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주인, 그 근본 핵심만은 잊지 말아야

믿음이 진실하고 넉넉하다면
어떠한 것도 다 잊어버리고 허허 웃을 수 있습니다.
허허 웃을 수 있어야
웃을 수 있게끔 다시 돌아옵니다.

▲ 그림 최주현

여러분과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 항상 한마음으로 행하시길 빌면서…, 즐겁습니다. 올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 듯합니다. 우리가 배급을 탈 때 연방 돌아가서 뒤에 서고 또 서고 하는 거와 같이, 사람 사는 도리도 역시 그러합니다. 지구의 끝을 찾으려고 계속 가니까 처음 자기가 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더라는 얘기가 있듯이, 우리가 죽는다 하는 것도 아주 죽는 게 아니라 그 재료로 인해서 다시 형성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천당 지옥이 따로 숨겨져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죽으면 사흘 이내로, 다시 어떠한 모습으로 형성되게끔 임신이 되는데, 사람에게만 임신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이 주어집니다.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짐승의 모습으로 옷을 입었다고 할 때에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아무리 말을 해 봐도 짐승의 소리로만 듣지 사람의 소리로는 안 듣습니다. 그럴 때 슬픔이라는 것은 말도 못 합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나든지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하고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오는 것이죠.

이렇게 철두철미하니 이 마음공부를 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말하자면 아까가 과거고 어저께가 과거고, 이 시간 후가 미래니까 내일도 미래고, 그러니까 지금 현재 내가 생각을 잘하는 대로, 행동을 잘하는 대로, 말을 잘하는 대로 내일이 주어집니다. 이거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비참하고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고통 속에서 헤맨다 하더라도 그 긍지만은 잊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내 마음의 주인, 그 자체의 근본 핵심을 잊지 말아야 하고 물러서서는 아니 되지요. 어떤 걸로 표현을 할 수가 없어서, 예를 들어서 항상 이렇게 말씀드리죠. 맷돌에 심봉을 꼭 끼워 놓고 있으면 어떠한 물건이든지 거기 들어가서 갈려 나옵니다. 용광로에다 넣으면 어떠한 것이든지 다 재생이 돼서 나오고요.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불바퀴와도 같고 용광로와도 같고 자가발전소와도 같습니다. 그 세 가지가 포함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 중에 어떤 게 장하다, 어떤 게 틀리다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정말 귀중하다고 하는 말을 항상 해 드렸습니다. 즉 말하자면, 내 마음 자체가 그대로 이 세상 돌아가는 데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 생각 한 번, 행동 한 번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그렇게 처리가 되는 거죠.

그러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자체가 말은 간단하지만 행은 간단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로 믿는다면 아주 단호히, 행도 생활 속에서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하는 것이 그냥 그대로 종교고 불법이고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대로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法身)입니다. 그리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化身)입니다.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그냥 찰나찰나 화(化)해서 돌아가면서 자동적으로 그냥 생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마음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일을 걱정 않고, 지나간 일도 걱정 않고, 지금 현재 생각을 잘하는 분에게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하시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요, 왜 못 믿는지….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와서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 고 철저하게 생각을 안 하십니다. 자기로부터 세상이 벌어진 거고 자기로부터 종교가 생긴 거고 자기로부터 찰나찰나 돌아가는 그 모든 생활이 주어진 거지, 남이 준 게 아니죠. 그러니까 한생각을 잘해서 잘 꾸려 나가는 그런 능력이, 심력이 자기로부터 그대로 주어져 있는 거죠.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수화풍이 없으면 그냥 죽습니다. 우리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그래서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광력이나 자력, 또는 전력, 통신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갖춰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생각에 의해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나오게 할 수 있는 그런 심력을 가지고 계시는 거죠.


