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부전의 동자들

불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명부전
시왕 옆에는 항시 동자상 있어
인간이 가긴 선악의 業을 기록
불교 경전에는 동생·동명신 명시
교리보다 죽음 관련 존재로 인식


▲ 경남 김천 봉곡사 명부전의 시왕. 시왕의 동자들은 시왕을 보좌하고 인간이 저지른 선악의 인과를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사찰 안의 여러 전각 가운데 명부전은 명부(冥府), 다시 말해 저승세계를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이곳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을 뒤로 미루고 천상에서 지옥까지 육도의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위대한 서원을 세운 대원력 대자비의 보살이다.

그런데 왜 지장보살이 명부전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명부전의 원래 주인공은 도교의 신인 시왕들이었다. 조선 초까지 명부전에는 시왕이,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이 주존으로 모셔져 각각 다른 종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염라대왕도 그 중 하나이다. 유명도에 비해 그는 서열 5위에 불과한데, 너무 너그러워 죄 지은 망자들을 계속 용서하자 그의 지위를 강등시켰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특별한 변화가 일어났다. 지장보살과 시왕이 함께 명부전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사회의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들의 종교적 염원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에게 지옥문을 열어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의 자비보다 더 강력하고 더 절실한 것을 없었으리라.

그 결과 조선후기에 세워진 명부전은 불교와 도교의 신들이 혼거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지장보살은 이제 지옥세계를 구제하기 위해 명부전에 입성한다. 지장보살과 그를 협시하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명부전의 중앙에 위치하고 그 좌우에 주존의 위치에서 물러난 저승세계의 대왕 10명의 시왕이 차례로 배치된다. 그들은 망자가 저승세계에 오면 전생에 지은 업을 판단하여 다음 생에 태어날 세계를 결정해왔지만 이제는 예전 같은 위력을 발하지 못한다. 곧 지장보살의 대자비로 지옥을 텅 비울 테니까.

이렇게 하여 불보살과 도교 신들의 이종 교배와 같은 동거가 시작되었다. 장군 두 명은 여전히 험상궂은 얼굴로 명부전 입구에서 저승세계를 지키고 있고, 판관은 시왕들을 대신하여 죄인을 심판하고 있으며, 녹사도 부지런히 문서에 심판의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시왕들 옆에 그들의 시중을 드는 동자들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하여 거의 서른 명에 육박하는 대가족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장대한 세계 가운데 저승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시왕들 곁에 서 있는 동남동녀들이다. 어찌하여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들이 그처럼 음습하고 긴장이 흐르는 공간에 있는 것일까? 명부전에서 만나는 동자상들은 귀엽거나 사랑스럽기보다 조용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때로는 무표정하게, 때로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다소곳이 서 있는 목동자의 면면이 하나같이 다정스럽다”는 어느 전시회 기획자의 말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너무 당연해서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관념들 중 상당히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근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관념인 경우가 종종 있다. 어린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라는 말조차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소파 방정환에 의해 창안되지 않았던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늙은이’나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방정환의 주장을 뒤집어보면 전근대시기에 어린이들의 열악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방정환의 글을 보면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어린이 동무들에게’ 中 방정환. 〈어린이〉 1924. 12)라는 놀라운 표현을 읽을 수 있는데, 실제로 전근대사회의 어린아이들은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는 남존여비, 장유유서와 같은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 위계질서의 최하위에 있었던 어린아이들은 일방적인 봉사와 도덕적인 의무를 요구받았다. 양반 자제들의 경우,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아이들의 정신발달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 관계에서도 아이들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으며, 다시 말해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해야 마땅한 대상으로서 ‘아이’는 아직 인식되지 않았다.

