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행하는 것을 배우는 겁니다

▲ 그림 최주현

세계적으로 지금 부패되고 하는 그 모두가 마음에서 나오는 염파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잔잔하게 하고 안정되게 하고
전 세계를 파악해서 올라가는 거는 좀 내리고, 또 내려가는 거는 좀 올리고
이렇게 균형을 맞추면서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그러한 주장자가
바로 여러분의 핵심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 좀 해 보십시오. 안방에 앉아서 세계를 봅니다. 또 인공위성을 통해 여기 한국의 신문이 미국으로 떨어지는데 한 찰나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이 내가 가르치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는 걸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신통이라는 그 시스템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 여러분이 잘 아시겠죠. 전자에 부처님께서 그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이 지금 실천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신통의 핵심을 안다면, 인공위성을 띄워서 아는 것보다도 인공위성 띄우는 그 자체까지도 정복할 수 있는 거죠. 모든 이치를 정복해서 다 해결할 수 있으니, 그 연구하는 사람의 앞장을 설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연구하는 사람이 연구를 제대로 못할 때는 내가 돼 줄 수 있는 그런 여건도 돼야 된다 이거죠. ‘모습 없는 모습이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이 소리가 바로 팩스하고 탐지기, 통신기, 이런 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파력으로써 전 세계를 지금 누비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것을 부처님께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고, 모습 없이 화(化)해서 천백억화신이 들고 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게 여줄가리에 뭐, 이 담벽이 어떻고 이 담벽이 어떻고 이런 거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배를 타고 가는데 그 배가 그대로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고정됨이 없다 이겁니다. 항상 흐르고 흘러서 가는, 찰나찰나 화하고 변해서 돌아가는 내 마음이 그렇게 만법을 응용할 수 있고, 만법을 바로바로 우리가 찍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거,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걸 가르친 거지, 이리저리로 다니며 이론을 파악하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먹는 겁니다. 쌀이나 밥으로 비유하건대, 쌀이 옳으냐 밥이 옳으냐 했을 때 밥도 아니고 쌀도 아니다. 그냥 밥을 먹을 뿐이다 이 소립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뿐이다.
그거는 왜 그러냐?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고 나쁘다 좋다, 이걸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겠다, 이런 사유는 전부 알고 있습니다. 행이 문제지. 그래서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불교라는 말은 다 아는데, 구십 살을 먹고 백 살을 먹어도 행하기는 어렵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행하는 법을 배우는 거지 지금 이론을 배우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팔만대장경의 근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질문하기 이전에 내가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의 근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도1(남): (대중 가운데서) 마음에 있습니다.

큰스님: (잠시 멈추시고) 또 세상살이, 전 세계가 돌아가는 이 근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도2(남): (대중 가운데서) 현재 이 자리 아닙니까?

큰스님: 허허허…. 그렇게들 잘 아시는 분이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가겠습니까? 전 세계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한 주먹에 넣고, 내 근본을 그대로, 이 핵심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하죠. 지금 가고 옴이 없이 일을 해야 하고 이럴 때…, 만약에 전파를 저 미국에 쏘는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지 않습니까, 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도 그랬지만 우리가 핵심을 꿰뚫어서 파악하면요, 전부 우리가 가고 옴이 없이 빛보다 더 빨리 찰나찰나 옮겨서 돌아간단 말입니다. 금방 아버지가 됐다, 금방 할아버지가 됐다, 금방 남편이 됐다, 금방 형이 됐다가, 동생이 됐다가 온통 그렇게 바꿔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핵심적인 각자, 나의 그 핵만이 나를 지금 운행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 핵심은 뭐냐? 안에서도 지금 오십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러한 생명의 의식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한번 생각해 보시렵니까? 이것도 혹성입니다. 그런데 항상 했던 말이지만 다시 한 번 반복하는데, 지구에 지금 생명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발을 딛고 다닌단 말입니다. 그리고 지구도 지금 그 마음의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전부 나고 들고 하면서 대기권이 생기고 법계(法界)가 생긴 겁니다. 우리도 지금 생명들이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발로다가 여기 딛고 다닐 수도 없죠, 뱅글뱅글 돌아서.

