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선지식 대법회 -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인류 역사에 핀 가장 아름다운 두 송이 꽃. 틱낫한 스님은 부처와 예수를 일컬어 이렇게 이야기했다.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강조하는 오강남 교수의 차분하고 논리적인 말에는 우리가 흔히 접했던 기독교의 억지도 배타도 강짜도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가 작은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여정이라는 말에서는 두 송이가 어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종이 한 장에 우주가 담겨있듯 불교도 기독교도 강물처럼 서로 섞이면서 흘러간다. 12월 15일 실상사에서 있었던 오강남 교수의 말에 귀 기울여본다. >

▲ 오강남 교수는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예수는 없다>,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등이 있다.

자신의 하느님 깨우치라는 도마복음
대표 성경 되었다면
불교와 기독교는 이미 통했을 것

만약 예수님이 오래 살았더라면
오늘은 불교와 기독교 두 종교가 어떻게 화합을 하면서 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얘기하려합니다.

세계적 평화의 상징 틱낫한 스님은 한때 모자란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후 사람들에게 45년간 설법했지만 예수님은 그 기간이 겨우 3년에 불과하니 가르침의 폭과 깊이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불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토마스 머튼 신부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예수의 자비정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분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불당에 부처님과 예수님 상을 같이 놓고 존경을 표한다고도 했죠.

만약 예수님이 오래 사셨더라면 성경에만 있던 말씀을 되풀이하셨을까요?
‘나는 길 위의 진리요, 생명이요, 나를 삼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 등이 실린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없습니다. 어떤 복음이든 예수님 후대의 말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주라’고 하는데 이러한 삼위일체사상은 3, 4세기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당시 기독교인들의 자기고백적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 95%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자에 집착하고 18, 19세기에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절대적 믿음을 가진 별종기독교인들 또한 한국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세계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해심, 자비심을 진정으로 체득한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분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만 보고 이분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 서로에게 속해있어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로 불교와 기독교의 의미있는 만남을 꼽았습니다. 과학과 기술적인 면에서의 혁신적인 발전을 제쳐두고 말이죠. 기독교가 새로운 원기를 찾으려면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에서 선물이 왔던 것처럼 선불교, 노장사상 등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저는 불교와 기독교가 같다는 말 대신 서로 통한다,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불교가 지도를 잘 만들어 놨다 생각합니다. 일본 가톨릭에서는 선사들을 초청해 참선법을 통해 메타노이아(회개)에 이르는 법을 가르칩니다. 스님들 역시 성경의 구절들을 공안으로 삼아 화두를 들기도 합니다.

또한 기도법 중에 예수 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향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루에 몇 백번씩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의 염불선과 비슷하죠. 이외에도 중세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은 종교적 심층에 가는 길로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의식하고, 정화하며, 빛을 보고, 합일되는 4단계로요.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십지와 비슷합니다. 세부사항의 차이는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말보다 더 겸손한 말입니다. 내가 잘못알고 있던 나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니까요.

화엄의 세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어울려있습니다. 상직, 서로에게 들어가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직합니다. 틱낫한 스님이 만든 용어 중 인터비잉(interbeing) 또한 상호존재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자라는 말 속에 이미 여자가 전제되어 있듯,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규정지어지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종이 한 장에 구름이 있고, 나무가 있고 비도 있습니다. 새소리도, 햇볕도, 공기도, 토양도, 이 종이를 만든 사람도, 그가 먹는 밥도, 농부도, 광부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일진 속에 시방이 다 들어있죠.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이입니다. 종이는 자성이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모든 종교가 다 들어있습니다.

기독교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 바다도 있고 높고 낮음, 깊고 얕음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서로 상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 들어가 있고 서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훑어봐도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도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부터 시작해 유대교, 그리스 철학, 로마의 법사상이 혼합되어 발전해왔습니다. 순수한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역시 여러 문화가 들어가며 한국의 기독교가 됩니다. 그 예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通聲祈禱, 큰 목소리로 하는 기도)는 한국에만 있습니다.

혼합되지 않는 종교란 없습니다. 강물과 같아요. 서로 섞이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든 자기 종교만을 강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몇 가지 오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12월 25일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 탄생을 위해 축제를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목자들이 양을 치다가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다고 하죠. 팔레스타인에서 겨울은 밖에 있을 만한 날씨가 아닙니다. 12월로 축하일을 정한 것은 동지와 관계됩니다. 해가 짧아지다가 새로 태양이 힘을 얻은 날을 예수의 탄생일과 연계시켜 기념하자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X-MAS라고도 하는데, X는 그리스도란 말의 히랍어 첫 자이며 MAS는 미사를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한 미사를 지내는 날로 보면 됩니다.

