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생활은 의식을 존중

‘육시행원 예참문’은

의식을 받들어 절하고

참회하고 뉘우치는 지침의 글

 

 

머리말

사람들이 사는 양상은 천태만상이다. 그러나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한시도 마음 놓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서 쓸 것인가? 과연 이것이 사람 사는 모양인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믿고 마음을 어디에 의지하며 어떻게 삶을 영위하여야 참다운 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그리하여 되는 둥 마는 둥한 생활들을 아무렇게나 꾸려나가고들 있다.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목숨은 귀중하다. 결코 아무렇게나 탕진해 버릴 그런 흙이나 돌덩어리 같은 것은 아니다. 정신없이 허둥거리다 한 평생을 지내고 보면 한탄밖에 남는 것이 없으리라.

밤잠을 못 자고 뉘우치고 눈물 흘리는 자에게는 훤히 길이 트일 것이다. 부처님의 길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그것은 실상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 위에 세워져 있다. 눈을 뜨고 바라본다면 그것은 멀리도 아닌 바로 생활 한 가운데 오히려 탄탄대로로 놓여 있음을 알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오랫동안 길을 버리고 제멋대로 폭풍의 벌판을 우왕좌왕 휩쓸려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는 신(神)을 설명하지 않는 종교다. 신이 있다고 믿는 데서 저 숙명론(宿命論)의 중세기가 시점을 가져왔었다. 현대에 이르러 신이 죽었다고 하여, 즉 신이 없다고 보는데서 허무와 불안의식이 창궐하였다.

원효대사는 중도를 지키라고 하였다. 인간이 목숨의 존귀함을 깨닫고 정성을 다하여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길, 그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진리의 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스스로 이러한 물음을 되새기면서, 원효불교를 표방하는 우리 동학반려들의 교육을 위해 마련했던 〈육시행원예참문(六時行願禮懺文)〉 강의의 초록을 다시 엮어, 이에 해답코자 한다. 아울러 종교적인 회의에 빠진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조그만 횃불을 밝혀 길잡이가 되어 진다면 퍽이나 다행한 일일 것이다.

〈육시행원예참문〉은 사찰에서 동학반려들이 생활하는 지침이다. 동학들 뿐만아니라 모름지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길을 원하는 모든 분에게 마찬가지로 밝은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1. 육시행원예참문(六時行願禮懺文)

육시(六時)는 옛날 동양의 시간, 동양에서는 오늘처럼 오전, 오후 12시간이 아니고 하루는 밤과 낮 6시로 나뉘었었다. 이를테면 자시(子時)는 밤 11시부터 자정을 지나 1시까지 또 오시(午時)는 낮 11시부터 정오(正午)를 지나 13시까지 밤낮으로 간단없는 승려의 시간을 말한다.

 

행원(行願)은 종교생활.

행(行)이 곧 원(願)이고 소원하는 바가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생활이다. 종교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바라고 희망하고 소망하는 원이 마음 속에 가득차 있고, 그러한 소원이 곧 행동으로 옮겨져 여실히 그것을 나타내고, 언제나 행동과 소원이 빈틈없이 일치하여 있는 생활, 그것이 종교 생활의 참 모습이다. 이것은 비단 승려의 본연한 자태일뿐더러 모든 인간이 갈구하여 마지않는 생활 형태다. 마음에 없는 현대의 메카니즘 생활에 얽매어 늘 의식 과잉에 허덕이는 사회인들, 그들의 인간 소외는 하루 바삐 구제되어야 한다.

예(禮)는 의식(儀式) 세리머니다.

종교 생활은 의식을 존중한다. 의식은 행사이며 경건한 태도로 이를 정중히 받들어야 한다. 예는 의식이며 따라서 형식이다. 종교 생활은 형식을 존중한다. 예가 형식이기 때문에 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종교 생활뿐만 아니라 문화를 등진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형식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 동물에 가깝다.

인간 문화의 모든 내용은 언제나 일정한 형식 속에 담기어져 왔다. 형식을 떠난 내용이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예가 의식이고 형식이라 하더라도, 역시 내용을 담은 형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참(懺)은 반성하고 뉘우친다는 것, 참회.

그리하여 〈육시행원예참문〉이란, 우리가 종교 생활을 하는 동안, 한 시도 쉴 새 없이 밤낮으로 의식을 받들어 절하고, 참회하고, 뉘우치는데 지침이 되는 글이다.

 

효당 최범술(1904~1979) 스님은

불교계 원로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요,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가이며 현대 한국차도의 중흥조이다. 젊은 시절 이름은 영환이요. 당호는 금봉이며 법호는 효당이다. 효당은 1904년 음력 5월 26일 진시에 경남 사천군 서포면 율포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외에서 동지들과 함께 열렬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제 총검하에 무려 수십회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글은 지난해 12월 발간된 〈효당 최범술 문집(편자·효당사상연구회 회주 원화 채정복)〉 전 3권 중 제 2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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