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자유스럽게 사는 게 그대로 참선입니다

▲ 그림 최주현

집착을 하지 마시고
그대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겸손하고 의리있고 도의에서 벗어나지 않게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면서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해 나가세요.

(지난 호에 이어서)

옛날에는 당나귀 끌고 다니던 마부가 많이 있었죠. 당나귀를 끌고 다니는 마부가 얼마나 때리고 일을 부려먹었는지 당나귀가 앙심을 먹고 죽어서 그냥 남편으로 태어나고 마부를 부인으로 해서 맞아들였어요. 하하하…. 그래 가지고는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그냥 때리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삽니까? 옛날에야 함부로 이혼도 못하고 시집도 마음대로 못 갔으니 말이죠. 그러니까 그냥 울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냐고, 자기가 지은 죄는 모르고요. 아, 이러고 울고불고 그러는데 어느 스님이 탁발을 하러 오셨더랍니다. 그래서 그 스님한테 “저는 하나 성한 데가 없이 이렇게 매를 맞고 삽니다.” 하니까 껄껄껄 그 스님이 웃으시면서 “한때는 자네도 그 사람을 그렇게 때렸네.” 그러더랍니다. 허허허.

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그러니까 그 얘기를 쭉 해 주면서 “먼저 맞은 놈은 지금 그렇게 때리고 가는데, 그것도 자기 마음으로 자기가 어떡할 수가 없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야. 인과로 인해서 주어진 거니까. 그러니까 그 때린 대로 맞아야 하는데 아직도 멀었다. 죽을 때까지 맞아도 안돼. 그러니까 돗자리를 도르르 말아서 아주 고무줄로 창창 둘러매 가지고 손싸게 쥐고서 때리게끔, 다른 건 다 치우고 그렇게 몇 번만 하라. 그러면 당신이 그 당나귀를 그렇게 피가 맺히도록 때린 것이 다 없어지노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거를 도르르 말아서 그렇게 해 놨는데 아, 몇 번 그렇게 때리고 나더니만 다시 깨어나서 하는 소리가 “자네를 왜 내가 그렇게 만날 때렸지?” 이러더랍니다. 하하하…. “이상하잖아. 왜 내가 그렇게 때렸지?” 그때서야 몸뚱이를 보고서 “아휴, 자네 몸뚱이를 보니까 그냥 성한 데 하나 없이 멍이 들고 피가 맺혔으니 이걸 어떡하면 좋지? 어떻게 갚아야 되지?” 하면서 정신이 나더랍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찌해 볼 수 없는 끼리끼리의 만남입니다. 이거를 곧이듣지 않으셔도 어쩔 수는 없지만 곧이들으셔야 합니다. 사실이니까요. 나는 한마디도 한데 떨어뜨리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질문하실 분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1(남): 한 해를 보내면서 송년회 법회 때 이렇게 질문할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간 한마음 법형제회에서 몇 가지 궁금했던 사항들을 큰스님께 질문 올리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문이 많아 문이 없고, 문이 없어 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점의 고기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이 제각각 맛을 말하듯이, 서울로 오는 길은 동서남북 많지만 마지막 안방 문은 하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큰스님: 허허허…. 질문치고는 대답을 아주 가까운 데 두고 찾으시는군요. ‘문이 없어 문을 찾지 못하고, 문이 많아서 문을 찾지 못하고’ 하는 소리는 우리 자체가…. 이걸 말로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다 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문이라 딴 데서 문을 찾아서는 아니 되죠. 내 마음의 문이란 천궁(天宮)을 통하는 문입니다. 내 마음의 문이란 천궁을 통하는 문이기 때문에 문이 많아도 문 찾기 어렵고 문이 없어서 문 찾기 어렵고,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 어디에 문이 있는가? 바로 내 빗장문을 열어야 열리는 거지, 내 빗장문을 열지 않고는 열리지 않습니다. 대답이 알쏭달쏭합니까? 허허허….


질문자1(남): 일체 생명은 자신을 위하여 이 생에 온 것이 아니라 오직 대중을 위하여 이 생에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같은 생각은 편견에 치우친 것인지 궁금합니다.

큰스님: 대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거는 자동적으로, 씨가 날려서 땅에 묻히기만 하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또 태양열이 있고 그러기 때문에 싹이 나는 겁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역시 그렇게 태어나는 겁니다. 누가 낳고자 해서 낳고, 낳기 싫으면 안 낳고, 이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냥 사랑의 씨앗이죠. 그냥 사랑하면 나오는 거죠. 사랑을 했다 하면 형성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씨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그 사랑의 씨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아시면 바로, 아까 얘기했듯이 그 문 안에서 문 바깥으로 나온 거죠.

