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상좌불교 이해와 교류의 중요성

미얀마는 불교성향으로 아직 자본주의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살아있는 곳이다. 이러한 미얀마의 불교 정체성을 지키는데 한국불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사진은 미얀마 시골 마을의 풍경(①)과 마을주민들(②), 사원에서 기도하는 미얀마 불자들의 모습(③).

동남아·상좌불교 경시 풍조 개선돼야
동남아·동아시아 불교 소통 필요
미얀마 불교정체성 지키는데 도움줘야

불교공부를 하면서 늘 생각해 본다. 역사적으로 불교국가의 롤 모델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였는가? 마찬가지로 현재 살아있는 불교국가로서의 롤 모델을 찾는다면 어느 나라인가? 한국인가? 일본 또는 중국인가? 아니면 인도나 스리랑카 아니면 태국인가?

정치적인 상황과 별개로 현재로선 미얀마를 들고 싶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권에서도 미얀마는 인도불교의 옛 전통을 오늘날까지 잘 간직하고 있는 순수성과 전통적 보수성이 많이 거론된다. 미얀마의 양곤대학에 객원교수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이은구 교수는 미얀마는 “아직도 초기불교의 순수한 모습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필자 또한 초기불교전공자로서 많은 부분에서 이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 앞으로 미얀마 불교연구는 인도의 초기불교와 관련하여 심도있게 진행시켜보고자 한다.

미얀마인은 전국 어느 곳에서 파고다를 건립하여 불국토화를 이루려한다. 그리고 항상 눈 뜨면 파고다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심성을 정화한다. 파고다의 나라인 미얀마는 어디를 가나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난다. 미얀마에서 불교 또는 사찰의 사회적 기능은 지역 사람들의 회합장소는 물론 지역 사람들의 교육기관으로 그리고 예배와 수행 공간으로 역할을 한다. 때문에 미얀마에서 승려와 일반 신도 간의 유대는 일상생활에 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예를 들면, 몸이 아프면 절과 스님을 찾아가고, 스님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가르침으로 병자를 위안시키며 처방을 가르쳐 준다. 사찰에서의 어린이 교육, 스님들에 대한 재가자들의 공양과 보시와 봉사, 재가자들이 정기적으로 사찰에 머물며 수행하는 관습, 정기적인 법회가 운영되어 재가자와 출가자간의 유대감이 깊다.

미얀마 불교도의 경제생활은 경전에 나오는 사분법(四分法)에 의거하고 있다. 사분법에 따라 적극적인 보시문화가 깊이 뿌리내려 불교 교단이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는 힘이 된다. 재가자들은 사원이나 불탑의 신축이나 수리 또는 불상의 도금과 같은 큰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임종에 다다르면 재산의 많은 부분을 사원이나 불교 기관에 보시한다. 출가자는 매일 예불 후에 참회를 하고 예불 후가 아니라도 참회할 일이 생기면 다른 스님에 다가가서 쭈그리고 앉아 서로 참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출가자는 기본적으로 엄격한 지계로 재가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스님들은 재가자들로부터 ‘완전한 존경’을 늘 의식하고 모든 일에 있어 여법하게 행하려는 긴장이 있다. 마찬가지로 재가자들도 수행처의 공동생활에서 스님께 참회하는 의례는 생활화되어 있다.

이처럼 미얀마에서 재가자와 스님은 항상 함께 걸어가고 함께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미얀마는 불교를 떠나서 논하기가 어렵다. 흔히 미얀마인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불교와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껴진다.

미얀마에 오래 머물며 사는 사람들에게 미얀마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어보기도 물어보기도 하였다.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미얀마인은 교육이 잘되어 있고 사람들이 순하고 착하다한다. 그들은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자재력이 있어 폭력적이 않다고 한다. 이러한 심성이 형성되기까지는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반복적인 신쀼 등의 단기출가 경험과 불교도로서 오계(五戒)와 같은 불교도덕이 생활화되어 있는 이유이다. 때문에 미얀마는 비교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살인과 도둑 그리고 성범죄 등의 범죄율이 낮게 나타난다. 지방이라도 밤늦은 시간에 도로변 시골 절의 법당에 모여서 위빠사나 수행하는 남녀노소를 어렵지 않게 볼 수도 있다.

