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 열반 20주기 초청 강연 - 공종원(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최근 연이어 보도되는 탓에 승풍실추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말을 보태기가 열없는 일이 돼 버렸다.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기획된 강연에서 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위기에 놓인 한국불교의 가치회복 시발점을 봉암사 결사에서 찾았다. ‘무엇이든지 우리 손으로 한다’는 의지로 시작된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이어받는데서 불교 개혁이 울림을 가질 수 있다했다. >

▲ 공종원씨는...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거쳐 1964년 라디오서울 PD로 입사한 후 동양방송 기자, 중앙일보 기자, 논설위원, 동서문제연구소장과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방송위원회 심의의원, 공연윤리위원회 윤리위원과 MBC, SBS 시청자위원,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시니어저널 주필, 불교방송 시청자위원장, 한국불교언론인 회장 등 언론, 문화예술 각 분야에도 관여했다.
승풍 타락 극복하고
자급자족으로 자부심 지키려 한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의지

1. 외면 받는 불교 개혁운동
최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한 신도단체가 ‘범계승이 있는 사찰에는 보시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다. 한 교계신문은 한 종회의원 스님이 만취하여 어떤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크게 보도하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현재 한국불교의 문제가 ‘지계(持戒)’로 귀착하고 있으며 한국의 승가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이를 스스로 인정하듯 조계종은 이미 2011년부터 ‘자정과 쇄신’이라는 깃발을 내세우고 대대적인 개혁운동을 펴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조계종의 ‘자정과 쇄신’운동 표방은 사회일반에 별다른 감동을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정과 쇄신’운동은 진행되어 해를 몇 번 넘기고 있지만 사회에서는 그 운동의 결과로 조계종과 스님들이 눈에 띄게 변모하고 있다는 증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우리사회에선 스님들이 지나치게 부유하고 사치하여 승가 본연의 ‘청정가풍(淸淨家風)’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도들은 부패타락의 화신인 권력승, 정치승의 모습이 부처님의 정법을 더럽히고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분히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인식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한국불교가 아주 망가져 없어지지 않고 이 정도로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많은 선배 선지식들이 엄혹한 현실여건 속에서도 분투노력한 결과다.
실제로 최근세사를 돌아보면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통해 전개된 조계종의 정화운동의 공을 간과할 수 없다.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내고 비구의 청정성을 회복하려는 정화운동은 그자체가 민족전통 회복운동이었다. 운동의 결과 사찰이 비구의 손에 넘겨진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승가의 청정성이 많이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수십 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대처 은처승 문제가 계속되고 권승과 파계승의 횡행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그 영향이라는 지적이다.
그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세의 대표적 선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철 스님의 개혁가적 면모를 부각해 보면서 한국불교의 진정한 가치회복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정화운동의 뿌리 봉암사 결사
1954년 이후 전개된 조계종 정화운동도 그 실제적 뿌리이면서 정신적 기반이 되었던 ‘봉암사 결사’와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다. 봉암사 결사의 수행내용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것이었고 그 구체적 실행내용은 성철 스님이 기초한 ‘공주규약(共住規約)’이었다. 모두 18개 항으로 구성된 규약은 결사대중의 다짐으로 존속하였고 이를 지키기를 거부하는 경우는 결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공주규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이 정한 계와 숭고한 조사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실천하여 구경의 깨달음을 원만 속성한다. 둘째, 어떤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가르침 이외의 각자 개인의견은 절대 배제함. 셋째, 일상 생계는 자치적으로 물 운반, 땔감구하기, 밭갈기, 탁발 등 어떤 고역도 받아들인다. 넷째, 소작인의 곡물납부와 신도의 특별기부에 의한 생계는 단연코 받지 않는다. 다섯째 신도의 불전 헌공은 재를 위해 가져온 현품과 지성의 배례로 한정함. 여섯째 보청과 취침 때를 제하고는 항상 오조가사를 착용함. 일곱째, 절을 나서 외출할 때는 삿갓을 쓰고 주장자를 지참해야하며 반드시 무리를 이뤄야 함. 여덟째 가사는 마나 면에 한하고 색은 괴색이어야 한다. 아홉째, 발우는 사기그릇이외 사용을 금함. 열째, 하루에 한차례 능엄대주를 송해야 한다. 열한째, 매일 두 시간 이상 노무를 해야 한다. 열두째, 한 달에 두 번 포살대계를 강송한다. 열셋째, 불전 공양은 오전에 하고 조식은 죽으로 정한다. 열넷째, 앉는 순서는 승랍에 따른다. 열다섯째, 실내에서 앉을 때는 반드시 벽을 향해야 하고 잡담은 엄금함. 열여섯째, 정해진 취침시간이외는 잠을 금한다. 열일곱째, 개인이 쓸 물자는 각자 마련해야한다. 열여덟째, 이 밖의 규칙은 청규와 기타 규칙에 준한다. 이 같은 규약을 실천궁행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함께 생활할 수 없다.
공주규약의 내용은 당시 그 어떤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혁명적인 실천 조건이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성철 스님 자신의 말로는 ‘무엇이든지 우리 손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밥해 먹는 것, 나무 하는 것, 밭 매는 것 모두 우리 손으로 한다. 일체 삯군 일꾼은 안 된다 말입니다.”
이런 사정을 보면 봉암사 결사의 성격이 드러난다. 첫째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불교의 근본이 위태로워지고 불조의 가르침이 민멸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수좌들이 부처님법대로 살아보겠다는 의식이다. 둘째 결사의 성립전개는 순전히 수좌들 자신의 자의적 결정으로 이뤄졌다. 셋째 결사의 성립 추진 전개에는 중앙과의 연계가 없고 지역의 독자성이 두드러진다. 넷째, 결사의 내용은 공주규약으로 요약되어 집행되었는데 이는 결사의 원칙과 규율의 뚜렷함을 나타낸다. 다섯째 결사로 나타난 봉암사 생활은 청정한 수행성을 강조하고 있다. 승풍의 타락을 극복하고 신도에게 의존하는 행태에서 벗어나 자급자족하면서라도 승려의 자부심을 지키려는 의지가 들어난다. 여섯째 수행의 중심은 선(禪)이었지만 청규와 율장이 저변에 깔려 수좌들은 예불, 청소, 울력, 나무하기 등에 동참하였다. 일곱째 결사는 개방적이어서 비구니는 산내암자인 백련암에 수용되었다. 여덟째 봉암사 생활은 불교대중화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보살계 법회, 승려에게 3배, 공양물의 평등성 등이 그것이다.

