(스님)의 언행을 가르쳐 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나도 의인·걸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이 같은 스님의 기술에 대해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은 자신의 저술한 〈만해 한용운 평전〉에서 “만해 스님이 어릴 적 선친으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며 “당시 사회 환경과 가정 형편상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선친에게서 훌륭한 정신교육을 받고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 문학체험관 전경. 일대는 홍성 8경 중 하나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시대적 상황은 스님을 세상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만해 스님이 집을 나와 출가한 시기는 19세, 25세로 나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만해는 누구보다 민중의 궁휼한 삶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고민하고 고뇌하고 있었다.

극한 상황에서 만해 스님은 ‘인생은 무엇인가, 밤낮 근근이 살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를 곱씹고 또 곱씹었을 것이다.

‘의’와 ‘충절’의 고장 홍주에서 출발한 만해 스님의 발자취는 곧 강원도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불교를 만나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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