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가지고 논의 말고 실천궁행하는 데 노력하세요

▲ 그림 최주현

생활 속에서 이 마음도리를 공부하면서 실험하고 체험해보세요.
얼마나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어렵더라도 잘 넘기면서
직발 활을 쏠 수 있는 심력을 기르도록 하세요.


이것도 기복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
문) 저는 엄마와 두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요, 엄마는 아파서 드러누워 있고, 때문에 제가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서 관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런데 가끔 이렇게 관하고 맡기다 보면 이것도 기복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하는데 제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답) 기복이라는 건 상대를 두고 믿는 거를 기복이라고 그러죠. 절대 상대를 두고 믿는다면은 그건 기복이에요. 그러나 이게 불성, 생명의 근본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 똑같은데 마음 쓰는 거라든가 차원이라든가 모습이라든가, 모든 게 다르죠.
그러니까 엄마는 엄마대로 받을 수 있는, 즉 말하자면 물을 이쪽 컵에서 이쪽 컵으로다가 부을 때에 컵이라도 들고 있어야 이게 받아지거든요. 그러면 그냥 이쪽 컵에 있는 물도 이쪽 컵으로 한데 옮기면 그냥 한 그릇이 돼 버리죠. 마음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모르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관하는 도리는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만약에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냥 저쪽 주인공으로 내 마음이, 그냥 내 마음을 줘 버리고…. 이게 바로 손을 폈다가 오그렸다 하는 도리에요. 이게 중용입니다. 작용이 아니라, 활용이 아니라 중용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이쪽으로 가면은 이쪽이, 엄마가 하나가 돼 버리고, 엄마 마음을 나한테로 넣으면 내가 하나가 돼 버려요. 이 도리를 모두 모르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수만 개를 갖다 넣어도 그 마음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수만 개를 꺼내 내도 줄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도리, 이 어마어마한 도리를 모두 실험하고 체험하고 알아야 되겠기에 이 ‘되돌려 놔라’ 하는 작업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로 믿고 작업을 해라. 이 내가 나를 발견치 못하면, 부(父)와 자(子)가 한데 상봉을 못한다면 어떻게 자가 부로 가면은 부가 하나가 돼 버리고, 부가 자로 오면 자가 하나가 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그 도리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하는 법을 똑똑히 가르쳐 드리세요.

모든 가정에서 용도에 따라서 나한테 다가오는 것을 다 주인공에다 놓고 용도에 따라서 굴릴 줄 아느냐. 거기다 맡기고 지켜보고, 용도대로 거기다 맡기고 또 지켜보고. 그저 믿으면은 맡길 수가 있지만 믿지 못하면 맡길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리고 만날 ‘주인공! 해 주시오.’ 한다는 거는 그건 어불성설이에요.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건 상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자기를 위해서지. 그 사람이라고 그러면 벌써 상대가 되지 않습니까. 이 모습은 둘이 있을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느냐. 이 전구는 여러 개가 있지만 전력이야 어찌 둘이겠느냐. 안 그렇습니까.

그 어떠한 것도 현실에 그냥 떨어진 게 아니에요. 과거로부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 차원을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차원에 의해서 그 업식이, 죽어도 업식은 꼭 따라다니거든요. 그 업식이 고만 조절이 돼 가지고는 지금 현재 사는 걸로 나오는 겁니다. 물질적인 컴퓨터는 입력을 해서 넣어서 빼 쓰지마는 이 자동적인 컴퓨터는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버려요. 그래서 입력된 거니까 지금 현실에 나오는 거죠. 그래서 되돌려서 거기다가 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질 것 아닙니까. 얼마나 쉽고 빠릅니까.

그러니까 그 입력되는 대로 자꾸 앞서 한 거 없어지고, 우리가 걸음을 걸을 때 한 발 딛고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딛고 한 발 없어지고 하듯이 말입니다. 되돌려 자꾸 믿고 ‘아, 내가 하는 것 다 거기서 하는 거다.’ 이런다면 그냥, 들어가는 대로 다 그냥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또 들어가고 또 없어지고 또 들어가고 없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홀연히 그릇이 비고 그러면은 홀연히 내가 나타난다 이 소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늙었든 젊었든 애들이든 다 이 정신계의 50%를 충당해야 됩니다. 지금 병원도 있지만 한 35%밖에는 병원에서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럼 65%는 어디서 충당합니까. 여러분이 다 충당해야 돼요. 그뿐이 아니에요.

