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경제 下 - 정재락(전 영산대 교수)

3대 종교 중 경제 관해
가장 많이 얘기한 불교,
재물에 대한 탐착 경계했을 뿐
재물, 공덕 증거로 봐

이기심에 기초한 무한 경쟁 아닌
육바라밀 실천 위한 공존 경쟁 도모

▲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와 국부론에 제시된 자본주의 단점을 분석한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 두 사람이 원했던 것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이었다.

승단의 비구 위주로 붓다의 원래 가르침을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상좌부와,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대중부로 1,2차 결집은 나누어진다.
이러한 초기 불교 교단은 세월이 지나면서 출가 승단 위주로 전통을 유지하기위해 보수화 되었다. 또한 붓다의 교설인 만유의 무상, 무아, 연기설은 논의과정중에 체계화, 교조화되어 히말라야보다도 높은 아비담마라는 ‘유(有)’의 교학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재가 대중을 중심으로 붓다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불교 중흥의 사회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들은 상좌부 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하고, 스스로는 중생을 위해 자기희생과 헌신을 지향하는 보살의 행을 통해 성불하기를 추구하는 대승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불교교단은 전통적인 계율을 고수하려는 보수적 경향의 상좌부와 계율을 자유로이 해석하려는 진보적 경향의 대중부로 분열하게 되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의 괴로움에 대해 연기설에 입각하여 고찰하고 바른 지혜와 수행으로 해탈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원칙 위에 교리를 세운 것이기는 하지만 점차로 실제 수행보다는 번쇄한 교리해석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해졌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 반발하고 비판하는 집단에 의해 대승불교가 싹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일반 대중들은 붓다에 대한 소박한 믿음으로 예배하고 공양함으로써 구원을 바라게 되었고, 그것이 행해진 대상은 불탑이었다.
또한 소승불교가 아라한의 불교라면,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대승경전은 오로지 보살의 이념과 실천에 대해 설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보디삿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그리고 마하삿트바란 위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불타가 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고된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 자기인식의 차이가 바로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인바 불타가 되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은 필연적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수행이다. 즉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수행을 완성하는 길이다. 이것이 육바라밀의 수행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무대는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는 광대무변한 불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개인중심의 경제생활과 복리를 추구하는 소극적 경제관에서 이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하여 적극적인 경제생활 추구와 대중적 사회 복지를 지향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 제8품 의법출생분에 나오는 ‘이게 불법이라고 규정하면 바로 불법이 아니다’ 라는 말처럼, <금강경>의 가르침은 불교라는 틀에 한정되지 않는 우주적 진리다.