또한 동정녀 성모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말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곤란합니다. 예로부터 영웅의 탄생은 특별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영웅이 그렇고 석가모니도 다르지 않죠. 특별한 분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말로 그린 그림입니다. 이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지 과학적 생물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청전>에서 중요한 것은 효(孝)지, 심청이가 중국인이든, 용궁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눈을 뜨니까 모든 장인이 눈을 뜬다는 것에는 불교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불하면 모든 사람이 성불한다는 이야기와 같으니까요. 이처럼 텍스트는 문자에 머물지 않고 다양하게 의미를 내포하며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도 일반인들에게는 거부감없이 다가가기 힘듭니다.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죽은 이를 살렸다는 기적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근본주의자들입니다. 문자가 아닌 의미를 읽어야하는데 말입니다.

신학자 중 한 사람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심각하게 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불립문자라고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죠. 성경에도 문자를 믿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두고 성경에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signs', 표적이라는 말을 씁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 화살표를 따라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살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원죄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습니다. 원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는 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성적인 욕망이 원죄라고 했습니다. 즉 원죄는 아담과 이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온 거죠. 하지만 원죄에는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는 이분법적 사고가 없지만 점점 자라면서 나와 너라는 생각이 생기게 됩니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데 그때부터 눈이 뜨여 자신을 대상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알아보고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죠. 내가 모자라고 내가 부끄러운 거에요. 그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부끄러움을 가리려 무화과 잎을 딴 것입니다.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공동체의 장이 된다든지, 농사를 지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이든지, 그러나 이 역시 자기를 대상화하는 작업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의식이 원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천당에 가고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와 너의 갈라짐이 없는 완전상태이니까요. 그러나 ‘완전한’ 완전상태란 갈라졌다가 다시 합해지는 것입니다. 종교적 선각자들이 회개하고 깨달으라고 하며 우리에게 권한 것도 이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자연스런 대화를 위해
성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유한복음 등이 있는데 이는 4세기 성경 정리 후 남게 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시 전해지던 성경을 폐기하기 아까워서 땅에다 묻었습니다. 1945년, 그래서 발견된 것이 <도마복음>이었습니다. 그 속의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분하고는 다릅니다.

신약성경은 ‘나를 따르라, 배워라, 제자가 되어라’ 등 믿음을 강조하는데 반해 <도마복음>은 네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깨우치라고 합니다. 도마복음서의 발견은 당시 히로시마 나카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사건입니다. 만약 <도마복음>이 그대로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다면 불교와 기독교는 자연스런 대화를 통해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경 속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라는 말에서 아브라함은 우주적 생명이고 모두 가지고 있는 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고 생명입니다. 불교에 이를 적용한다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겠죠. 이는 부처님 자신이 아니라 불성, 생명, 우주적 원리, 깨침입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나가 아니라 더 큰 인물로서의 나죠.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는 영원히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전법륜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입니다. ‘회개’의 희랍어 본 뜻은 의식을 개건하고 보는 눈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불교식으로 하면 실상을 보지 못하는 전도망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인지, 가깝다면 얼마나 가까웠는지에 매달려 이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져왔습니다.

그러나 가깝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공간적으로도 이해를 해야 합니다. ‘kingdom is at hand’는 손끝, 여기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 원리가 여기에 와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도마복음>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면 새가 인간보다 먼저 갔으리라며하느님의 나라를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 깨침을 얻은 이들은 깨침에 대한 경험을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때문에 문자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문자주의에 빠지면 ‘내 종교’라는 주장이 강해져서 다원주의적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불자, 참된 이슬람교도는 거의 다 공통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중요시해요. 이때의 깨달음이란 일생일대의 큰 깨침이 아니라 작은 깨달음입니다. 산에 오르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듯 작은 깨달음이 모이고 모여서 산에 오르는 것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은 절대적, 궁극적 실재는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깨치는 것입니다. 부처님 스스로도 자신을 믿으라고 했으며, 불성이 자기 안에 있다고도 했죠.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을 알고 자기 안의 신적인 요소, 내 속의 하느님을 깨달으면 문자주의에서 해방되게 되어있습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도마복음>에는 ‘두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귀로는 보통 것을 듣고 나머지 한귀로는 보통 것 이상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성인입니다. 성(聖)자 앞머리에는 귀 이(耳)가 있죠. 보통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윤리와 계율을 지키는 이가 성인이 아니라 의식이 바뀐 이가 성인입니다. 종교 간 대화가 없어지면 종교간 평화가 없고 이것이 없으면 세계 평화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려면 이웃종교에 대해 기본적 연구가 있어야합니다. 이때 종교간 소통, 화합이 가능하게 되며 세계가 아름다워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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