3. 정혜결사와 참선만일결사
현대 불교개혁운동의 단초라고 할 수 있는 봉암사결사운동도 역사 속에서는 이보다 선행하는 결사운동을 모방했다. 고려시대 보조지눌의 정혜결사와 용성 스님의 참선만일결사가 그것이다.
정혜결사는 고려 말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교단마저 타락일변도에 있는 와중에 윤리적 청정성을 회복하고 정혜쌍수를 포함한 수심(修心)의 새로운 선 전통을 실천하자는 결의로 형성되었다. 이들이 지향한 것은 청정성의 공간이며 정혜쌍수를 구현할 수심의 장이었다. 부처님 당시의 청정승가와 중국선종이 이룩한 총림이란 수행공간을 구현하면 자연 교단의 정화가 이룩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봉암사 결사가 추구하였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봉암사결사는 율의(律儀)의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개혁성이 보조보다 더 높았다.
용성 스님의 참선만일결사(參禪萬日結社)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에 도봉산 망월사에서 열렸다. 흔히 선사들이 계율을 경시한다는 소문과는 달리 이 결사의 창립기는 “우리 부처님께서 계(戒)로서 스승을 삼으라는 유촉을 가만히 생각하고 선율병운(禪律竝運)하되 규칙을 정함이 매우 엄격하니”라고 하여 선과 율을 함께 운용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용성 스님은 여기에 선농불교(禪農佛敎)까지 요구하여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철 스님이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용성 스님의 참선만일결사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넉넉히 짐작된다.