4. 금강경과 유식론
붓다의 초기불교 연기론에 입각한 반야경의 공사상을 더욱 확장시키면 그 위에 건설된 초기 대승불교의 마명·용수보살 등이 중심이 된 중관사상, 이를 더욱 확장시켜 정립 발전시켜 나간 무착, 세친 보살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오직 마음뿐이라는 유식사상으로 발전되어 공을 깨닫는 것에 만족치 않고 공을 깨닫는 인식의 저장고로 장식(藏識, Alaya-vijnana 혹은 아뢰아식)을 제시한다. 이는 인류의 보편적 의식과 아울러 개인의 특성을 아우르는 것으로 한없는 시간에 걸친 우리의 인식과 인상이 여기에 저장되므로 우리는 심식을 정화하고 계발함에 따라 무한한 지혜와 잠재력을 계발해 나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과 지성의 가능성을 극대화하여 인생과 우주의 창조와 주체가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유식론적 시각으로 경제를 본다면 우리는 외부 세계의 경제적 상황전개도 우리의 책임임을 알게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제적 세계의 창조와 유지 및 진행도 다름 아닌 우리 의식의 발현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식된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경제적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자신에게 두어야지 남에게 돌리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혹은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반성하며 해결을 위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대안 모색과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대승불교 특히 후일 유식학으로 발전하는 우리 인식 바탕의 잠재력을 계발하는 유식론적 연기에 바탕을 둔 경제 행위는 그 범위가 무한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어떻게 우리가 무한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장식(아뢰야식 혹은 업식)을 컨트롤 할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널뛰듯 출렁이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 업식(業識)을 정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말하자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처럼 한없는 시간을 지나오며 자아의 분별 망념으로 일어난 업식이 켜켜이 저장되어 있는 우리의 아뢰야식을 포맷하여 깨끗이 비워야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가 원하는 어떤 그림이라도 그대로 실현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불과 삼사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절에서 금강경 읽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일반 대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님들조차 금강경 독송하기를 권유하는 분들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경전이니 생전예수제때나 한 번씩 스님들이 독경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처럼 일반 대중들에게 금강경이 널리 보급되어 독송되고 활발하게 논의되고 관련된 저술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 한가운데에는 동국대 총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친 후 소사에서 목장 경영을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아침저녁으로 금강경 독송을 권장하던 백성욱박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업식을 비우고 또 비워 비운다는 분별조차 비우는, 비운다는 인식 행위를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여가며 우리의 분별 망념이 전혀 미치지 않는, 바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무한 창조주가 되는 무위의 세계로 안내해 가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또한 이와 같이 마음을 비우는 행위는 관념적인 것이 아닌 복과 지혜의 양변을 동시에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32품 전부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 불교는 초기 불교 때부터도 인류의 3대 종교 중에서 경제문제에 관해 가장 많은 내용을 설한 종교로, 경제 윤리에 대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많다. 재물에 집착하고 재물 때문에 타락하는 점을 경계하였을 뿐이지, 재물을 공덕의 증거로 보았다.
근대사회의 경제철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을 뽑는다면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와 국부론에 제시된 자본주의 단점을 분석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담스미스는 이상적인 형태로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세 가지 중요한 질서를 요약하고 있다(박순성, 1992, 230p). 첫째 한 사회의 소득은 모든 사회적 생산물의 교환가치, 즉 임금, 이윤, 지대라는 세 가지 본원적 소득의 합과 일치한다. 둘째 개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한다. 이것은 합리적 경제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이러한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돈을 버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땅을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것이고, 셋째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경제 활동은 초기불교 경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재가 신도들에게 권장되었으니 불교적 관점에서 본 경제 철학은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왜 가난한 사람은 항상 가난할까?", "자본주의는 정말 이상적인 형태일까?"라는 새로운 의문을 던진 사람이었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기계부품처럼 일하면서도 비참하게 사는 현실을 보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파괴시키는지 밝혀내고 싶었다.
두 이론은 권력의 야망을 성취하려는 정치가들에 의해 변질되었지만 그들 모두 원했던 것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집필했던 것이다.
정천구 박사는 <금강경 공부하기>의 제8품 의법출생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머무름 없는 보시의 물질적 공덕을 인정하셨고 아울러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다 보시했다 해도 성리를 밝게 해주는 금강경의 한 게송이라도 일러주는 공덕이 물질의 공덕보다 더 크다고 하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아담 스미스가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개인의 능력과 창의를 최대한 발휘하여 인류의 행복을 추구했던 정신과 그 결과로 인한 빈부의 격차, 독점기업의 탄생 등으로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온다는 모순점을 지적했던 마르크스의 정신을 다 아우르는 연기(緣起)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연기적(緣起的) 경제관계는 자신(자신의 기업)을 다른 사람(거래처)과 구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연기적 관점에서 소비자는 기업과 밀접한 관계위해’ 내가 누구를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을 비우며 그저 열심히 노력한다. 연기적 관점에서 경쟁은 이기심에 기초한 무한 경쟁이 아니라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한 무아(無我)적 경쟁이며, 공존적 경쟁이다. 그러나 내가 육바라밀을 실천한다는 생각도 비운다. 그건 다 보살이 저 니르바나의 세계로 가기 위한 뗏목에 불과하므로.

5. 맺는 말
붓다께서는 초기 불교승단의 출가자들에게는 철저한 무소유에 의한 금욕 생활을 권하셨지만 재가 신도들을 위해서는 근대 자본주의에 필적할 만한 경제 행위를 권장하셨다. 대승의 일어남은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큰 수레이고 그 수레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여러 요소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경제행위와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무한 경제적 성취의 실현도 가능하다는 점을 이상과 같이 고찰하였다. 특히 무착, 세친 보살의 유식론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아뢰야식의 업식을 정화하는 단계가 불교적 수행이라고 한다면 그 수행의 기초는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지해서 실행하는 것이며 여기 반드시 뒤따르는 실천적 덕목이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인 것이다. 이 육바라밀의 실천은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주장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관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 일할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웠고 이는 자본을 낭비하지 않고 축적하거나 재투자를 해야 하는 자본가의 윤리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구교에서 속된 행위로 여겨졌던 상업의 종사가 비윤리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구원을 향한 행위로 자본가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는 오히려 우리의 기존 관념과는 달리 매우 혁신적이고 개방적인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 철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 내용의 핵심을 표현한 사구게를 경제 원리로 풀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應無所住 而生其心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1.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집착을 버려라.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보여질 뿐 실체가 없으니
그렇게만 볼 수 있다면 경제의 원리를 깨칠 것이다

2. 應無所住 而生其心 - 무위로써 하라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비우고 또 비워서
일의 판단을 하라

3.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그릇된 경제행위의 주범은 몸뚱이착이다
무슨 일을 하건 제 소견을 고집한다면
반드시 일을 그르치리라

4.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내가 이룬 모든 것을 회향하라
이처럼 하여 크게 성공했더라도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을 뿐
영원한 것 아니니 부처님께 회향하라.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