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이 상주하는 북한산 이야기 / 형제봉

형제봉 능선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로 큰 봉우리의 높이는 해발 463m, 작은 봉우리는 해발 641m로 기록되어 있다. 보현봉의 지맥으로 성북구 정릉동과 종로구 평창동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일부 등산 안내서에 이름의 유래와 시원을 알 수 없다고 풀이했는데 이는 오류이다. 〈숙종실록〉 49권, 〈정조실록〉 47권에도 형제봉이라는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유래에는 온조, 비류 형제가 나라 터를 잡기 위해 올랐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학자들도 부정하는 견해이며, 양명학의 학풍과 도가적 술법을 계승한 정길준 형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형제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단순히 산의 모양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마주한 두 봉우리가 형제처럼 우애롭게 보인다하여 그렇게 불렀을 것이며 이러한 이름은 전국에 적어도 30개 이상 된다는 데서 유추할 수 있다.

아주 옛날 북한산에는 많은 호랑이 가족이 살았다. 그 가족 중에 건과 곤이라 불리는 형제가 있었다. 형 호랑이 건은 용맹스럽고 강인하여 산중의 왕이었으나 곤은 생각이 많아 사냥도 하지 않았다. 건은 항상 넉넉하게 먹이를 준비해 주었지만 곤이 잘못될까 염려스러웠다. 건이 어찌하여 사냥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느냐 물었다. 곤은 지난번 토끼 사냥을 한 후에는 가엾은 토끼가 살려 달라 애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어찌하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지 생각을 하는 중이라고도 했다.
“그건 모든 생명이 다 마찬가지지. 누군가는 잡아먹히고, 누군가는 잡아먹으면서 사는 게 생명의 법칙이란다. 특히 우리 같은 동물들은 더욱 그렇다.”
형이 말하는 생명의 법칙을 동생 곤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곤아, 그럼 문수봉에 가서 놀아라. 문수동자가 너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거야. 그러다 운이 좋으면 문수보살도 뵐 수 있겠지.”
한없이 선량한 눈을 한 곤이 더 이상 사나운 호랑이가 되어 토끼를 사냥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건은 그렇게 말했다. 곤이 문수봉에 가서 있는 동안 건은 커다란 바위에 늠름한 몸을 쭉 펴고 두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문수봉에서 놀고 있는 곤을 지키는 한 편, 자신의 존재를 산 속에 있는 모든 동물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강한 힘을 가진 숲속의 제왕인 자신을 보고 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기를 바랐지만 곤은 말했다.
“저는 제 안에 있는 힘이 싫습니다. 그래서 다 없애고 싶습니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제 소원입니다.”
건은 그런 동생이 부럽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어느 날 큰 산불이 나 미처 피하지 못한 동물들이 목숨을 잃었고 건과 곤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형님, 육십갑자가 열 번 정도 지나면 우린 사람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다시 사람형제로 만납시다.”
둘은 꼭 끌어안고 다음 생을 약속했다.

때는 고려 말,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두 형제, 천(天)과 지(地)는 큰 뜻을 세우고 부모님을 떠나 삼각산에 들어와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개경에는 큰 혼란이 일어나고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형제는 당장 산을 내려가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당부가 있었기에 며칠 동안 깊이 생각했다. 형 천은 바위산에 올라가 앞날에 대해 생각했고, 동생 지는 문수봉에 올라 기도를 했다. 천과 지는 삼 일 만에 만났다.
“나는 새로운 나라에 가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형님, 우리는 고려의 재상이 되겠다하여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둘은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누구 하나의 의견만을 따를 수는 없었다. 대신 각자의 길을 가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생각했다. 동생 지는 형에게 말했다.
“형님, 저는 송악산으로 들어가 수도를 하겠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뵙지요.”
“그때가 언제란 말이냐?”
“육십갑자가 열 번 지난 후입니다.”
“육백년 후라니 그게 말이 되느냐?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형제가 힘을 합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지.”
“육십갑자가 지난 후에 우리가 형제로 만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는 가슴에 총칼을 겨누게 될 것입니다. 형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눈 사람들이 물러가고 나면 비로소 태평성대의 기운이 이 강산을 꽉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저와 형님이 다시 만나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동생 지는 형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송악산으로 떠났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 바위에 서서 다시 만나길 기다리겠다는 형의 절규가 삼각산에 메아리쳤다. 그때 삼각산 봉우리의 수많은 바위들도 언젠가 두 형제가 이 산에서 마주하고 살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다.

육십갑자가 열 번 지나는 날이 언제냐구요?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기운과 세상만물이 만들어 내는 기운과 그 기운을 쓸 수 있는 개개인의 기운이 함께 어우러져 평화가 찾아오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바로 그 날이겠지요. 세상에는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답니다. 아무리 여러 번 생각해도 정확하게 대답 할 수 없는 일들이요. 그렇지만 한 가지 정확한 것은 모두가 좋은 쪽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더 빨리 올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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