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지극히 마음 쓰면 예감하게 돼
‘벌침과 벌들의 죽음’을 보고…


서울에서 부산도 한 걸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마음과 마음에 길이라도 있는 것일까. 한 걸음에 다가가 만나기도 하고 또 한 걸음에 멀어지기도 한다.
지난 11월 15일은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결혼 4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침공양을 하면서 약속을 했다.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통도사에 다녀오고 외식도 하면서 저녁엔 영화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평소에 전화도 잘 하지 않았던 현대불교신문 최정희 편집이사님이 생각이 났다. 늘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걱정이라던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었다. 왠지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아 본인에게 물어 볼 수가 없어 이사님과 함께 근무하는 기자한테 전화를 했다. “최 이사님한테 별일 없으신가요?”하고 물었더니 “예,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영단을 꾸미는 중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나의 예감에 너무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일이…”를 되뇌었다. 나는 다시 남편과 의논한 끝에 계획을 바꿔 서울로 조문을 가기로 했다. 아무리 멀어도 꼭 다녀와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최 이사님과는 오래 전부터 서로 챙길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던 인연이며, 가끔씩 하게 되는 전화를 통해 어머니 얘기를 자주 들어왔었던 터라 왠지 늘 가까이서 뵙는 듯했었다. 그의 어머니를 뵌 적은 없었지만 최 이사님의 효심은 가끔씩 주고받았던 전화 통화만으로도 충분이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효심 깊은 최 이사님을 보며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늘 ‘효도’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던지라 병상에 계신 어머님이라도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을 만큼 이사님의 효심이 부러웠다.
우리는 늦은 오후에 병원에 도착했다. 많은 조화들이 빈소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영단의 영정으로 그 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생전의 곱고 인자하신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본 최 이사님은 내가 너무 멀리 있어 연락하지 않았다며 먼 걸음하게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먼 걸음’이란 마음이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마음만 있으면 부산 아니라 그 보다 더 먼 길도 한 걸음에 달려올 수 있는 것이고, 마음이 멀면 같은 서울, 아니 옆집에 살아도 먼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영전에 향을 올리고 고인을 위해 반야심경을 마음으로 조용히 올렸다. 부디 극락에 드시기를 기원하며 남은 가족들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축원했다.
문상을 마치고 최 이사님을 보니 얼굴이 많이 지쳐 있었고,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얘기할 때는 젖은 눈에 다시 눈물이 넘쳐흘렀다.
누구나 이별은 아프고 슬픈 일이다. 그에게는 한동안 힘든 일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로도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했으니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를 위로했다. 사람은 남을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 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이 부모 자식 사이란 걸 또 한 번 느꼈다.
문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마음이란 이렇게 늘 생각하고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서로를 챙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아침의 ‘예감’이 왠지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서로 마음이 가까우면 서울과 부산도 한 걸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기원한다.


벌님 영가
오늘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도반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도반은 오래전부터 관절이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벌침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지난날이 생각났다. 10여 년 전에 나도 이와 같이 퇴행성관절염을 앓았다. 그때 아랫집에 사는 아가씨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배운 벌침이라며 아파하는 나를 치료 해 준 적이 있다. 처음엔 모르고 시작했는데 벌들은 침을 놓고 난 후 두 시간 내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벌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불쌍하고 가슴이 아파 더는 할 수 없다며 중단했지만 이미 몇 십 마리의 벌들이 죽은 뒤였다. 그해 나는 우리 절에서 매년 해오던 참회 산림법회를 일주일 내내하게 되었을 때 ‘대원성 복위 벌님 영가’로 축원을 올리며 참회기도로 용서를 빌었다. 벌침선생은 “벌은 어차피 오래 못가 죽을 것인데 이렇게 남의 아픔을 치료해 주니 얼마나 좋은 일 하고 가느냐?”고 했다. 생각하기 나름인지 몰라도 나는 불자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결코 편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일주일 내내 기도 시간마다 스님의 큰 목소리로 ‘벌님 영가’를 부르니 많은 신도들이 쉬는 시간에 내게 묻기도 했다. 자기네들도 염소며 닭이며 개 또는 소까지도 집에서 키우던 짐승들을 잡아먹었던 역사를 고백하며 영가 축원으로 올리고 싶다고 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고부터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어떤 생명이라도 함부로 할 수가 없음과 미안함이 자비심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인과는 꼭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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