4. 가장 개혁의지가 강했던 봉암사결사
봉암사 결사는 정혜결사나 참선만일결사, 정화운동이나 자정과 쇄신운동 그 어느 것에 비해서도 개혁의지와 개혁실천이 가장 강렬했다.
“처음에 들어가서 첫 대중공사를 뭣을 했느냐 하면 ... 법당 정리부터 먼저 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법당정리라는 무슨 소리인가?”(‘수다라’ 10집 ‘1947년 봉암사결사’)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제자만 모셨습니다.(중략) 그 다음에는 불공인데 불공이란 것은 자기가 뭣이든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서 스님네가 축원해주고 목탁치고 하는 것은 본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공도 폐지했다는 뜻이다. 이어 천도재는 금강경과 반야심경 독송만으로 한하였고, 목발우 대신 철발우와 와발우로 되돌아갔다. 비단으로 된 가사, 장삼이 금지되고 괴색가사, 보조장삼으로 돌아갔다. 종래 절살림을 맡아주었던 공양주와 부목을 절에서 내보내고 이들이 하던 일을 대중이 직접 시행하였다. 과거에 스님들이 쓰던 육환장과 삿갓도 새로 만들어 썼다. 아침에 죽을 먹는 전통도 되살리고 포살과 보살계도 되살렸다. 신도가 스님에게 공경의 표시로 삼배를 시행하였으며 공양은 승려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었다. 곡식도 전부 대중이 손으로 찧고, 나무도 모두 대중이 했으며 밭도 전부 대중이 맸다. 방부를 받을 때는 능엄주를 읽어야했고 나무 한 짐을 해놓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봉암사 결사를 선종 총림처럼 엄격한 수행처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성철 스님의 뜻이었다. 법당에서 떼어낸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를 마당에 내놓고 몽땅 불사르는 과격성도 보였다.
요컨대 스님이 주도한 봉암사결사는 한국불교개혁운동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첫째 결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식민지 불교의 왜곡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과 우리 전통불교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둘째는 부처님 교법과 계율을 준수하려 한 근본불교적 개혁을 지향하였다. 셋째, 봉암사 결사의 정신은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되었다. 봉암사 결사 참여자의 대부분이 정화운동 세력의 핵심역할을 한 것도 그 영향이다. 이는 결국 조계종단 재건 운용과 정신사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넷째 결사에서 실행되었던 의식, 의례 등은 이후 조계종단에서 관행화되었다. 장삼, 가사, 반야심경 독송, 승려에게 3배 등의 보편화가 그 실례다.

5. 불교개혁도 대중화와 사회화를 감안해야
전통불교 수호와 청정 수행의 차원에서 보면 성철 스님의 개혁정신은 모두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불교의 대중화라든가 불교의 사회화라는 노선에 비추어보면 성철 스님의 개혁운동은 재평가될 여지가 있다.
첫째, 법당정리라고 하여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제외한 잡신인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를 제거한 것은 과감한 측면이 있으나 전통적인 대중신앙형태인 자연신 존중에 대한 부정을 나타낸 것으로 아쉬움이 크다. 둘째, 불공의 정비로 일반 불공과 영혼 천도재를 거부한 것은 비록 신도들의 자발성을 촉구하고 승려들이 축원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 기초한 것이지만 신도들을 도와주어야할 승려들의 존재의미를 망각한 것으로 아쉬움이 크다. 성철 스님은 승려의 역할을 금강경 혹은 반야심경 독송에 한정하고 범패나 춤도 신도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금하였다. 또 사월초파일, 성도절, 관음재일, 일요법회 등 재가신도를 위한 기념법회도 금하였다. 이런 행사를 모두 과소평가한 것이다. 이는 신도를 모아 교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무시한 선택이라 할 것이다. 셋째, 능엄주, 반야심경, 금강경,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은 염송되었지만 천수경 염송은 제외되었다. 관음신앙은 자주적인 수행이 못되고 너무 의존적이라고 하여 배척되었다. 넷째, 기존의 중단예불이 폐지되고 반야심경 독송으로 대치되었다. 승려가 신중의 스승이 되어야한다는 정신에서다. 대신 불보살을 받드는 상단예불은 철저했다. 보통의 선방에선 죽비치고 절을 세 번 올리는 것으로 그쳤으나 성철 스님은 칠정례를 중심으로 예불문을 반드시 독송하도록 했다. 아침예불에는 칠정례와 능엄주, 저녁예불에는 칠정례와 백팔참회가 수행되었다. 예불절차가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을 비판하기는 어려우나 신도의 참여를 감안한 절차수정도 필요할 것 같다.

6. 산속에서도 큰 영향력을 편 성철 스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 스님의 개혁참여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청담 스님이 주도한 정화운동에 성철은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그 이후의 종단활동에도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반적인 개혁가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종정직을 맡고집회와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때 발언하고 관여하였다. 불조유훈을 앙양하기 위해 법어를 내리고 불법의 엄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불교개혁가로서 성철 스님은 다만 피은(避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열심히 나섰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였던가, 가야산 속에서 세상에 나오지 않고 법어만을 내보냈던 성철 스님은 의외로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스님으로 평가되었다. 수행자다운 은둔생활로 불교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지만 시의적절한 법어를 통해 중생들에게 큰 위안을 선사하는 수행자라는 평가를 듣곤 했다. 피은만 하는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정말 필요할 때 진실을 이야기할 줄 아는 종교개혁가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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