그러니까 이 핵심적인 나에게서, 원자에게서 입자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불성 자체, 자기 자생(自生)이 자승(自昇)이 된다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생이라면 자기를 자기가 발견해서 자기가 새로 태어난 겁니다, 마음이. 그러니 태어나 가지고 자승을 한다는 것은 승화를 시키는 거죠. 일으킨다는 겁니다. 일으키는 게 만약에 불이라면 이 몸뚱이는 촛대이고 심지는 마음내는 거다. 마음 이 자체, 즉 불이라는 건 본래 밝았으니까 불이라 하는 거죠. 그래서 심성(心性)이 무심성(無心性)…, 이 깊은 속에는 연등이 항상 밝아서….
나는 여러분처럼 책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책은 못 읽었지만 이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전부 팔만대장경이에요. 다른 것이 없더라고요. 허허허. 그러니 아니, 굳이 그 한문으로 된 거를 읽어서 요게 언짢으니 요게 좋으니 하고 까발리면 무슨 소용 있느냐 이겁니다. 행이 문제지. 내가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어야 배고픈 걸 면하지 않아요? 내가 똥 눌 때에 이유가 뭐가 붙습니까? 똥 눌 때는 똥을 시원하게 눠야 아주 가뿐하죠. 잠잘 때에 잠잘 수 있어야만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를 용이하게 방편 삼았다 이거죠.


미국에 들어가서 보니까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이게 유행이 돼 가지고요. 여기 한국에선 난 몰랐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유행이 돼 버렸어요. 날더러 묻기를요,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오돈수가 옳습니까, 돈오점수가 옳습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리고 또 어느 스님께서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바로잡아 놓기 위해서 돈오돈수를 말씀하신 걸로 됐더라고요. 나는 그래서 다른 말 안 했습니다. 단 한 가지, 핏물 구정물 고름물 뭐, 갖은 물이 다 그냥 고랑으로 쏜살같이 내려가는데 그 물을 핏물이다 고름물이다 가를 게 없다 이거죠. 돈오돈수다, 돈오점수다가 어디 거기에 붙는 자리냐 이거예요. 그저 똥물이든 핏물이든 젖을 뿐이죠. 그것도 방편입니다, 이름해서. 그렇게 말했죠. 다들 헤어지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야, 참 그건 말할 바도 못 되고 말할 건덕지도 없는데….’ 이 세상에는 말이 다 필요 없는 겁니다. 이게 크니 이게 작으니…. 모두가. 제가 이번에도 ‘야,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보고 듣는 그런 걸로 관념적인 행이 그대로 박혀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글쎄, 예를 들어 얘깁니다. 무조건 불 속에 들어가서 재판관을 만나서 사유를 따질 건 따지고 해결할 건 해결하고 나와야 되는데 아니, 불 속이 뜨겁다고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뜨겁다는 건 물질적으로 살아서 돌아가던 사람들의 습관적이고 의식적이고 관념적인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체가 없어서 불 속에 들어가도 타 죽을 리가 없는데, 불 속에 못 들어가거든.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이 “아휴, 지금 정신이 이렇게 돼서 정말 죽겠습니다.” 할 때 “그렇게 놓고 가세요.” 그러면 “안 놔집니다.” 그럽니다. “놓는 것이 어떤 건지 그걸 모릅니다.” 이거죠. 그리고 또 며칠 있다 오면 또 똑같은 소릴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럽니다. 참 저 때 벗기기가, 꺼풀 벗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관념적인 때, 무슨 죄를 지었다는 때가 아니라 살아온 습, 착, 욕심 이것이 그냥 주저리주저리 붙어 있어서 도무지 한 꺼풀 한 꺼풀 이렇게 벗길 수가 없는 거죠. 대신 좀 해 줄 수만 있다면 모조리 그냥 대신할 텐데 말입니다.
물론 병이라든가, 우환이라든가, 어떤 사람이 집을 나갔다든가 하는 천차만별로 돼 있는 거를 “스님! 저기….” 하면 심부름꾼은 돼 줄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깨닫게 해 줄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건 스스로 본인 자신들이 해야지…, 그게 뭐 어렵습니까? 세상에 고깃덩어리를 믿으랍니까, 이름을 믿으랍니까, 형상을 믿으랍니까, 허공을 믿으랍니까? 자기 자신을 끌고 다니는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데 왜 못 믿습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답답한 것도 자기 자신한테 놔야 그게 입력이 돼서 앞서 입력됐던 게 없어지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소리를 자꾸 왜 하느냐 하면 나도 골치 아프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마는, 천성인가 봅니다. 허허허…. 이거를 재서 그냥 어떡하면 알게 할까 하는 그런 그 욕심에…. 내가 이러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에요. 그래서 항상 ‘몸은 깎아질지언정 내 마음이야 어찌 깎아질 수가 있겠느냐.’ 하고 지금 하는 거거든요. ‘몸이야 오늘 살다가, 오늘 길을 가다가 엎드러지든 제껴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이러한 생각으로 이렇게 해 나가고 있습니다마는, 아주 핵심적인 귀중한 사실은 꼭 거기에서만이 전체가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보십시오. 앞으로 십 년을 내다볼 때, 아주 간단히 십 년만이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게 만 년도 되고 그러니까. 십 년을 내다볼 때에 핵심적인 이 도리로 만약에 앉아서…, 지금도 앉은 자리에서 전 세계를 통해 모든 것이 전파가 되고, 이 법계로 전체 통신이 되지 않습니까? 그 통신망이 없으면 안 돼요. 첫째 통신망, 둘째 전파를 해서 알리는 거, 세 번째는 하는 겁니다, 그냥. 뭐 그건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이 여기 철철 넘는다면 ‘물이 철철 넘어서는 안 된다.’ 이걸로써 끝나는 거지, 거기 이유가 붙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뭐, 이렇고 저렇고 하는데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여러분 법이 부처님 법이니까. 여러분이 없고서 부처님이 어딨으며 법이 어딨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을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것에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을 겁니다, 아마. ‘저 사람 무슨 씨나락 까 먹는 소리 하고 있다.’고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철철 넘으면 안 돼.” 하면 그냥 법이지, 어떻게 이유가 붙겠습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지금 부패되고 하는 그 모두가 마음에서 나오는 그 염파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잔잔하게 하고 안정되게 하고, 전 세계를 파악해서 올라가는 거는 좀 내리고, 또 내려가는 건 좀 올리고 이렇게 균형을 맞추면서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그러한 주장자가 바로 여러분의 핵심에 있다 이 소립니다.

