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이 상주하는 북한산 이야기-9. 향로봉

향로봉은 북한산의 족두리봉과 비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북한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봉우리 모양이 향로처럼 생겨서 향로봉이라 불린다고도 하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절, 향림사의 뒷봉우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구파발 방면에서 보면 사람 옆모습을 닮았다 하여 인두봉이라고도 하고,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하여 삼지봉이라고도 한다.

안녕? 난 향로봉 소나무. 500년을 살았어. 500년을 살았다고 하니까 내가 무척이나 클 것 같지만, 미안, 난 그렇게 크지 않아. 다른 소나무들과 비슷하지. 왜냐구? 그게 바로 나의 장수비결이야. 너무 크지 않는 것. 그래야 마구 베어가는 사람들한테서 나를 지킬 수 있지. 이런 지혜는 할아버지한테 배웠어. 아버지는 200살밖에 못 사셨어. 아버진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키를 키웠지. 이 높은 데까지 누가 와서 베어갈까 싶었던 거야. 하지만 산 아래에 있는 큰 소나무들이 다 베어지고 나무가 더 필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올라 왔단다. 이미 키를 다 키워놓은 아버지는 숨지도 못하고 잡혀가신 거지. 그래서 난 할아버지 말씀을 잘 들었어. 잘생기지도 않고 키도 크지 않게.
내가 아주 어린 묘목이었을 때, 이 바위에 뿌리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단다. 그때 내가 쉽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셨지. 우리는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내리느라 거의 모든 힘을 쏟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어서 봉우리에 살게 된 것을 운이 좋다고 여겼지. 능선 아래로 보이는 넓은 평야와 평화롭게 흐르는 강, 강 끝에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하늘은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들판의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지.
우리가 주로 서쪽을 바라본 이유는 할아버지가 바다를 좋아해서야. 할아버지는 바다와 하늘의 빛깔만으로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시는 분이셨어. 할아버지가 뿌리에 단단히 힘을 주라고 하는 날에는 큰 바람이 불며 세찬 비가 오곤 했지.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오면 할아버지는 새들과 짐승들에게도 안전한 보금자리로 돌아가라고 큰 소리로 일러주셨지. 그러면 짐승들은 서로서로 이야기를 해주며 산 아래에 있는 나무들에게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지. 가끔 산 아래에 있는 키 큰 나무들이 허리가 뚝 부러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바람이 얼마나 세게 달려오는지 보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아무튼 우린 다른 나무들보다 높은데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심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비바람에도 더 잘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 내 어린 시절은 하루 종일 할아버지와 함께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단다. 날아가는 새들에게 가지를 내어주며 쉬는 새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도, 쫓기는 짐승들을 숨겨주며 그 보답으로 산속의 소식을 듣는 것도 모두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란다.

할아버지가 아주 젊었을 때 저 강가는 평화롭게 물고기를 잡거나 물자들을 실어 나르는 길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전쟁터로 바뀌기 일쑤였다지. 참으로 오랫동안 그렇게들 싸웠다더구나. 그러자 사람들이 이 산으로 숨어들기도 하고, 군사들이 밀려오기도 하면서 이 산에 있는 짐승이나 나무들도 많이 죽었단다. 그러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살게 되면서 이 산속에도 많은 건물이 지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게 되었다지. 여기저기서 크고 멋진 나무들이 베어져 건물 짓는 데로 이용되고, 또 작은 나뭇가지들은 땔감으로 베어져갔어. 잘 생긴 소나무들이 먼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는 잘생기지도 않고 키도 크지 않게 관리를 하신거야. 키는 자그마하고 가지는 낮게.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새들이 편안히 쉬고, 짐승들도 안심하고 숨어 들었던거야.
산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시끄러워졌고, 거기에 견디지 못한 짐승들 대부분이 산을 떠났어. 가끔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느라 사람들과 싸우는 짐승도 있었지만, 사람들이란 웬만해선 두려워할 줄 몰랐지.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갑자기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고, 돌을 깨고 성벽을 쌓고 절과 병사들의 숙소를 지었어. 북한산성을 쌓기 시작했던 거야. 아 ! 그때 우리들은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너무 시끄러워서. 사람들은 소란스럽기만 한 게 아니었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건 모두 가져갔어. 그래서 우리들 목숨은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아주 위험했지. 우리는 사람들이 시퍼런 톱이나 도끼를 들고 다가오기만 해도 몸을 움츠리고 그들이 지나가기만 빌다가, 그들이 지나가면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 그렇게 불안하게 지내던 날, 아버지가 잘려 나가신 거야. 사람들 눈에 띌 만큼 늠름하고 잘생기신 때문이었지. 난 그때 몹시 슬펐지만 목을 움츠리고 슬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어. 그날부터 나는 더욱 더 나를 낮게 가꾸어 갔어. 그러다보니 외모는 그저 그랬지만 마음속에서 겸손이 자라나게 되었어.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마음속의 겸손이, 화려한 외모보다 훨씬 더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걸 알게 됐어. 내가 겸손해지자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나를 좋아했고, 나를 도우려고 마음을 써 주었거든. 그렇게 백년 쯤 살았을 때 내가 뿌리 내리고 있는 봉우리가 내게 말을 걸었지.
“네가 내 머리위에 있으니 내 몸이 향기로워지는구나. 나는 너를 머리에 인 향로가 될 테니 너는 향내를 뿜어내는 귀한 향이 되어라. 그래서 이 산에 와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성취되도록 도와주자.”
난 봉우리가 한 말에 감동해서 더욱 더 깊게 뿌리를 내리며, 향로 위에 켜진 향처럼 내 몸을 향기롭게 가꾸려고 노력했어.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봉우리와 나는 한 몸이 되었고, 북한산에 오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로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단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