질문자1(남): 네, 잘 알겠습니다. 스님 법문 중 ‘오백 명의 아들, 오백 년을 여우의 몸을 받아…, 오백 나한, 오백 년 후 다시 이곳에서 만날 때….’ 등으로 많은 말씀에서 ‘오백’이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 오백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합니다.

큰스님: 오백이라는 것은요, 이 우주 전체 한자리에 무정물이든지 생물이든지, 어떠한 생명체든지 다 있는 것을 오백 자리라고 해도 됩니다. 오백이라는 것은 허공, 전체를 오(五)라고 해도 되고, 백(百)이라는 것은 모두,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찰나에 화해서 돌아가니까, 공해서 돌아가니까 백이라고 했습니다. 무(無)라고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백이라는 숫자만 가지고 해서는 뜻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말대답 하나 잘못해서 오백 년을 여우로 견디다가 할 수 없어서 그 말대답을 다시 듣고야 여우의 모습을 벗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백 년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저께 여우가 됐다가 오늘 사람으로 된다 하더라도, 그 사이가 불과 몇 시간이든 1초든, 3초든 간에 오백 년이 됩니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서 마음이 돌아가는 도리를 아셔야 그 도리를 모두 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자유스러운 마음, 자유스럽게 내가 벗어나는 마음을 갖는다면 벗어날 것이고,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것이 자유스럽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숫자도 자유스럽습니다. 숫자는 사람들이 질서와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 생긴 거지 숫자가 따로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숫자가 거기서 나오나? ‘너 몇 번 돌아갔니?’ 이럴 수나 있습니까? 몇 번 돌아갔니? 허, 몇백 번이 되니? 몇천 번이 되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거기?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말입니다. 우리 사람 사는 것도, 한 찰나찰나 화해서 바뀌면서 그냥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뀌어서 돌아가는데 ‘무엇으로 만들어져서 이렇게 우리가 살 수 있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살 수가 없죠. 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죠. 공기가 모든 것을, 태양열을 잡아당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살 수가 없죠. 공기층이 높아질수록 추워지죠? 대기권을 벗어난다 하는 것도 이게 물로 싸여져 있기 때문에 물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게. 물뿐이 아니죠. 네 가지가 합동이 돼야만이 그 모든 게 자유스럽게 딴 걸로 화할 수 있으니까요. 과학도 그래서 벌어진 거니까요.


질문자1(남): 네. 고맙습니다. 또 진정한 보시와 인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인연을 맺는다고 맺는 것인지, 또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 건지요?

큰스님: 하하하…. 끝까지 왜 책임을 집니까? 우리가 살아나가는 것도 지나가다가 한 번 “어, 만났어?” 그러고 악수 한번 하고 지나가는 폭밖에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악수 한번 했다고 거기에다가 집착을 한다면 그거는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집착을 하지 마시고 그대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겸손하고 의리 있고 도의에서 벗어나지 않게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면서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해 나가세요. 그것이 선행입니다.

질문자1(남): 마지막 질문 올리겠습니다. 공부가 많이 됐다는 사람한테서 말과 행동과 모습이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걷잡을 수 없이 감정적으로 나온다면 이것도 가르치기 위함으로 봐야 되는 건지요.

큰스님: 공부하는 사람들은요, ‘옆눈을 팔지 마라. 옆을 보지 마라.’ 이랬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나도 한때는 그렇게 지내 봤습니다마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옆에서 잘못하든 잘하든 그거를 개의치 마라.’ 이겁니다. 왜냐? 옆에서 잘못하는 거를 보더라도 ‘너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데, 전자에 몰랐을 때 바로 내 모습이었다.’ 하고 안에다 놓아 버리세요. 이것이 그냥 억지 소리가 아닙니다. 수없이 바뀌어서 돌아왔으니까요. 여러분이 수없이 바뀌어서 이 자리에 와 있다면 못났을 때 그 모습, 잘났을 때 그 모습, 못했을 때 그 모습, 형편없는 그 모습이 모두 자기가 거쳐 올라온 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한마음에 모든 걸 놓고 ‘둘이 아닌데, 그렇지 않게끔 하는 것도 한마음 주인공 아니야?’ 한다면 그쪽도 바꿔집니다. 바꿔져요, 예. 그거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이게 바꿔져야지, 말로 육신으로 해서는 외려 더 업을 짓는 거지 그건 안 통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거를 놓고 가야만이 다 버려서 다 얻는 거죠. 만약에 이거 잘못된 것 보이고 저거 잘못된 것 보이고 이러다가는 언제 그 길을 갑니까? 언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다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남이 잘하는 거 못하는 거 보기 이전에, 그걸 봤으면 보는 대로 그냥 주워 넣어요. 그냥 보는 대로 주워 넣으라고요. 그리고 부드럽게 해 줌으로써 그냥 한바다가 되죠.

