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화엄산림법회-우진 스님(전 통도사 강주)

“여러분은 한 번도 추해본 적이 없다”. 법회에 모인 이들을 향해 말하는 스님의 목소리에는 정감이 묻어났다. 세상의 혹한에 꽁꽁 얼어버린 마음을 슬몃 녹이는 확신이었다. 세상의 티끌이 하나라는 것을 알고 그를 불성으로 대하는 순간 그 자리에 깃든 아름다움을 본다는 화엄경의 요체였다. 12월 3일 나와 너라는 아만심을 꺾어 없애고 공덕의 숲을 키워나가자는 통도사 화엄산림법회의 입재 법문을 들어본다.
 

▲ 우진 스님은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을 은사로 1980년 출가한 우진 스님은 1986년 동국대를 졸업했다. 1991년 비구계를 수지하고 1998년 종범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고 통도사 중강 및 강사, 교육원 교재편찬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통도사 서축암 감원으로 주석 중이다.

진진혼입 찰찰원융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모두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화장장엄의 세계
이런 믿음 충만하면 그 속에서 붓다 돼
부처된다는 건 행복한 사람된다는 것

화엄경 통해 삶을 정립하다
새벽 예불 종송할 때 들을 수 있는 것이 <화엄경>이죠. 다른 나라는 예불시 그저 종을 치는 것에 머물고 말지만 우리나라는 종을 치며 발원하고 예경합니다. 이것이 의미를 띠고 있는 이유는 어떤 행동을 하든 한국 불교는 그 속에 항상 화엄의 행동을 하고 있고 깨달음과 발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한 말씀은 ‘진진혼입 찰찰원융(塵塵混入 刹刹圓融)’으로 대표됩니다. 진진이라는 말은 티끌입니다. 하나하나의 티끌이 서로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말인데, 이는 존재하는 각자가 따로 개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화엄경>에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내용입니다. 나와 남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차별을 두고 바라볼 것이냐 아니면 하나로 볼 것이냐하는 문제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을 보는 관점, 삶의 태도에 대한 관점을 정립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타가 과연 무엇입니까. <화엄경>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왜 서로를 모르고 살아가냐는 말이 나옵니다.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서로서로를 모릅니다. 이렇게 법회에 참여하신분들도 서로를 모릅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그 속을 알 수 없고 심지어 나 자신도 제대로 알기 힘듭니다. 왜 내 자신을,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은 모른채 살아가는걸까요.