항상 말하지만, 우리 역사도 몰라서 그렇게 만든 거 아닙니까? 또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한국이 급속도로 발전이 됐다고 하는 동시에 뭐가 일어났습니까? 수만 가지 부패적인 문제들이 그냥 왈싹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완전히 안정되게, 기계를 조립을 해도 완전히 잘 조립을 해서 틀림없게 만들어 놨어야 기계를 돌려도 아무 지장이 없는데 아, 기계를 불완전하게 조립해서 그냥 갖다 틀어 놓으니까 부속품이 이리로 하나 빠져서 달아나고, 저리로 하나 빠져서 달아나고 이러는 격이나 똑같은 게 우리 경제 발전이라고 볼 수 있겠죠. 경제 발전만이 아니라 문화 문명의 발전도 있겠지만 손실이 더 많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손실이 됨으로써 자기가 또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생기기 때문에 그건 손실이라고만 볼 수 없죠. 그렇게 돼야만이 개선해 나가고 다시 생각해서 다시 갖다가 굳건히 나사를 박을 수가 있으니까요.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가 지금 좋은 여건에 처해 있고 발전은 됐지만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발전은 아니다라는 평판이 돌고 있죠. 하지만 지금 여기 선원에서 배워 가지고 나가는 분들이 세계를 좀더 밝게 보시고 밝게 듣고서 점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미리 ‘아, 내가 이런다고 될까?’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죠.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도 완성 못하거니와 세계를 가고 옴이 없이 무심(無心) 축지법으로 해서, 전파를 통해서 통신을 하고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의 머리가 돼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은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이론이나 따지고 이게 그르다 옳다 이러고 앉아 있을 시기가 아닙니다. 이 모자라는 내가 볼 때도 그렇게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그렇게 모두 잘 배우신 분들이…. 여러분이 배우신 거를 나에게 조금만 줘도 내가 응용해서 잘 쓰겠는데요. 배운 지식이나 학식이나 이런 모두는 내가 핵심을 터뜨려 놓고서야 그걸 쓸 수 있는 겁니다. 그것도 버릴 거는 버리고 쓸 거는 쓰고 이렇게 추려서 쓰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그렇게 위대한 존재며 광대무변한 법을 한 주먹에 쥐고 나갈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얘기죠.


나는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밖에 나갈 때 꽃이 피어 있으면 “얘, 네가 애당초에 꽃으로 나온 것은 바로 마음이 유하고 또 부드럽고, 남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냐? 그래서 너는 이렇게 꽃으로다가 환생이 돼서 나왔잖아?” 하고 말이죠. 물론입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여자의 모습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여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 행을 해야 하고, 남자는 남자로 나왔기 때문에 남자 행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일체 만물이 다 그렇거늘…, 어떠한 것이라도 다 내 모습이라고 한다면은 이게 물질이니까 모든 물질이 나 아님이 없죠. 그래서 일체 만물의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즉 색이니라.
그런데 나 혼자만 이렇게 하고 앉아 있으니 어떡합니까? 여러분한테 핵심적인 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이유를 붙이지 마십시오! 무조건이지, 내가 모른다고 해서 이리 왈 저리 왈 마음을 자기가 괜히 흔들리게 하지 마십시오. 이건 괜히 자기 마음으로, 지금 아는 지식으로, 듣는 지식으로, 보는 지식으로 괜히 흔들리고 방황해.