여러분 중에는 병고로 인해서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회사를 하다가 망해서 오시는 분도 있고, 상업을 하다가 망해서 오시는 분도 있죠. 그런데 장사를 할 때는 육안으로나 심안으로나 다음 세 가지를 모두 종합해서 잘 챙겨 봐야 합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며 거기에 맞는 어떠한 장사를 해야 좋겠느냐, 또 이자를 갚아야 하는 남의 돈을 얻어서 할 것이냐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남는다 하더라도 남의 돈으로만 시작을 한다면 이것저것 갚고 나면 본전이 밑져 들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잘 안되죠? 또 한 가지는 장소 문제입니다. 그 물건하고 장소하고 맞춰야 하는데 사람이 얼마만큼 쓸 수 있는 자리인가 하는 것을 한번 잘 보라고 해서 눈, 귀, 육근(六根)이 모두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을 다 종합해서 가지고 있으니만큼 그것을 잘 잡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거를 겉에서, 보이는 세계에서 잘 잡아 놓고, 마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주인은 바로 너밖에 없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가 맡겨 놓는 이 도리가 그대로 참선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대로 중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또 지금 시작을 하는 분도 있겠지만 망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패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다시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든지 첫째, 내 마음을 안정시켜야만이 그것이 참선이자 좌선입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마음조차 편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몸속에 들은 의식들이 다 편안치 못합니다. 수십억의 의식들이 말입니다. 내 마음 쓰는 대로 몸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은 따라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병을 가져오고, 망하게 되면 그냥 물질만 망하는 게 아니라 몸까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겁니다.

캠핑 나왔는데, 다 무너지고 도둑을 맞고 걸머진 거를 다 집어 갔어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법이 있죠. 믿음이 진실하고 넉넉하다면 그걸 다 잊어버리고도 ‘허허’ 웃을 수 있습니다. ‘허허’ 웃을 수 있어야, 웃을 수 있게끔 다시 돌아옵니다. 내가 아등바등하고, ‘이건 다 넘어갔으니까 다 죽었다.’ 하고 생각을 하면은 그냥 생각하는 대로 몸이 망가지고, 몸이 망가지는 대로 가정이 불안하고, 헤어지게 되고 정말 죽게 되는 거죠.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아주 가난하다 못해 병원에 가서 진찰할 돈도 없었더랍니다. 그런데 배 속의 애는 바로 선 것 같지를 않고 그래서, 하루는 돈을 빌려 가지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보니까 어린애가 거꾸로 있다고 그러더랍니다. 거꾸로 있다고 그러는데, 돈을 빌릴 데도 없고 아주 막막했더랍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듣고 여기를 찾아왔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의 도리를 얘기해 준 겁니다. 그랬더니 그때서부터 마음이 편안하게 되면서 마음에다가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나와 너와 둘이 아니요, 모두가 한마음인데 지금 돈도 없고 생활도 어렵고 그런데다가 또 너까지 거꾸로 서서 이렇게 힘들면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고 몸과 몸이 다 불편하니까 너 알아서 해.’ 하고선 막 그냥 사정하다시피 그렇게 맡겨 버렸더랍니다.


그랬는데 한 서너 시간이 지나니까 이상스럽게 꿈틀거리더랍니다. 그러더니 정말 낳을 때 가서 보니까 바로 섰더랍니다. 어린애가 알아들은 거죠. 이렇게 마음의 도리는 꽃나무거나 무정물, 생물이 모두 내가 말하는 대로 알아듣게 돼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알아듣게 돼 있어요. 하다못해 집안에서 기르는 고양이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다 뜻으로는 알아듣습니다. 자기 혼자는 못 알아듣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리로 가기 때문에 알아듣는 겁니다. 알아들으니까 그 모두가 연결이 되죠.


또 이런 분도 있었죠.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못 낳아서 애를 쓰다가 하도 시부모한테도 들볶이고 모두에게 들볶이니까 너무나 기가 막혀서, 개한테 밥을 주면서 하소연을 했더랍니다. “아이고, 너는 새끼를 아들을 낳았는데 나는 아들을 못 낳아서 집안에서 모두 내쫓느니 안 내쫓느니 들이쫓느니 하니 어떡하면 좋으냐. 너는 나를 도와줄 수 없니?” 하고 밥을 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했는데 그날 저녁에 말입니다, 그 개가 그냥 아무 일도 없이 죽었더랍니다. 그래서 ‘그것이 왜 죽었나?’ 생각을 하면서, 이 마음공부를 대충 해 나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이상하다.’ 했는데 그 달부터 어린애가 있어서 낳은 게 아들이었답니다. 이렇게 하다못해 날아다니는 새들이나 동물들도 자기 몸을 버려서까지 인정을 베푸는데 어떻게 사람으로서 마음의 도리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거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달마 대사가 사람들 다니는 길에 구렁이가 있어서…, 예전에는 요런 소로 길이고, 그냥 망망한 길일 수도 있죠. 그런데 그 한자리에 가서 그냥 틀고 앉았으니까 도저히 사람들이 지나가지를 못하더랍니다. 그걸 보신 달마 대사는 자기가 구렁이가 돼서…, 내가 그랬죠?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넣어도 물 한 방울이지 두 방울이 아니라고. 구렁이가 돼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끌고 가서 다른 데다가 갖다 놓고 오니까 자기 몸이 바뀌었더라 이겁니다, 이제. 그것도 여러분의 마음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입니다. 달마 대사가 어디가 모자라서 자기의 몸, 집을 뺏기고 딴 집에 들어갔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몸이란 그 자체가 어느 몸 하나도 자기 몸 아니 되는 게 없는데 구태여 왜 자기 몸을 뺏기고 딴 사람, 도둑놈의 몸을 빌려서 거길 들어갔다고 했겠습니까? 그걸 그대로 듣지 마세요. 자유자재권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즉 부처로, 법신으로, 화신으로 이렇게 나투시는 분이기 때문에 금방 구렁이가 됐다, 금방 사람이 됐다, 금방 짐승이 됐다, 금방 새가 됐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방편을 쓰신 거죠. 그런데 그건 방편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갑니다, 모두. 그런데 그것을 얘기로만 들으니까 그게 가늠이 되지 않죠.