병 증세를 하나 연구해서 약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친다 하더라도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을 제거 못 시키면 그것이 또 딴 걸로 화해 버린다 이겁니다. 딴 걸로 화해서 재난이 돼 버려요. 이건 학술적인 거하고 이론적인 거하고, 이 모든 것이 물질적인 의학이지, 즉 말하자면 심성의학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돼서 이것이 왔느냐는 걸 모르기 때문에 100%를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네들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생명과 의식과 모습들이 들어 있다고요. 그게 내가 어디서 왔는지 증거다. 미생물에서부터 그냥 온 것이 증거이고, 내 몸뚱이가 지수화풍이라는 것도 증거다. 그 증거가 바로 내 몸뚱이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러면 그 몸뚱이 속에서, 한 파워에서, 즉 말하자면 공장이라고 한다면 심장 공장이라든가 간장 공장이라든가, 대장 소장 척수 척추, 방광 콩팥…, 이 모든 공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공장들에서 한 공장만 망해도 이 몸뚱이는 다 쓰러져 갑니다.
그러니깐 이 내 몸뚱이 속에 중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다들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놔서 이름도 가지고 있고 그런데, 나 아님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보세요. 위 공장도 자기 공장이요, 자기요, 세균 하나하나도 자기 아닌 게 없어요. 그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 수많은 의식들이 털구멍을 통하여 들고 나면서 파워를 일으키면은 몸뚱이가 그대로 가 버려요. 그러니깐 모든 걸 종합해서 이 몸뚱이 속의 수십억의 그 의식들을 내 한마음으로서 귀결을 지어라 이겁니다. 귀결 지어서 돌아가는 것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니깐 이름들을 가지고 논의하지 말고 실천궁행하는 데에 노력을 해라. 그리고 실험을 통해서 체험해라 이겁니다. 옆의 사람이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에 실험해 보기 좋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글로 줘서 ‘참, 주인공! 저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아니잖아. 네 몸 네가 이끌고 건강하게 끌고 가야잖아.’ 하고 던져 놓고 지켜본다면 거기서 알 바가 있을 겁니다.

그게 내가 주는 방식과 나한테로 넣는 방식이 있어요. 소나 짐승들이나 닭이나 이런 거를 모두 이렇게 할 때는 그냥 나한테다 전부 넣어 버리는 거죠. 그게 모두, 즉 말하자면 모르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거하고 짐승이 모르는 거하곤 또 달라요. 그냥 넣는 것이 넣을 자리가 있어서 넣는 게 아니라, 주인공에다 맡기지마는 때에 따라선 그 주인공에다 그냥 줘 버리는 겁니다. 둘이 아니니까. 일로 와도 둘이 아니요, 절로 가도 둘이 아니거든요.


심려가 하나도 들어갈 게 없어요, 이 공부라는 게. 그러니까 고라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아이고, 이게 또 닥쳤구나. 이걸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그냥 벌렁 나자빠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몸뚱이 속에 있는 의식들이 다 그냥 벌렁 나자빠져요. 자기 말대로, 생각대로.
그러면 병이 들게 돼 있죠. 그러면 내가 그걸 여여하게 ‘흥! 가져 갈 것도 없고, 가져 온 것도 없는데 뭘 그래? 너 알아서 네가 잘 끌고 다녀라. 네 심부름을 하다가 이렇게 됐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턱 맡기고 여여하게 싱긋이 웃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라야만이 여기 육체 속에서 의식들이 다 그런 마음으로 한번 굴려주는 겁니다. 그럼 병 안 드니 좋지, 가정 화목하니 좋지, 다시 일어나니 좋지. 아, 그게 재료가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으로 생겨서 들고 나는 걸 모르고, 높고 낮은 걸 모르고, 길고 짧은 걸 모른다면은 100%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 모습을 보지 말고 ‘너와 나와 둘이 아닌데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하면은 되는 거지, 산란하게 사단을 하면은 똑바로 집혀지지가 않죠. 그러니까 빨리빨리 공부들 하세요. 해 보세요, 한번. 생활 속에서 그대로 하는 거니까. 이 도리를 공부하면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세요. 얼마나 고교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어렵더라도 잘 넘기면서 직발 활을 쏘도록 하는 그 심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왜 인간 몸을 받아야 하나요?
문) 큰스님 말씀이나 경전을 보면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들도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왜 인간 몸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것 일까요?


