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의 한가로운 일상이 잘 드러난 〈완당전집〉 〈여초의〉 36신.
진종(眞宗) 조례론( 禮論)의 발설자로 지목된 추사는 제주에서 해배된 지 겨우 3년 만인 1851년 7월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기구했던 그의 말년은 1852년 8월 북청에서 해배된 후, 이 해 10월 9일, 과천의 초당에 당도한 뒤에야 안정된 듯한데, 그의 한가로운 일상의 흔적은 〈완당전집〉〈여초의〉36신에 잘 드러난다. 특히 초의가 보낸 차를 즐기며, 좋은 샘물을 발굴한 즐거움을 초의와 함께 하기를 고대했던 그였지만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샘물의 갑을(甲乙)을 논하고자 했던 초의와의 해후는 결국 그가 죽은 후, 그의 상청(喪廳)에서 이루어진 셈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여초의〉36신은 일부 글자가 결락되고, 편지를 쓴 연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가 우연히 추사 편지의 연재를 위해 자료를 수습하던 중, 응송스님의 연구 자료였던 추사 편지 첩의 사진판 자료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두 자료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이 편지와 차포를 전해 주었습니다. 이곳(과천)의 샘물 맛이 좋은데, 관악산 줄기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두륜산 물과 비교하면 어떤 것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물의 공덕이 세 네 가지는 있는 듯합니다. 급히 보낸 차로 시험해 보니 물맛도 좋고, 차 또한 좋았습니다. 이는 일단의 기쁜 인연입니다. 이는 차가 그런 것이고 편지가 그런 것은 아니니 차가 편지보다 나은 것인가요. 또 근일에는 일로향실에서 쭉 머물고 있다니 너무 좋은 인연이 있는 것인지요. 어찌 갈등을 깨고 멀리 이곳에 와서 차의 인연을 함께하지 않으십니까. 또 근일에는 선열에 대해 달콤한 경계의 묘가 있는데, 이 묘제를 함께 할 수 없으니 그대와 한번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853년 2월 27일(僧來得草又得茶包 此中泉味是冠岳一?之流出者 未知於頭輪甲乙何如 亦有功德之三四 ?試來茶 泉佳茶佳 是一段喜?緣 是茶之使而非書之使 茶甚於書耶 且審近日連住一爐香 有甚勝緣 何不破除藤葛一遠飛共此茶緣也 且於近日頗於禪悅有蔗境之妙 無與共此妙諦 甚思師之一與?眉 未知以遂此願耶 略有拙書寄副收入也 雨前葉揀取幾?耶 何時續寄鎭此茶也日以企懸不宣 向熏許一紙幸轉付 癸丑 二月二七日)

인편으로 보낸 초의의 차와 편지는 1853년 2월경 추사에게 전달된 것으로 짐작된다. 추사는 그 기쁨을 한껏 드러내 초의에게 답신을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1853년 2월 27일의 일이다. 그의 삶이 한결 여유롭던 과천 시절, 초의의 편지와 차는 그의 속진(俗塵)을 정화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그의 여유는 관악산 줄기에서 솟은 샘물을 찾아 “두륜산 물과 비교하면 어떤 것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물의 공덕이 세 네 가지는 있는 듯”하다는 것에서도 엿 볼 수 있고, 이어 초의가 보낸 차로 급히 시험해 보니 “물맛도 좋고, 차 또한 좋았다”는 속내에서도 드러난다. 찻물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그는 〈혜산철명(惠山?茗)〉에서 “세상에서 둘째가는 혜산천(天下第二泉)을, 또 진소현과 홍치존이 함께 마셨지(又重之秦洪). 이런 샘물은 다시 마실 수 있겠지만(飮泉猶可得), 두 선비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워라(二妙眞難同)”라고 노래했다. 처음으로 혜산의 물을 알아 본 이는 당(唐)나라 육우였다. 후일 이 물은 천하의 명천으로 회자되었다. 청대의 진소현(秦小峴)과 홍치존(洪稚存) 또한 이 물맛을 알아본 사람들이었다. 차를 알고 찻물을 알아본 무석(无錫) 출신 진소현은 청대의 진영(秦瀛)이다. 무석은 혜산천이 나는 곳이다. 한편 추사는 근일에 선열에 대해 “달콤한 경계의 묘가 있는데, 이 묘제를 함께 할 수 없으니” 자신의 벗 초의와 진지하게 토론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가 초의를 극진이 여긴 연유는 바로 차를 통한 수행의 경계를 은밀히 검증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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