신도3(남):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방황이 되는 것이죠. 하하하.

큰스님: 방황하니까 방황이 되지.

신도3(남): 방황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큰스님: 모르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야. “야, 죄가 있다면 무슨 죄가 있겠나? 죄 붙을 자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모르는 게 죄로구나.” 이랬다고요. 아, 모르니까 방황하지. 그러니까 모르지 않게 말이야. 우리가 그렇게 광대무변한 법을 왜 썩히느냐 이거야,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사람으로 태어나기 이전에는 아주 착하고, 부처란 말이야, 다. 괜히 이 세상에 나와 가지고는 볼 거 다 보고 들을 거 다 듣고는 그냥 습이 배었어, 그냥. 그 사이에 그냥. 허허허…. 여기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물이 들었죠, 어린애 적부터. 그러니 그걸 떨쳐 버리기가 어렵지마는 그거를 ‘어느 놈이 하는 거냐.’ 이 소립니다. 그 모두를 어느 놈이 하는 거냐?

질문자1(남):그런데 ‘놓고 가라’ 이런 말씀 하셔서 놓고 갔다고 하는데 놓아진 것이 아닌 그런 상황 있지 않습니까?

큰스님: 이거 보세요. 놔진 것이 아니든 놔진 것이든 그냥 놓고 가는 거거든요, 그게. 그냥! 우리가 되풀이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냥 지금 놓고 가는 건데…. 아까도 과거예요, 우린. 정락 스님이 아까 설법하신 것도 벌써 과거로 지나간 거예요. 아니, 내가 들어와서 처음에 말한 것도 벌써 과거로 흘러간 거죠. 그렇게 빠르게 흘러갑니다. 벌써 오백 년 전으로 흘러갔대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그 핵심으로서의 내가 작용을 해서 그대로 중용을 지킬 수 있느냐?
그거 어렵지 않아요. 일체가 자기가 하는 거고, 답답하든 뭐든 무슨 생각이든 모든 게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하는 거죠. 그러니 ‘네가 하는 거지, 영원한 친구야. 네가 하는 거지, 내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잖아? 몸뚱이는 널 따라다니면서 이날까지 시봉을 하고 있는데 아, 시봉을 잘해야 누(累)가 되지 않도록 심부름 할 수 있잖아, 이 친구야.’ 이렇게 가깝게, 아주 가깝게 하라고요. 그게 이름이 부처가 아니니까. 만약에 이름이 부처라면 부처는 없어요. 이름이 부처가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사십구 년 설했다 하시지만 ‘사십’이라면요, 이 세상이 십(十)으로 돌아가는 걸 말해요. 그래 ‘사십’했단 말이에요. 또 ‘구 년’ 했단 말이에요. ‘년’자는 언제나 붙어요, 꼬리에. 그래 구 년 했는데 과거 삼(過去三), 현재 삼(現在三), 미래 삼(未來三), 구(九)란 말이야. 구가 이게 우리 수효로다가 세는 구 년이 아니에요. 구경지(究竟地)를 말하죠. 그러니 없는 숫자를 말한 거지, 있는 숫자를 말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사십구 년이라고 한다고 모두 숫자로 사십구 년, 사십구 년 이런단 말입니다. 사십구 년이 삼 일이 될 수도 있고, 삼 초가 될 수도 있고, 일 초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지금까지도, 하시는 게 없으면서 지금까지도 설하고 나가시지 않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거를 보십시오. 저렇게 말없이 설하고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모두 부처 아닌 게 없어요. 꽃은 꽃대로 가지각색으로 남을 위로해 주고, 또 극복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즐겁게 만들고, 마음이 화사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 줘요. 나무들은 또 시원하게 응달을 지어 주기도 하고, 보는 데 눈을 즐겁게 해 주기도 하고, 또 추운 데 그냥 뜨듯하게 해 주기도 하고요. 또 나무는 우리가 밑을 닦고 뭐, 매사에 쓰는 종이를 전부 만들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게 보시를 하는 겁니까? 자기 몸뚱이를 다 그냥 보시하는 거예요, 다 그냥. 일체 만물이 다 그렇게 보시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보시를 하고 가는 겁니까? 그래서 첫째 육바라밀의 무주상 보시, 핵심으로서의 무주상 보시를 해라 이랬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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