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와 범로는 이처럼 먼 것인가”

신묘한 경계 열었던 초의차

추사 예술혼·불교적 사유 심화시켜

나날이 새로워지는 기쁨 ‘충만’

 

▲ 〈나가묵연첩〉 추사 친필본

 

추사는 강상에 머물며 불경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는 1850년 2월 보름, 초의에게 보낸 편지와 〈완당전집〉 〈여초의〉 31신에 “〈법원주림〉백 권을 얻어 좋은 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나가묵연첩〉에 수록된 편지의 말미엔 “승연노인 지월십일(勝蓮老人 至月十日)”라는 간지가 있는데, 지월(至月)은 11월을 이른다. 따라서 이 편지는 대략 1850년 11월 10일에 쓴 것이 분명하고,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호(號) 역시 강상시절에 사용했던 것이라 짐작된다. 〈완당전집〉〈여초의〉 및 〈영해타운첩〉, 〈나가묵연첩〉에 수록된 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체의 소식이 미치지 않으니 정계(淨界:번뇌가 없는 깨끗한 세계)와 범로(凡路:번뇌가 가득한 속된 세계)는 이처럼 먼 것인가요. (이렇게 그대와 멀어진 것)또한 사람이 스스로 막은 것이지 산하가 가로 막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므로 차 끓이는 일에 마음을 써서, 그대는 평소 깊고 깊은 열진 속에서도 생각에 매임이 없는 것이 원래 당연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근래 추위에 수행하는 그대의 자리는 따뜻하고 편안하지요. 염려가 큽니다. 이 몸은 못나고 어리석기가 옛날과 같은데, 강상에 돌아와 머물며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이것은)번뇌 망상에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법원주림〉 백 권을 얻어 좋은 날을 보내고 있는데, (스님이)곁에서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나머지는 인편 때문에 대략 알리며 이만… 승연노인, 11월10일

(一切聲聞不及 淨界凡路如是懸絶歟 抑人之自阻 山河非能阻 以此懸懸於竹?石淙之間 知師無庸結想於十尺熱塵中 固宜矣 近寒團蒲暖安 念切 此頹癡如昔 來留江上 未及歸山 到底惱業 但得法苑珠林一百糾好作消遣 恨不使傍證耳 餘?便?申 不宣 勝蓮老人 至月十日 )

 

당시 초의의 소식이 한동안 끊겼던지, 그를 향한 추사의 일갈은 “정계(淨界:번뇌가 없는 깨끗한 세계)와 범로(凡路:번뇌가 가득한 속된 세계)는 이처럼 먼 것인가”였다.

서로가 멀어지고, 소식이 막힌 것은 산하(山河) 탓이 아니라 초의 자신이 막은 것이란다.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끈끈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기(知己)의 범속을 초월한 경지를 인정했던 추사는 “그대는 평소 깊고 깊은 열진 속에서도 생각에 매임이 없는 것이 원래 당연하다”고 하였다.

자신의 벗, 초의가 생각에 매임이 없는 경지를 이룬 것은 바로 전다삼매(煎茶三昧)였다는 그의 확신은 “차 끓이는 일에 마음을 써서”라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맑고 시원한 차의 신묘한 경계를 열었던 초의차는 추사의 완숙한 예술혼과 불교적 사유를 더욱 심화시킨 매개물이기에 따뜻하고 진솔한 성의가 담긴 초의의 편지나 차를 기다리는 추사의 마음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한편 추사가 편지를 보냈던 11월은 한겨울이다. 이런 엄동설한 중에 수행하는 초의의 안부가 궁금했던지 “추위에 수행하는 그대의 자리는 따뜻하고 편안하지요” “염려가 크다”고 하였다. 번뇌의 열업에 빠진 자신은 괄목(刮目)할만한 성취도 없이 “못나고 어리석기가 옛날과 같다”고 한 것은 분명 그의 겸손함이 드러나지만 뜻이 통하는 벗에게 부려보는 투정은 아닐까.

강상에 머물던 추사는 외형적으론 답답한 나날을 보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불경 연구하고, 차를 마시며, 가장 학인(學人)다운 여유를 즐겼던 시기였으니 “〈법원주림〉 백 권을 얻어 좋은 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의 말은 벗을 안심시키기 위한 희언(戱言)만은 아닌 듯하다.

그의 아쉬움은 오직 초의와 함께 불경을 참증(參證)할 수 없는 것뿐이라니 그의 일상은 분명 나날이 새로워지는 기쁨으로 충만(充滿)되었던 시기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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