명부전의 동자들은 인간 세계의 저편, 저승세계에서 명부의 왕들을 시중드는 아이들이다. 저승사자가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두려운 존재라면 이 아이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그들은 강력하고 개성이 강한 존재들 틈 사이에 서 있는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어린이는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근심 걱정 없고 순진무구한 존재라는 생각이나, 어린시절은 언제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낙원 또는 고향이라는 관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명부전의 동자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존재이다. 산 사람을 저승세계로 끌고 가는 저승사자나 전생의 업을 판단하고 내생을 결정하는 시왕들처럼 강력하고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고통에서 구제해줄 지장보살처럼 자비로운 존재도 아니다. 저승사자들에 이끌려 심판관인 시왕들 앞에 선 영가들이나 사후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살아생전 업장을 소멸시키려고 참회 기도하는 사람들의 눈에 시왕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시동들이 들어올 리 없다.

그들의 관심사란 자신의 내생을 결정하는 재판관인 시왕의 너그러운 판결이나 악도에 떨어지더라도 대자비로 구원해주시는 지장보살님의 자비심일 것이므로.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왜 그토록 엄숙하고 심각한 공간인 명부전에 어린 동자들을 두었을까? 아이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시왕 곁에서 붓이나 종이, 꽃, 동물들을 들고 서 있다. 그들은 원래 도교에서 시왕을 보좌하고 시중을 드는 시동(侍童)이지만, 불교경전에서는 동생신 혹은 동명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동생신은 사람의 오른쪽 어깨 위에 위치하여 사람들의 나쁜 행동에 대해 평가하는 일을 맡고 있는 여자아이이고 동명신은 사람의 왼쪽 어깨 위에서 좋은 행동을 기록하는 남자아이이다. 지장탱화에는 선동자와 악동자가 좌우 협시로 시립해 있거나 지장보살의 어깨 위에서 상체만 드러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고려시대의 명부도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선시대 불화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18~19세기에 제작된 지장보살도 속에는 상당히 크게 묘사되어 있다. 선악동자(善惡童子)는 선과 악이라는 행위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돈황에서 출토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왕경도권〉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승세계에 있는 어린아이’라는 관념이 중국적 유래를 갖고 있으며 상당히 이른 시기에 정형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정갈하게 묶어서 말아 올린 중국식의 쌍상투머리와 중국식의 의복을 입고 있지만, 가끔 조선의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고 두루마리를 입고 있는 모습도 나타난다. 수자사 동자상은 신체 비례 중 머리를 크게 만들어 어린아이다운 신체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재미있게도 옷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는데, 당시 아이들이 그들에게 맞지 않는 어른들의 옷을 입고 있었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다양한 지물에는 붓과 두루마리, 꽃과 과일 뿐 아니라 거북이와 새, 그리고 사자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불교 또는 도교, 심지어 민간신앙의 상징으로서, 동자들의 역할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연꽃이나 연잎을 든 동자상은 연화화생(蓮華化生)의 상징이며, 과일이나 술병을 든 동자상은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거북이, 사자, 학, 호랑이, 봉황 등 신령스런 동물들을 안고 있는 동자상은 이들이 천계의 존재임을 상징하는데, 민간신앙의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도 스며들어 있다.

동자들의 역할과 관련해 중요한 지물은 붓과 두루마리, 벼루와 같은 필기구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요즘처럼 아동의 학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왕을 보좌하는 일과 관련된 도구들이다. 이 시동들은 비록 어떤 결정권이나 완력을 갖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살아생전 행한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고 보관했다가 시왕들에게 보고하고 시왕의 판결을 기록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대사회의 어린이들처럼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을 위해 봉사하는 아이, 다시 말해 노동하는 아이이다.

전통사회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동에 종사했다. 그들은 보호받고 배려받기보다 ‘작은 어른’으로서 어른과 비슷하거나 조금 약한 강도의 노동을 담당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 전체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아이들도 상당히 어린 시기부터 소를 치거나 이삭을 줍고 어른들의 시중을 들면서 경제활동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이 저승세계에서 명왕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에게 주변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을까? 명부전 또는 지장전이라고 불리는 전각은 불전 가운데서도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명부전의 동자상은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반영하고 있는 선재동자나 문수동자와 같은 존재라기보다 죽음과 관련된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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