질문자2(남):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자다가 번쩍 눈을 떴는데 ‘난수불화’라고 해서 내 자신의 자성(自性)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깨어나고서도 몇 시간 동안 아무리 그 뜻을 풀려고 해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물론 꾸준히 주인공 자리에다 놓아 가고 그 외에도 내게 부딪쳐 오는 경계를 전부 놓아 가고 있습니다마는 때때로 ‘이게 자생화두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이제는 난수불화라는 그 말을 ‘주인공 당신이 한 일이니까 당신이 더 잘 알잖아!’ 하고 지금도 놓아 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런데 자생화두를 들었을 때 그게 자생화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이게 자생화두라면 자성의 소리라고 생각하는 이 자생화두를 때때로 놓아 가도 될는지요? 그게 궁금해서….

큰스님: 그냥 믿으면 믿었지, 왜 자생화두라는 이름을 또 짓습니까? 이름이 많은데, 그 주인공이라는 것도 이름인데, 그 자생화두라는 것을, 왜 화두라는 이름을 또 붙여요?
그것은 ‘자기 낳기 이전 자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응이 됐을 때도 겨우 그 소리를 하나 들었을 뿐이니, 그것을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놓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놓으십시오. 그 놓고 끼고 하는 것은 돌아가는데 그 근본은 움죽거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심봉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움죽거리지 않는 데서 돌아가면서 조금 나온 것을 또 이름을 지어서 거기 붙이지 마세요. 그대로 생활 자체가 화두니까. 내 몸뚱이가 돌아가는 게 그냥 화두예요. 그래서 이름해서 ‘주인(主人), 공(空)’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세탁기 중심에다 심봉을 달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중심에 꽂힌 그 심봉 자체는 하나도 움죽거리지 않고 돌아가는 것만 돌려요. 돌아가는 것만 돌리면서 그 심봉 자체는 힘만 주고 있지 꼼짝도 안 합니다. 더한다, 덜한다, 움죽거린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는 그 자체로 인해 한번 퍼뜩 그게 들린 거죠.


그러니까 기도라는 이름도 쓰지 마세요. 상대를 놓고 비는 게 기도입니다. 그런데 어디가 아파도 ‘네 몸뚱이 네가 건강하게 끌고 다녀야 할 거 아니야.’ 하고 그냥 놓으라고 그랬습니다. ‘주인공, 나를 낫게 해 줘.’ 이럭한다면 안 되죠. 낫게 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낫는 사람이 있으니까 안 되죠? 제 몸뚱이 제가 끌고 가는데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야지 누가 합니까, 그거? 그렇게 작업을 함으로써 둘이 아닌 도리도 알게 되고 자기, 즉 불생불멸하는 그 자성불(自性佛)도 발견해 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만 또 잔뜩 쥐고 있지 마세요. (주먹을 쥐어 보이시며) 이 근본만 쥐고서,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그런 소리가 들리고 그런 소리가 나오고, 보이고 그러더라도 그냥 ‘아, 감사하구나. 내 몸뚱이에 있는 내 육근(六根)을 다 이렇게 다스리면서 잘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렇게 가는 거니까 참 감사하구나.’ 그러고 그 자리에 다시 놔요. 그냥 그걸 한껏 붙들고 있으면 돌아가던 게 움죽거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냥 놔 놓고, 연방 연방….

질문자2(남): 꾸준히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3(남): 저는 질문은 없고요. 인연 따라 큰스님 법문을 딱 접하고 보니까 저의 모든 행동이라든가 인물이 전부 싹 바꿔지고 있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너무너무 감사해서 또 이렇게 늘…. 밤에도 책을 많이 보고, 보다가도 생각나면 덮어 놓고…, 참 좋습니다. 그런데 혹시 또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 잡아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스님: 예, 예. 감사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심란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책이 그렇게 좋아도 책을 보기 싫을 때가 있죠, 예? 아무리 금덩이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보기 싫은 때가 있어요. 싫은 때는 싫은 겁니다. 그것도 바로 참선입니다. 그러니까 싫으면 덮어 놨다가 보고 싶을 때 또 보세요. 때에 따라서 ‘이것 좀 봐야지.’ 하고 볼 때는 거기에 심취가 되고, 마음에 와 닿는 게 있고 그러면 또 그 책을 떼어 놓기가 싫죠. 그럴 때는 또 그대로 떼어 놓지 마시고요. 이렇게 자유스럽게 하시란 얘기죠. 자유스럽게 사는 게 그대로 참선이에요. 누구를, 어느 스님을 만나든, 어느 잘 아는 분이 있다, 부처님이 계시다 이런다 하더라도 자기는 자기 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느끼고 생활 속에서 실험하시고 그렇게 체험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잘하십니다.

