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와 아사세

유사한 오이디푸스·아사세 설화
세간은 ‘친족 살해’ 주목하지만
‘앎의 비극’ 메시지 귀 기울여야

인과의 통찰과 감성적 사유 없이
합리성만을 강조한 지식은 한계
자신의 근원 부정하는 모순 가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빈비사라왕과 왕비 위제희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아사세 사이에서 일어났던 왕사성의 비극을 배경으로 청정한 땅, 정토로의 구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펼쳐지고 있다.

아사세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이라는 소재 때문에 일찍부터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의 유사성이 주목되었으며,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착안한 ‘아사세 콤플렉스’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정신분석학은 두 이야기의 ‘부친살해’와 ‘근친상간’, 또는 ‘모친살해’에 주목하고 있지만, 두 이야기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은 무엇보다 인간의 앎과 그 앎에 의해 초래된 비극이다.

▲ 프랑스 루앙 박물관에 소장된 샤를 프랑수아 질라베르의 1824년 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딧세이아〉에서 가져온 신화를 토대로 하였지만 오이디푸스의 개인의 비극적 운명과 신탁의 필연성, 그리고 인간 지식의 한계를 비극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래에 태어날 아들이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신탁의 내용이 실현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아기를 불쌍히 여긴 신하에 의해 오이디푸스는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인도되고, 왕가에 입양되어 왕자로 성장한다.

양부모를 친부모라고 알았던 오이디푸스는 성장한 후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알고는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난다. 테베로 가는 길에서 사소한 시비로 한 남자를 살해하게 되는데, 그 남자가 바로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자신의 고향 테베로 들어간다. 그 때 테베의 왕비 이오카스테, 즉 오이디푸스의 생모는 테베를 어지럽히는 반인반수의 괴물 스핑크스를 죽이는 자가 나타나면 그와 결혼하여 왕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친어머니인 왕비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낳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으나 어느 날 역병과 가뭄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신탁을 묻는다.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한 악한이 이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 악한이 누구인지 밝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왕비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파내고 방랑길에 오른다.

‘지식은 곧 권력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처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에게 권력을 가져다준 원천은 바로 지식이다. 오이디푸스는 신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간적인 지식을 통해 왕이 되었고 지혜로운 왕으로서 훌륭하게 나라를 통치했다. 20년이 지난 후, 다시 위기에 처한 테베를 구하기 위해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할 때에도 그는 신적인 지식이 아니라 보고 듣고 추리하는 자신의 인간적인 지식에 의존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아는 현명한 왕은 그가 정말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다. 바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걸으며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인간’이라는 자기인식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처럼,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수수께끼,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악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오이디푸스 자신을 향하는 질문이었다. 테베의 불행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근친살해와 근친혼을 행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결과 한때는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지식이 이제 왕위에서 물러남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다준다. 테베를 위기에서 구하여 왕이 되도록 한 지식의 추구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맹목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각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파냄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단죄한다.

▲ 빈비사라왕과 아사세의 비극을 다룬 ‘관경서분변상도’. 오이디푸스와 아사세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친족살해’ 등 자극적인 소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 정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앎의 비극’에 대한 메시지다.
〈관무량수경〉 서분의 이야기는 아들인 아사세보다 어머니인 위제희 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왕사성의 비극의 중심은 아사세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과, 자기 운명에 대한 아사세의 앎이 비극의 첫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늦도록 아들이 없었던 빈바사라왕은 비프라 산에서 수행하는 선인이 3년 뒤에 왕자로 태어날 것이라는 어느 점성가의 이야기를 듣고 조급한 마음에서 사람을 시켜 선인을 죽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 위제희 부인은 태기를 느낀다. 왕자가 태어난 후, 아이가 원한을 품고 있다는 관상가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 왕은 높은 누각에서 갓난아이를 떨어뜨리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솜이불을 누각 밑에 쌓아둔 위제희 부인의 모성애와 지혜 덕분에 살아난 아이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 빈비사라왕과 위제희 부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아사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자기를 죽이려한 부왕의 비밀을 알게 된 아사세는 원한에 가득 차서 왕위를 찬탈하고 부왕을 깊은 궁전에 유폐시킨다. 유일하게 면회가 허락된 위제희 부인은 몸에 꿀 반죽을 바르고 매일 왕을 찾아갔다. 왕비의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한 왕은 기사굴산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간절히 기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목련존자에게 팔계를 받고 부루나존자의 설법을 들은 왕은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으나 그 사실에 대노한 아사세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월광과 기파의 간언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위제희 부인은 궁궐에 유폐된 이후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구원을 청했다. 그 간절한 염원에 응하여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위제희 부인 앞에 나타나셔서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한편, 아버지를 죽인 대역죄를 범한 아사세는 온몸에 흉측한 부스럼이 생겨 고생하자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보호하는 훌륭한 왕이 되었다.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는 깊은 궁궐에 유폐된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기도에 응하여 나타나신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신통력으로 위제희 부인 앞에 나타난 부처님과 부처님을 바라보면 합장하고 서 있는 위제희 부인과 시녀들의 모습이 정성스럽기 그지없다. 이 때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 즉 십육관법은 ‘관경십육변상도(觀經十六變相圖)’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아사세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은, 아사세의 벗이자 부처님의 사촌인 데바닷다가 왕사성의 비극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아사세의 왕위 찬탈은 데바닷다의 교단분열의 시도와 결합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사에서 가장 악한 인물로 그려지는 데바닷다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원리주의에 입각해 종교개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그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판했던 조목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교단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개인적 욕망보다 수하좌, 분소의, 걸식에 충실했던 초기 출가수행자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하는 원리주의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데바닷다가 보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만든 계율조차 위반하는 무원칙적 인물, 비합리적인 종교지도자였다. 따라서 그 교의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불교교단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결론이었다. 그런 점에서 데바닷다는 비록 부처님 시해를 도모한 대역죄인이지만, 원리원칙에 입각한 합리적 지성을 대표한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운명 자체에 의해 결정된 것과 달리, 왕사성의 비극은 빈비사라왕의 악행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따라서 아사세의 부친살해와 모친유폐는 빈비사라왕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의 과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합리성은 계속되는 복수를 정당화할 뿐, 그 악행의 고리를 깨부수지 못하고 오히려 아버지를 살해하는 비극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만든 계율을 위반하는 지도자를 제거하려는 데바닷다의 교단분열 시도 역시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아사세뿐만 아니라 데바닷다에게도 합리성은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이 작품은 서양의 이성주의와 그 한계에 대한 최초의 경고로 해석되고 있다. 오이디푸스에서 자기 인식은 비극적 삶의 출발점이지만 아사세의 이야기에서 자기 인식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세나 데바닷다의 지식은 인과에 대한 통찰과 그 구원에 관한 종교적인 앎에 미치지 못하는 합리성의 입장에서 파악된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적 지식론에 따르면,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지식은 파멸을 가져올 뿐이다. 오이디푸스에게도, 아사세에게도, 데바닷다에게도 그것은 더 큰 비극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오이디푸스 왕〉이 스스로 운명과 그 운명이 초래한 비극적 고통을 떠맡는 자기 결정을 통해 인간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면, 〈관무량수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 다음 연재에서 〈관경십육변상도觀經十六變相圖〉를 통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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