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묵은 살림살이를 정리 하면서
벼르고 벼르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됐다. 17년이나 된 부엌살림을 오래 전부터 바꾸고 싶었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천하지 못했었다.
일을 벌리고 보니 생각보다 일이 컸다. 구석구석 채워져 있던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나왔다. 기억도 안 나는 물건들이 줄줄이 나왔다. 너무나 많이 가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려야 할 물건들, 나누어 주어야 할 물건들, 그러나 쓰지도 않으면서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옛날 큰스님들께 공양 올렸던 밥그릇이며 큰 밥솥과 냄비와 수저와 그릇들, 제사 용품 등등 댕그라니 남은 두 늙은이 살림살이로는 많은 물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짐’일뿐이었다.
우리집엔 늘 손님이 많았다. 그때 손님을 치르기 위해 장만했던 그릇들이 쌓여있다. 쌓여 있는 그릇들이 그 옛날을 생각나게 했다. 늘 집안이 북적이던 그 옛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다운 인연들이 떠올랐다. 그릇들을 그 인연들에게 한 벌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너무 깊은 곳에 보관되어 생각지도 못했던 보물 같은 것들도 나왔다. 십년이 훨씬 넘은 매실 액기스며 보리똥술, 그리고 가지가지 담근 것들이 진하게 묵어 있었다. 어쩌면 욕심이라고 말 할 수 있겠으나 늘 손님맞이를 즐겨했던 우리 집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공사가 끝났다. 깨끗이 단장된 부엌가구들을 어루만지며 새집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이제부터는 꼭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됐다. 힘든 공사였지만 교훈을 얻었다.
공사로 인해 꺼내지게 된 물건들 중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골라 지인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남편도 그 속에 자기가 좋아하는 외투하나를 넣어 주었다. 기왕이면 좋은 걸로 보내서 받는 사람이 잘 입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법정 스님 말씀대로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음이 참 보시일 것이다. 지인들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은 따로 모아두고 버릴 것은 수거함에 버렸다. 재활용품을 버리고 올라오다 위층에 살고계시는 팔순이 넘은 할머니를 만났다. 그 부지런하시고 정정하시던 할머니가 이제는 걸음도 좋지 못하시고 안색도 예전만 못하셨다.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드리자 할머니 말씀이 “나도 얼마 전까지 중품은 됐었는데…” 하신다. 나는 “지금도 중품 이상입니다.”고 답해드렸지만 어쩔 수 없는 시절 인연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비록 몸은 불편한 모습이지만 말씀 하나하나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생각 하나하나가 아직도 정정했다. 머지않아 내 모습도 저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집안에 아직 남아 있는 물건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늘 놓아버려야 한다고, 비워야 한다고 배우고 다짐하면서 살아왔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소유하기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삶으로 남은 생을 회향하고 싶다. 그러다보면 가진 것은 줄어들어도 마음은 꼭꼭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누구나 편히 쉬어갈 수 있게 늘 길을 비워놓은 산처럼 살아야겠다. 좋은 사람 미운 사람 가리지 않고 다 받아주며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차별 없이 받아줄 수 있는 산처럼 살고 싶다. 봄이면 꽃피고 새 울며 여름이면 무성한 잎으로 더위를 가려주며, 가을이면 형형색색 단풍잎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겨울에는 마른 솔방울 떨어뜨리며 무정법문을 하는 산처럼 살고 싶다.
묵은 짐을 덜어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다. 묵은 짐 속에서 옛날의 기억을 꺼내보듯 한 동안 방치하고 살았던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나로 인해 마음 아파했거나 불편했던 인연이 있었다면, 나 또한 편치 않은 사연들이 있었다면 이참에 참회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 마음 모두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묵은 짐을 정리하며 나의 묵은 마음들도 정리해본다.

연재를 마치며
2013년 새해부터 쓰게 된 ‘이대원성의 바라밀 일기’가 회향을 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한편 섭섭하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겁 없이 달려들었던 일이었다. 글을 쓰는 전문가도 아니면서 대책 없이, 그것도 교계 큰 신문에다 글을 쓰기로 했으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음을 지금에야 알 것 같다.
어느 날 제주도에서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신문사 편집 담당자로부터 원고 독촉을 받고 너무 놀란 적이 있다. 연재를 시작한 것이 후회되고 남은 기간들을 어떻게 메워 나갈 지 막막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1년을 마무리 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그동안 내 부족한 글을 읽어 준 지인들과 독자들에게 죄송스럽고 감사하다. 연재를 통해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받아왔음에 감사하고 오랫동안 소식이 뜸해 궁금했던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상찬을 들으며 지낸 지난 한해는 내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과 행복을 준 한 해였다. 사실 처음에는 많이 서툴고 부끄러워 남에게 알리지도 못했었는데 차츰 주변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임을 알게됐다. 그 때 마다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글을 보면서 시간 낭비가 되었다면 도리어 죄를 지은 시간이 되었을 것이고, 작은 공감이나마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 생에 최고의 선물로 간직하고 싶다. 그 동안의 이야기가 진정 ‘바라밀 일기’였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어쨌든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지면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서툰 글들을 교정해주시느라 고생하신 현대불교신문 편집진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이대원성 합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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