답) 여러분 몸속에 있는 그 생명들을 한번 얘기해 보죠. 지금 이 몸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 모습, 의식들은 나쁘고 좋은 걸 몰라요.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걸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 거와 같이 모든 게 인간이 돼야만이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소립니다.
마음 하나 바꿔 놓으면 부처 될 수 있는 것이 100%다. 또 마음 하나 요렇게, 백지장 하나 사이를 두고 인간이 중생이다 부처다 이러는데, 이 인간이 되기 이전에 짐승이다 이런다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단번에. 그러니까 그게 연쇄적으로 이렇게 자꾸자꾸 올라오면서, 또 인간이 잘못했을 때는 저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짐승으로도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인간이 됐다고 해서 끝간 데 없는 진리를 이렇게 걷는 게 아니라, 이 마음에 따라서 인간이 짐승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뭐,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나오기도 하죠. 그런데 그 모습을 가지고 나왔다 하면은 인간 되기가 참 어렵다. 우리는 부처 되기 어렵고 짐승들은 인간 되기 어렵고 그런 거죠. 미생물에서는 또 날아다니는 짐승이나 육지에 다니는 짐승 되기가 어렵고. 그게 습이 돼서, 살던 습이 자꾸, 이 뱀 소굴을 봐도 뱀으로 살던 습이 많기 때문에 그 모습을 털어 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겁니다. 쥐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나가는 습을 우리가 길러야지, 선덕을 쌓아야지, 이거는 악덕으로 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가지고는 외려 짐승의 모습을 타고나게끔 자기가 자처한단 말입니다. 이 모습이 살면은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틀림없이 이렇게만 하면 된다. 남한테 이익하게 생각을 해 줘라. 이익하게 행동해라. 이익하게 말해라. 또 없는 것을 좋은 일 한다고 꾸어서까지 주는 거는 그것은 미덕이 아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기 환경의 모든 것을 따라서 주어야 된다.

그런데 인간이 부처 되기가 어려운 것은 마음 하나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바깥으로는 그렇게 하면서 안으로는 모든 것을, 그렇게 하는 것조차도 거기다가 맡겨 놓고, 영원한 친구, 친구라고 그래도 되죠. ‘영원한 친구여! 네가 이날까지 나를 이끌어 왔고 지금도 이끌어 가고 있는데 이렇게 안되는 것도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 아니냐. 난 너밖에 없어. 네가 이끌어 가기도 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하기도 하고, 네가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모든 걸 거기다가 맡겨 놓는 그 작업이 필요합니다.

보살행을 실천하고 싶은데
문) 세상을 환히 비추는 달과 같이 저도 보살행을 실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지요.
답) 내 내면의 한 영원한 불성 자체가 바로 고정됨이 없기 때문 한마음 주인공이라고 했는데 거기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고 또한 ‘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히 가졌을 때에 그 모든 의식들이 화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보살로서 화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면서 가고 옴이 없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함이 없이 하는 것이고, 생각 없이 또 생각하고, 또는 말 없이 말을 하고….

이 부처님의 평발이라는 것이 어째서 평발이라고 했는가. 저 땅 밑에 기어다니는 진드기 발 하나도 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평발이에요. 일체 만물만생이 다 부처님의 마음이 들고 나지 않으면서 들고 나면서, 들고 남이 없으면서 항상 한마음이 되어 주시고 한 몸이 돼 줬기 때문에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한 거예요.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 생각을 내니깐 보살이 되고, 보살이 되니깐 법신이 되고, 법신이 되니깐 보살이 되고. 이렇게 행하면서 그 행함이 없이 행하는 것이, 천백억화신이 그렇게 되는 거죠. 때에 따라선 약사가 되고 때에 따라선 관세음이 되고 때에 따라선 지장이 되면서, 때에 따라선 칠성이 되고 독성이 되고 약사가 되고, 용신이 되고 지신이 되면서 어느 거 하나 아니 되는 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해로운 점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여러분이 다 생활해 가면서 공부하는 겁니다, 이게. 생활도 참선이니까, 그대로.

그리고 여러분이 그저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자꾸 이끌어 가면서, 이렇게 해서 모두 그 마음들이 당당하고 도도하게 물이 흐르듯이, 그저 이 지구 바깥으로도 벗어나고 우주 법계를 두루 한 눈에 볼 수 있는, 한 눈에 들을 수 있는, 또는 가고 옴이 없이 한 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이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충만히 이어져서 모두 가설이 됐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잘 이해하시고, 나부터 모두 믿고 나부터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도 이끌어 나가고, 내 몸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거기에다가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을 해요. 거기서만이 이끌어 갈 수 있어요. 거기서만이 물리를 터지게 해 줄 수 있어요. 그 영원한 당신네들 친구니까. 수없는 과거의 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먹고 먹히면서 진화를 하고 이날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에요. 그 장본인부터 알아야 모든 바깥의 일들을 전부 알게 돼요. 아시겠어요?