질문자4(남): 저는 소원하는 것하고, 한마음 관(觀)하는 것하고, 지금 현재 일반 사찰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스님한테 가르침을 받고자 나왔습니다. 저희들이 어떤 원을 할 때 원하는 게 한마음을 관해서 되는 것도 있고 안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눈으로 볼 때에. 그래서 안될 때는 안되는 이유를 제가 알고 싶고, 요즈음 절에 가면 입시철이 돼 가지고 여러 가지 기도를 하고 또 소원을 빕니다. 스님들께서 시켜서 하는데, 그 기도하는 방법이 잘못돼서 안되는 건지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본래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은 그게 아닙니다. 상대를 보고 해 달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부처님 형상과 내 형상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그 뜻도 또한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부처님이 내 몸과 둘이 아니고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해 달라고 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네 마음을 먼저 알아야 내 마음을 알 수 있느니라. 그럼으로써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둘이 아니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뒤에는 “만약에 네 마음과 내 마음이 전깃줄이라면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치면 불이 들어올 뿐이지 거기서 ‘해 달라, 안 해 달라.’ 이런 게 붙지 않느니라.” 하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복이라는 얘기가 지금 나오는데 부처님이 가르치실 때는 그렇게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네 마음을 네가 발견해서 깨달아서 자유스럽게 살라. 일체가 다 공해서 돌아가느니라. 그리고 일체가 너 아님이 없느니라. 일체가 높고 낮음이 없느니라. 그런데 누구한테다가 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네 마음 가운데도 도량이 있고 부처가 있고 법이 있고 그런데, 어디에다가 해 달라고 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런다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물론 농사를 지어서 벼를 다 추려서 까서 키질을 해서 밥을 지어서 먹어야 먹어지는 거지마는 그거는 한 씨앗에서 그 모든 경계를 거쳐 나오는 것뿐이지 결과는 그게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갖다가 붙이면 붙어지고 불이 들어올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입시기도 드리는 것도 그렇고, 또 어떤 고난이 있고 어떤 애고가 있고 그래서 기도드리는 것도 있는데, 기도드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 자성이 다 있으니까 그 자성에 의해서 자기 마음이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만이 정신계 50%를 알고 물질계 50%로 나오게 해서 내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집을 지으려고 생각을 했다, 학교에 들어가려고 생각을 했다 이럴 때, ‘생각을 했다’ 할 때는 벌써 나는 시험을 봐야 하고 또는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필요하니까 설계도가 나와야 합니다. 설계도가 나오면 집이 올라갑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마음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마음을 내지 않고 어디에다 해 달라고 자꾸 기도만 한다면, 그러는 것도 마음내는 거지만, 그거는 쪽박에 물 한 모금 얻어 쓰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거는 복을 비는 건데, 복을 좀 얻어 쓸 수야 있겠지마는, 이건 내 생각입니다. 얻어 쓸 수야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타개하지는 못합니다. 자기가 명석해질 수도 없고, 물리가 터질 수도 없고, 항상 얻어먹는 노예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질문자4(남): 대단히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래서 부모가 이런 데를 다니면, 시험 보는 학생들한테도 관하는 법을 아주 간단하게 가르쳐 줘라 그러는 겁니다. 자기만이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켤 수 있는 거니까요. 자기만이 할 수 있지 누가 해 줄 수 있습니까? 시험을 봐 주는 겁니까? 신(神)이 있어서, 신이 와서 나를 시험을 보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신(自己神)이,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 나가는 거니까 어리석게 그렇게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사회자: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칠까 합니다.

큰스님: 여러분이 이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앞서 어떻게 살았든 그 입력된 것을 다 무너뜨리고, 다시 새 마음으로 입력을 해서 입력이 되면 되는 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그런 도력을 기르십시오.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도지, 어디 뭐 도가 따로 있고 그런 게 아닙니다. 모두 불교를 잘못 알고 있는데 이 생활 자체가, 우리 세상이 돌아가고 사는 자체가 바로 종교고 불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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