최근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前코트라 관장의 설명에 의하면,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서 의식주에 있어 ‘생존경쟁이 없는 지역’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먹는 문제로 남과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아직도 미얀마 전통사상과 문화에 따라 ‘온순한 국민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또한 미얀마인은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라한다. 흔히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들의 사람들이 시간관념이 애매하고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미얀마인은 예의가 바르고 자존심이 강하다. 궁색해도 다른 사람에게 굽신거리거나 아부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존중해주는 것이 몸에 갖추어져 인격적 모욕을 받지도 주지도 않으려는 세심함이 있다. 더 나아가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공격성을 보이지 않으며 한국인에 대해서는 한류 영향인지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미얀마인은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하려고 노동에 적극적이지 않는 경향이 이야기된다. 생존경쟁이 없는 나라로 평가되는 이면에는 다른 나라와 달리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이는 종교성이 강한 나머지 경쟁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미얀마에서 “론지와 슬리퍼는 느림의 미학을 상징”한다고 하는 것처럼 빨리빨리 서두르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조금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미얀마인을 접하면서 느끼는 미얀마인에 대한 인상은 항상 긍정적이다. 항상 미얀마인은 착하면서 결기가 있고 비굴하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불교영향이라 본다. 필자는 1년 전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와 미얀마에서 여행 중에 “미얀마인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불교인으로 태어나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쓴 기억이 난다.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유럽이든 미국이든 한번 지나가는 여행자와 달리 오래 머물게 되면 그 나라의 이면을 깊이 보면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미얀마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필자는 미얀마나 우리나라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미얀마에 오래 머문 사람들일 수록 미얀마인의 심성에 존경심을 나타내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미얀마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미얀마를 칭찬하고 염려하고 또한 변호하려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어느 나라나 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도 있게 마련이다. 필자가 염려하는 미얀마 불교는 국가나 재가사회의 견고한 지원과 보호가 불교계 스스로의 비판과 반성정신을 무디게 하여 정체(停滯)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세계의 일반적인 조류가 미얀마 사회에 영향을 미쳐 미얀마인의 심성이 변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미얀마에서 체류하면서 만난 유럽인 등의 많은 외국인들도 걱정하는 바가 마찬가지이다. 미얀마의 개방과 동시에 다른 나라와 같이 자본의 맛에 각박한 세상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필자는 미얀마만큼이라도 각박한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거칠고 각박하지 않는 착한 심성이 살아있는 인류의 최후 보루 지역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이다. 마찬가지로 어느새 미얀마 불교 이야기도 마감해야 할 때이다. 최종회임을 알고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구나’하며 놀랐다. 첫 회를 다시 읽어 보면서 과연 처음의 집필방향에 부합했는지를 스스로 평가해 본다.

<미얀마 불교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쓴 많은 분량의 초고를 다시 한번 읽어 보면서 본래 의도된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은 서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미얀마 불교를 공부했느냐고 물었다. 물론 필자는 인도불교전공이고 다시 세부적으로는 초기불교전공자이다. 필자는 현재 한국외대의 인도 연구소에서 동부인도와 방글라데시 그리고 미얀마를 지역학 차원에서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중이다. 때문에 매주 3국의 신문을 보고 종교와 문화에 관한 3국의 ‘주간동향’과 3개월마다 ‘이슈 페이퍼’를 작성하는 등의 연구를 하고 있다. 인도에 머물 때 매일 거르지 않고 인도신문을 본 덕분에 인도의 이해는 나름 가능하지만 미얀마는 새롭게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연재와 함께 미얀마의 불교역사와 문화를 공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동남아나 상좌불교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미국과 서구에 치중되어 있는데다 경제적으로 조금 더 잘 산다는 이유 일 것이다. 불교인들조차 미국과 서구를 추구하는 것에 경도되어 동남아 불교권을 단지 정치 경제적으로 후진 나라 정도로 여기고 제대로 불교적 의미에서 그 진가를 알아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동남아 불교에 관심을 확대해 보면서 주위를 환기시켜 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불교인들이 동남아불교에 관심을 갖고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될 때 동남아불교 또한 한국불교와 동아시아 불교를 이해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언젠가는 동남아불교와 동아시아 불교는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같은 불교라는 사방승가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현재 소통이 강조되는 국제화 시대에 살고 있다. 새로운 미래불교를 위해 한국불교와 미얀마 불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세계화와 여행 자유화 시대에 상좌 불교권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상좌 불교권이야말로 세계 불교를 지탱해주는 ‘지렛대 불교’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불교권이 무너지면 동아시아 불교권은 물론 다른 불교권에 미치는 여파는 예상 외로 크리라 생각된다. 우리부터 이러한 불교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과 발전적인 교류를 추진해야 한다. 서로가 불법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견제하고 지원하는 사방승가라는 확고한 의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불교인이라면 지역과 불교 종파를 떠나서 소중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미얀마불교이야기를 열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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