그렇듯이 개의 마음에도 그 부인이 너무나 안타까우니까 그냥 그 마음에 마음이 같이 하나가 된 거죠. 그러니까 개는 개대로 모습을 벗고 사람이 되니 인도환생을 했고, 이 사람은 아들을 얻었으니 좋고, 이거는 양면이 다 좋은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공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이 마음공부를 하시게 되면 나무의 애틋함도 알 수 있을 거고, 사람들이 애원하는 그 간절한 마음도 알 수 있을 거고, 날아다니는 새들이 왜 저렇게 지저귀는지 알 수도 있을 겁니다. 개미 소굴에서 개미들이 왜 저렇게 들끓으며 가는지도 알 수 있을 거고 말입니다.


예전에 제가 가끔 말씀을 드렸지만 개구리가 개구리 알을 끌고 쭉 기어 올라가요. 그래 ‘저게 왜 그러나?’ 그러고 그냥 물끄러미 보기만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끌고 간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그냥 난데없는 소나기가 그 일대를 다 휩쓸었습니다. 하다못해 개구리도 비 올 거를 알고 제 새끼를 살리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끌고 가서 올려다 놓는데, 하다못해 옥수수도 그 해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걸 미리 알고 뿌리를 넓게 잡아서 쓰러지지 않게 자기 몸을 딱 세우는데, 하물며 사람이 내일 일을 생각 안 하고 오늘 덤벙대고 그냥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날아다니는 새들도 때에 따라서는 남의 집 얘기를 하는 수가 있습니다. “아이, 저 집은 너무 마음이 가난해서 생기는 게 없어.” 하고 새들이 안타까워서 지저귀고 이러지만, 그 사람들은 그 소리를 새소리로만 듣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만 그 모든 것을 서로 통신할 수 있는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항상 얘기를 했지만, 공생(共生)ㆍ공용(共用)ㆍ공체(共體)ㆍ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간다고 그랬죠. 그리고 태양열을 끌어 쓰듯이,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우리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어떠한 거든지 끌어 쓸 수가 있는 그런 재료가 여러분 앞에 다 주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에 어떤 병이 들어도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 이 네 가지로써 치료도 할 수 있고, 바깥 경계의 모든 것도 조절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는 겁니다. 이것이 말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기 때문에 실천을 하시라고 실천 공부를 시키는 겁니다. 실천하시라.

