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점(梅花點)→무량보주(無量寶珠)

‘무량보주’란 말은 ‘무량한 보주’라는 일반적 표현을 전문 용어로 만든 것이다. ‘무량한 보주’란 일반 어휘요, ‘무량보주’라면 용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전문용어이므로 그 내포하는 바가 크다. 즉 하나의 보주로부터 무량한 보주가 생기는 과정을 보아왔는데 이미 이란 조형이 결국 보주에서 ‘제1영기싹’이 생겨나 그 각각의 ‘제1영기싹들’이 ‘보주’가 되는 것을 보아왔으며, 바로 매화점이라 잘못된 용어가 무량보주가 되어 마침내 태극이 되는 것이니 참으로 조형언어의 세계는 불가사의할 뿐이다. 그 전개과정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보주의 단면도와 입면도 등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필자가 찾아낸 조형언어의 성립과정을 충분히 그려서 보이고 있으므로 잘 살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그림 ①)

여기에서 앞 회에서 증명하여왔듯이 제1영기싹이 보주가 되는 ‘고차원의 변화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불가사의하고 고차원적인 변화과정이 바로 ‘화생(化生)’이다. 화생이란 어려운 용어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이처럼 엄청난 오류가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용어가 중요한 것은 용어에 풍부한 개념을 부여하기 때문이며, 올바르지 않은 용어는 아무 내용이 없는 올바르지 않은 사어(死語) 즉 죽은 용어이다.

보주란 삼천대천세계에 충만한 대생명력을 압축한 조형이요, 삼천대천세계에 충만한 여래로 표현한 것이 바로 삼천불전(三千佛殿)인 것처럼 여래라는 존귀한 존재는 바로 보주와 통한다. 그러므로 여래=보주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런 진리는 문자언어로 기록한 경전에는 없으며, 조형언어로 나타낸 조형미술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정수리에서부터 무량한 보주가 생겨나며, 보살의 보관에서는 줄줄이 보주가 생겨나는 조형이 성립한 것이며, 이러한 조형은 여래와 보살의 정신, 혹은 영혼으로부터 발산하는 강력한 영기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일반 서민의 여인이 쓰는 족두리에도 보주가 연이어 나오는 조형을 명징하게 볼 수 있다.(그림 ②)

여래가 바로 무량보주라는 것은 이미 나의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증명했으므로 읽어보기 바란다.(kangwoobang.or.kr 블록 ‘한국미술 올바로 읽기’ 35회~38회를 참고할 것) 불화에는 하늘에 무량보주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삼천대천세계에 대생명력이 충만하다는 것이고, 동시에 무한한 여래가 충만하다는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단청에는 예부터 지켜온 조형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즉 중앙의 보주에서 사방팔방으로 각각 직선으로 연결된 보주들이 있다. 그것은 중앙의 보주에서 사방으로 생겨나는 무량한 보주들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조형을 필자가 매화점에서 무량보주란 용어로 바꾸어 지은 것이다. 그런데 동국대 박물관 기획전에 출품된 개인 소장 조선 전기의 작은 불화에서 검은 하늘(玄天)에서 바로 중앙의 보주에서 선으로 연결된 보주들의 조형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그림 ③-1, 그림③-2)

그러므로 지난 연재에서 불교 건축의 모든 부재의 마구리에 검은 색(玄色)을 칠하고 흰 무량보주를 그려 넣은 까닭을 알았다. 즉 건축의 지붕부는 천공을 가리키며 그 천공에 무량한 보주들로 가득 찬 것을 나타낸 것임을 알았다.

지금까지 매화점이 왜 올바르지 않으며 왜 그런 조형이 무량보주인가 증명하여 왔는데, 실은 이 연재를 정독하여 읽어보면 그 전체가 보주에 관한 설명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주란 그만큼 상징성이 커서 몇 회에 걸쳐 설명하기 어렵다. 불교미술에서 용(龍)모양 영기문과 연꽃(蓮花)모양 영기꽃을 올바로 파악해야 보주가 보이기 시작한다. 즉 용 자체가 보주이며 그 큰 보주에서 무량한 보주가 생기며, 영기꽃의 씨방에서 역시 고차원의 변화과정을 거쳐 무량한 보주가 생기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이나 〈반야바라밀다심경〉, 그리고 〈화엄경〉 등 불교경전을 이해하려면 평생 걸릴 수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불교의 조형미술 역시 불교사상의 핵심을 간략히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역시 평생 걸리면서 그 핵심에 다가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 자신도 그런 과정에 있음을 말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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