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이 상주하는 북한산 이야기 - 8.원효봉

원효, 불법 널리 펴기 위해
전국의 상서로운 기운 갖은 곳 찾아
민중불교·불국토 서원 세우며 정진한 곳


원효봉은 해발 505m의 봉우리로 경기도 고양시에 속한다. 원효대사가 수행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주차장에서 또는 북한산 아래서 원효봉을 이루는 산을 올려다보면, 부처님이 앉아계신 모습이 보인다. 그 위로 원효봉의 봉우리는 닫집처럼 지붕을 이루었고, 아래쪽으로 치마바위는 좌대를 형성하였다. 치마바위는 원래 원효암 여산신(女山神)의 치마였는데, 이것으로 자리를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여 연화좌(蓮華座)를 이루었다고 한다. 연화좌는 연꽃모양의 대좌로 연화대라고도 불리며, 불·보살의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걸음을 멈추고 길 가에 앉아 쉬고 있던 원효 스님은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여러 능선 사이로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의 햇빛을 혼자서만 받고 있는 듯, 그 봉우리는 온통 밝은 기운으로 가득했다. 봉우리는 닫집처럼 지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아래쪽으로는 널찍한 바위가 놓여있는데 그 모습이 꼭 연화대를 빼어 닮았다. 게다가 그 봉우리 밑 능선은 부처님이 앉아계신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영락없는 부처님의 처소였다. 순간, 눈을 반짝이던 원효 스님은 미처 한숨을 돌릴 틈도 없이 서둘러 일어나 산으로 향했다. 그 봉우리로부터의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스님을 이끌고 있었다. 여러 날 갈아입지 못한 듯 옷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고 짊어진 바랑은 해졌으나 그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고, 움직이는 발걸음 마다 당당하고 힘이 있어 조용하던 산 속이 흔들리는 듯 했다. 원효 스님은 이 땅에 불법이 널리 퍼질 수 있게 해달라는 원을 세운 후 전국의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곳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경상도 금정산 봉우리에서 여러 달, 충청도 가야산 봉우리에서 다시 여러 달을 쉼 없는 정진 이었다. 이제 한강 일대에서 수행하기에 적당한 봉우리를 찾아 북한산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동안 신라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불교일 뿐 백성들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경 또한 어려운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할 방법도 없었다. 원효 스님은 안타까웠다. 이것은 부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는 신라불교가 부디 민중 속으로 자리하게 되길 염원하며 불법을 통해 그들과 하나 되는 방법을 찾았다. 여느 스님들과 달리 좋은 옷도, 산해진미도 마다하고 저자 거리로 나가 백성들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춤추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과 함께 잠들고 깨어났다. 원효는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부르며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반 백성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알려준 것이었다. 비록 불경을 읽지 못하더라도 이 주문만 되풀이해서 외우면 누구나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불성이 존재하며 귀하고 천한 생명이 따로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서서히 백성들의 마음에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원효 스님은 또한 경전에 해석을 달고 뜻을 풀어 쉬운 말로 다시 쓰는 일을 하는 틈틈이 산속의 봉우리를 찾아 수행했다. 원효는 한 지역에서의 기도를 마치고 백성들에게 불법을 만나게 해주고 나면 곧 다른 기도처를 찾아 떠났다.
그동안 원효 스님이 수행하던 암자만도 전국에 수 십 개였으며, 앉아서 참선하던 봉우리 또한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원효 스님이 수행처로 삼은 곳은 한결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곳이었다. 너무 험하거나 거친 봉우리 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포용의 힘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들판에 우뚝 솟아 산세가 당당한 가야산 봉우리가 그랬고, 금정산의 봉우리 또한 독보적이고 품위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봉우리라야 자신과 함께 뜻을 펼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침내 원효 스님은 북한산에서 한 봉우리를 찾아냈고 그곳을 향하여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분명 산 아래에서 올려다 본 그 봉우리는 그런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계곡을 옆에 두고 바위를 타고 올라 단숨에 봉우리 정상에 다다랐다.
과연 봉우리는 당당했다. 봉우리 정상에는 치마를 펼쳐 놓은 듯한 넓은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보았던 연화대 모양의 바위였다. 그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북한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발 아래로 굽이치는 한강을 품고, 위로는 바위 능선을 두루 감싸 안을 듯 넉넉한 이 바위 봉우리가 원효 스님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바로 이곳이었다. 마치 봉우리도 오랜 세월 동안 원효 스님과 같은 원을 세우고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함께 기도하리라. 민중불교가 실현되고 신라가 불국토가 되는 그 날까지 정진 또 정진 하리라, 북한산 봉우리 위에 앉아 원효는 다짐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원효 스님을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고, 사람들은 원효 스님이 앉아 수행하던 봉우리마다 ‘원효봉’이라 이름 지어 그의 업적과 사상을 기리게 되었다.
원효 스님은 그의 이름처럼 ‘진리의 첫새벽’이 되어 민중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남긴 〈대승기신론소〉 나 〈금강삼매경론〉등 위대한 저서들은 당시의 신라는 물론 당나라와 일본의 불교에 까지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서양과 유럽에서 원효 스님의 사상과 저술을 연구하고 있다하니 과연 그는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 불교를 발전시킨 큰 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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