이 모든 것을 알고 실천하면서 자유스럽게 살려면 나부터 알아야, 나의 직결되고 가설된 이 근본부터 알아야 그 줄을 붙잡고 모두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의 근본자리는 보이지도 않고 빛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죠. 허공은 안 그렇습니까? 잡히지도 않고 빛깔도 없지만 허공은 있듯이, 마음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지만 역력하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움죽거리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달마 대사처럼, 유마힐 거사처럼 그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은…, 유마힐 거사가 머리를 안 깎으려고 깎지 않은 게 아닙니다. ‘머리 깎았든 안 깎았든 이 공부는 할 수 있다’는 그 표현이고, 방법을 제시한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과 유마힐 거사가 동일한 시대에 동등하게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해 볼 바가 있지 않습니까? “중생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겠다.”고 한 것도 여러분한테 공부를 가르치기 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있는 그 모든 생명들이 건강하지 않다면 여러분 몸뚱이가 어떻게 건강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천을 하는 공부, 즉 말하자면 어떠한 거든지 재료로 삼고, 모든 것을 거기에 일임하면서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너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라. 그리고 어떠한 용도든지 서슴지 말고 거기에 맡겨 놓고 그것을 실험하고 참구하라. 이것이 바로 미래를 살리는 길입니다. 과거는 어차피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에 공(空)해서 화해서 돌아가는,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 이 이치를 모르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나한테 재료가 주어져 있다는 그 사실을 몰라서도 아니 됩니다. 각자에게 마음의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도 아니 됩니다. 늙었든 젊었든, 옷 갈아입듯이 우리는 되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 것뿐이지 무슨 지옥이 따로 있어서 데려다 가둬 놓는 것도 아니요, 천당이 있어서 데려다가 그 천당에서 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유스럽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자유대권을 가질 때 바로 자유인이요,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리고 천당입니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다 건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주어지게 되죠. 자기의 기술대로 모든 사람들이 살듯이 말입니다. 탈렌트들이 나와서 배역을 맡을 때도 자기의 재능대로 배역을 맡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가난하게 쓰고 행동을 가난하게 하고, 또는 가난하고 속 좁게 말을 해서 넓게 살지 못한다면, 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냥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찰나에 둘러볼 수도 있을 것을, 그냥 온통 가난하게 써서 (컵을 가리키시며) 요 독 안에서 나가질 못하죠. 마음이 내 몸 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더 세상을 가난하게 사셔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넓게, 나 아님이 없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다, 하나로 굴려 넣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심봉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 심봉 자체가 된다면 돌아가는 이치를 다 그 능력으로써 보필할 수 있는 거죠.
나는 그래서 뭐, 이렇게 살아야 되고 저렇게 살아야 되고, 이게 옳고 저게 옳고 이런 거는 시시해서요, 그런 이론적인 거를 말하고 싶질 않아요. 지금 현실에 중요한 것은 실천이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꿰뚫어 안다 하더라도 그건 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남의 발자국 딛고서 흉내 내는 거와 같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한 발 딛고 한 발 옮겨 보는 것, 그것이 아주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채 물리가 터지질 못하고 넓질 못해서 내 마음이 내 몸 안에서, 마음 안에서 벗어나야 될 텐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항상 애고에, 병고에, 유전성 또는 영계성, 업보성, 세균성 이런 데서 벗어나지 못해 가지고는 쩔쩔쩔쩔 매고, 그냥 아무리 말을 해 드려도 그게 실천이 안되고, 아무리 말을 해드려도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은가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나 나나 사는 데까지 살다가…, 사는 날까진 틀림없이 살겠죠. 허허허…, 살다가 몸을 바꿀 때는 딴 모습으로 딴 집에 또 태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뀌어서 태어나는 건 좋은데 한 가정에 다섯 식구든 여섯 식구든 모인다 하더라도 은이면 은끼리 모일 거고…,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얘기하죠. 금이 금방으로 가지 무쇠전으로 가는 법이 없다. 금은 금끼리 모이고 무쇠는 무쇠끼리 모인다. 자연 인과로 인해서, 천 리를 가도 다시 그렇게 모이게끔 돼 있습니다. 한 가정이 깡통 가정이든, 금 가정이든, 무쇠 가정이든 그렇게 차원대로, 모두가 자기가 지은 대로 모입니다. 왜, 정치인들이 잘못하면 정치범들끼리 가두죠? 또 강도는 강도끼리 가두죠? 사기 치는 사람들은 사기죄로다가 사기범들끼리 가두죠? 그렇게 아주 끼리끼리 모아서 가두죠. 그렇듯이 세상을 가만히 보십시오. 모든 세상 물질은 다 끼리끼리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삽니다.

그러니까 “네가 잘못해서 내가 망했느니, 네가 잘못해서 내가 요 꼴 요 모양이야.” 하고 한 가정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거죠, 끼리끼리니까요. 보는 놈도 그놈이요, 그렇게 당하는 놈도 그놈이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도 원망할 데가 없습니다. 제가끔들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마음을 금으로 만들어야죠. 여러분이 때에 따라서는 막말을 하면서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하고 주먹으로 그냥 식구 볼탱이를 쥐어지르는가 하면, 자식들이 잘못돼도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 하곤 그냥 나쁜 거는 온통 부인한테로 가는 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아닙니다. 절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당한 놈도 그렇게 인과로써 오는 업보가 있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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