마음따라 가는 삶이 열반
우리가 모르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제법무아성(諸法無我性), 모든 것에 자성, 즉 자기의 고유한 성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의 실체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화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고유한 성격이 없는데 무엇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이야기하죠. 나의 육신을, 내 생각을 두고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죠. 이는 마음이 갖고 있는 변하지 않는 고유의 성격, 개성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 상이 없는 무상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죠. 무상은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승불교가 본 무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끊임없는 내부혁신이 일어나 화엄에 이르러서는 일체가 무상하기에 행복하다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힘은 남성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식됩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그 힘이 나이가 들면 줄어들어 예전만큼 기를 펴지 못하죠. 약해지니까 무상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힘이 없어짐으로써 부드러워지기 시작하고 받아들일 줄 알고 포용하기 시작합니다. 삶이 풍요롭고 아름다워집니다.
마음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그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고, 변하는 것 이외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마음이 바뀌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답게 변한다는,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입니다. 화엄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마음이라는 전제 속에서 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오직 마음에 의해 규정되므로, 나라고 하는 객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도 그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실유불성’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있건 없건 존재하는 것들은 불성,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따라 삶이 펼쳐질 때 그것을 열반이라 하고 반대로 역행한다면 생멸이라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으레 짜증내고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그 자체가 생사입니다. 살았다, 죽었다,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이런 차별 역시 생사입니다. 때문에 내 마음과 반대되는 것을 두고 생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고통의 감정으로 다가오고 마음에 들면 그것을 기쁨 또는 선(善)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죠.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다만 우리의 망정(妄情)일뿐입니다. 착하다는 것도 망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화엄에서 이야기하는 ‘일심법계 진진혼입’이라는 말은 착각하기 쉬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각자 존재하는 것이 사물적으로 하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제각기 분자구조가 다 달라요. 진진이죠. 그런데 그것이 분자의 구조를 떠나면 똑같다는 말이 됩니다. 분자라는 것은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면 4대 지수화풍입니다. 지수화풍의 결합구조가 다른 것이고 이를 인연관계가 다르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연관계를 가지면 4대오온이 인간의 모습으로 구조결합이 이루어진 것이고 마이크의 마음을 가지면 마이크 모습으로 분자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존재하는 모습이 다르다는 이야기이지 실체적인 모습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을 마이크로 보는 것은 망념으로 보는 것이고 이를 불성으로 보는 것은 일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불성으로 보는 순간 세상 어느 것도 함부로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진진혼입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하나가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화장장엄으로 세계가 이루어지는 거죠.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불교에서 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이유는 꽃이 행동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만 가지의 선행을 쌓아야 하나의 꽃이 피어난다고 믿기에 꽃을 ‘만행화’라고도 합니다. 바라밀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상징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엄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인식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펼쳐질 때 세상을 장엄한다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혼입을 인식해 그 속에서 내 행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진진혼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 이를 화엄에서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표현합니다. 믿음을 성취했다 표현합니다. 어떤 믿음이냐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기에 나는 한 번도 추하거나 왜소하거나 불행한 적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한 번도 중생이 되어본 적이 없는 붓다라는 걸 자각하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 마음을 가졌을 때 믿음을 가졌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에서는 그걸 교리적으로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그 속에서 붓다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이들은 한순간도 불행해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된다 하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은 믿음을 결정심, 맺어 정한마음으로 표현했습니다. 불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내가 붓다라는 걸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 하나 청정심이에요. 내가 붓다라고 믿는 순간 나는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그 마음속에는 청정, 순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한 믿음에 의해 십바라밀을 지혜와 자비로써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 기억해야 할 말이 마음을 잘 쓰라는 ‘선용기심(善用基心)’입니다. 부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믿기로 했으니까 그 마음을 잘 쓰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죠.
요약하자면 <화엄경>은 각자가 완전히 하나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다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 짐승, 지구라는 세계가 원융, 완벽하게 융합되어있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함부로 훼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마다 나와 다를바 없고 타인이 사는 세계가 나의 세계와 원융한, 완벽히 하나인 세계니까요. 이것을 10조9만5천48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 <화엄경>입니다.

화엄문화로 풀어내는 한국사회의 미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야할 이념과 생각들이 화엄이란 이념입니다. 그때 우리의 문화와 사회에 새로운 비전이 생깁니다. 신라가 의상 대사에 의해 화엄십찰을 만들면서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 또한 만들어졌습니다. 불국사, 석굴암, 통도사, 황룡사 등 세계에 내놔도 손색없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화엄의 문화입니다.
통도사의 법당은 12개가 있는데, 산신각, 응진전 등 법당 하나하나가 각각의 세계입니다. 이들이 모여 통도사라는 하나의 가람 속에서 완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거에요. 이게 화엄이고 다문화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요즘은 결합의 시대, 융합의 시대라고 하죠.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로 모든 것이 다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의 앱이 각각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고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로 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엄이라는 것은 하나의 개성을 인정하면서 각자가 통할 수 있는 통합의 문화에요. 그러니 국론을 통일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도 화엄의 문화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문화를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선불교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화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화엄이 시작되었지만 꽃을 피우지는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그 꽃을 피웠고 그 속에서 피어난 열매가 선불교입니다. 화엄을 떼어 놓고는 한국불교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고 깨달은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을 잘 써서 끊임없이 10바라밀을 실천하는 그 속에 깨달음과 세계 평화가 있습니다. 공존이념을 벗어나서는 이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이념은 끝났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갖는다는 말 속에서 소득, 문화의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불균형의 세계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방법은 통합의 문화에 있습니다. 30년 압축 성장 과정 중에 우리는 문화 등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되찾아서 문화적, 정신적, 공유의 아름다움을 찾아가야 할 때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공유하는 시스템으로 가지 않으면 불교도 세계도 공멸합니다.
이처럼 의상 스님의 사상과 삶이 사회에 구현될 때, 한국은 문화선진국이 되고 세계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아무 조건없이 수용하면 화엄경 속 가르침의 보배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이라는 말처럼, 화엄산림을 통해 마음속에 환희와 결정된 믿음을 갖고 초발심시변성각(初發心時便成覺)하셔서 여러분 스스로가 이 세계 여래의 보광명지(普光明智)를 각자 얻기를 발원하면서 법회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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