癡心 줄이기-더 비우자

자신의 정체성 모르는
우치가 탐욕·진에 일으켜
바깥과 상호작용 멈추고
내면의 독소와 투쟁을

▲ 윤원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경전을 비롯한 불서(佛書)를 보면, 불법(佛法)을 병 고치는 약 처방에 비유하는 대목을 흔히 볼 수 있다. 하기는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어느 종교에서나 성현들이 범부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인간과 세상의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내용이다. 질병의 고통에 대해서 그 원인을 진단하고 치유할 방도를 처방하며 치유과정을 인도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의술이 상통하는 셈이다.

부처님이 진단하는 중생의 근본적이고 절박한 문제는 무엇인가?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에 그 진단과 처방의 요체가 담겨있다. 부처님은 중생의 삶이 온통 괴로움의 바다임을 보았고 그 원인은 갈애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괴로움을 해결할 방법으로 팔정도를 처방하고, 이를 따르면 괴로움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사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라고 했는데, 기실 갈애는 혐오와 짝을 이룬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좋아하는 것이 설정되면 자동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설정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양쪽 모두의 주체이며 기준이 되는 것은 ‘나’ 즉 자아이다. 나한테 유리하고 즐거운 것에 대해서는 탐욕을 일으키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진에를 일으킨다. 즉 탐욕과 진에는 모두 결국 ‘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범부중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는 성을 내며 물리치는 데에다가 에너지를 온통 쏟아 붓는다. 그게 실은 괴로움을 생산해내는 활동인 줄을 모른다.

좋아하는 것을 가급적 많이 누리고 싫어하는 것을 가급적 피한다면 즐거운 삶이지 그게 왜 괴로움이란 말인가?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함의 주체이며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는 ‘나’라는 게 당최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의 가르침이 바로 그 얘기다. 범부중생은 ‘나’를 당연하고 엄연한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실체로 여긴다. 그래서 ‘나는 저게 좋아,’ 또는 ‘나는 이거 싫어’라고 쉽게 판정하고 선언한다. 그 판정을 절대시하면서 현생에서 누리는 생명의 에너지를 온통 그 호오의 가름에다가 투여하며 살아간다.

그게 삶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무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나’라는 관념이 애초에 허망하다. 그런 줄을 모르고 우리는 자신에게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주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이고 판단하며, 자기에게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를 따지는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살아간다. 자기 자신의 실제 정체성을 잘못 알고 있는 어리석음 즉 우치(愚癡) 때문에 탐욕과 진에를 일으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이 탐욕과 진에, 그리고 우치를 삼독이라고 일컬은 것은 그게 중생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 치명적인 독을 범부중생은 독인 줄 모르고 오히려 애지중지하며 집착한다. 원효대사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세 가지 독물 같은 번뇌를 자기 재산으로 삼는다”(三毒煩惱爲自家財)고 한탄한 게 바로 그 얘기이다. 가히 심각한 중독 상태라 할 만하다.

중독(中毒)이 되었으면 해독(解毒)을 해야 살 수 있다. ‘디톡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해독을 뜻하는 디톡시피케이션(detoxification)의 줄임말인데, 대체의학에서는 좀 더 특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즉 유해물질의 섭취를 피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신진대사 과정에서 몸속에 생산되는 노폐물을 원활하게 배출하여 독소를 빼는 조치를 가리킨다. 정신의 해독을 위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평온케 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방법이 디톡스라는 구호 하에 상업적으로 개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탐진치 삼독을 풀어내는 일이다. 탐욕과 진에는 다른 글에 맡기고 이 글의 임무인 어리석음의 해독 방법을 궁리해보자면, 궁극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무아의 이치를 깨달아서 자아에의 집착과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극복해야지만 어리석음을 떨치고 실상을 환히 아는 지혜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실천적인 처방으로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싶은 것은 한가로운 시간을 가급적 많이 또 자주 마련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로운 시간이라 함은 빈둥빈둥 노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잠자는 동안을 빼고 하루 종일 우리의 모든 지각과 감각과 관심과 신경은 오직 바깥을 향해서 뻗쳐나가고 바깥으로부터 자극을 흡수하느라고 분주하다. 그 ‘바깥’과의 상호작용만으로 채워지는 나의 삶의 시간 속에 짬짬이 억지로라도 그 상호작용을 멈추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짬에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명상을 행하라는 것이다. 회광반조란 나의 관심과 지각과 감각과 신경이 온통 바깥으로만 향하던 것을 이제 거두어들여서 나 자신으로 향하게 하여 나 자신을 돌이켜 비추어보는 것이다. 그래야 나는 과연 누구이고 무엇인가, 내가 당연히 나라고 생각하는 그 존재가 정말 나인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모든 것이 정말로 타당한 건가, 등등 자아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탐색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불교에서 명상수련, 참선이 가장 기본적인 수행방법으로 되어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시각각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일을 해도 먹고살기 힘든 판국인데, 웬 사치스러운 말씀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표현이 한가로운 시간이니 어쩌니 했을 뿐이지, 그건 사실은 중생이 온전한 생명으로 살기 위해 내 속의 독소와 치열하게 싸우는 생존투쟁의 시간이다.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절박한 일을 두고 한가롭고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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