도둑을 당했는데 어떻게 마음을
문) 얼마 전에 다행히 아무도 없을 때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범인을 못 잡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꼭 잡혀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혹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좀 달리 마음을 내야 되는 건지요.

답) 옛날에 어떤 도둑이 말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그 큰 배에서 훔쳤는데 그 배에 있으면 붙잡히기가 딱 참하거든요. 그래서 쪼그만 쪽배로다가 남의 배로 탔어요. 탔는데 어느 선지식이 그 큰 배에 탔는데 다 알고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은 그 도둑의 내력을 보니깐 아주 비참하게 살았고 비참한 행동으로서 그렇게 됐더라는 얘기죠. 알면은 그렇게 안 했을 텐데 모르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조상 탓으로도 들어가고 인연으로도 들어가고,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돼 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묘한지 한 번도 붙들려 들어가 본 예가 없었답니다, 그 도둑이.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냥 그 도둑을 도둑질하지 않도록 도둑이 조금 붙은 거를 떼어 버렸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어떠한 관계로 도둑질을 했는가. 이거를 알아 보면은 불쌍하기가 한량없거든요. 도둑질을 왜 했겠느냐. 먹기 위해서 했다. 식구들을 다 굶겨 죽일 수가 없어서 했다. 이런 경우라면은 붙잡히지 않아야 되겠죠. 그러니깐 도둑이라고 해도 도둑이 아니죠, 따지게 되면.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법에는 빵 하나를 훔쳐도 도둑이라고 몰고 갖다 가두지마는 이 부처님 법에는 도둑질을 해도 이걸 잘 간파해서 보고 정말 도둑질을 했다면 그런 도둑질하는 의식을 떼어서 다시 그걸 바꿔서 좋은 사람으로서 나가 살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거를 도둑질 안 하게끔 이렇게 노력을 하게 만들어 주고, 이렇게 해서 모두 건진다 이런 말을 했죠. 그러니까 무조건이죠.

이 부처님 법에는 너는 나쁘니깐 유치장으로 가거라. 너는 좋으니깐 좋은 데로 가거라. 이게 아닙니다. 유치장으로 갈 사람도 유치장으로 안 가게 할 수 있는 게 보살의 응신이요, 또 이 지금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대로 끝끝내 좋은 사람이 되게끔 하는 것이 부처님의 응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나쁘다 좋다 이걸 떠나라 이러는 겁니다. 나쁘다 좋다를 떠나야 그 뜻이 자유스러워지고 자기가 자유자재할 수 있는, 즉 말하자면 그걸 뭐라고 그럴까요? 귀신 방귀 에너지라고 그럴까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을 다 누구나가 고르게 다 건질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남을 조금도 해롭게 하는 법이 없죠.

그래서 화엄경에 이렇게 잠깐 보니깐 말입니다, 옆으로 지나가다가 보기만 해도 그 은혜가 말도 못하고, 옆으로 가다 손만 만져도 그 은혜가 말도 못하고,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자기의 그 죄명이 다 소멸된다고 그랬어요. 그랬으니 얼마나 남을 원망 안 하고 남을 미워 안 하고 남을 악설 안 하고 그런 사람이 돼서 그거를 알겠습니까. “너희들, 이 소리를 거짓으로 알지 말고, 이거를 진정 너희들이 안다면 너희가 진정코 보살이 될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깐 우리가 생각하면요, 참 먹기 위해서 모두 언짢은 일이 생기고 죽이고 살리고 이 일이 생기지 먹고 사는 거 아니라면은 왜 싸움이 나고 그러겠습니까. 이 벌레들도 싸우고 그러다가도 자기 몸이 좀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먹을 거를 그냥 두고 떠납디다. 돌아서서 떠나더라고요. 개미도 그렇게 떠나더라고요. 그래서 자기가 먹지 못할 거라면 그냥 떠나면 되지 그거를 악착같이 뺏어먹으려고 그렇게 싸우다 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죠.
그러니깐 도둑이 이렇게 붙잡히지 않아서 그러지 마시고 너는 이번 내가 생각한 대로 이번만, 어차피 했으니까 ‘이번만 붙잡히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그저 어떡하든지 살아라. 못살지 말고 살아라.’ 이렇게 해 주세요. 그러면 서로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고 다 좋은 겁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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