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문제라도 한생각에 완화가 되고 뒤집어집니다

▲ 그림 최주현

일부러 잡아다가 방생한다는 것이…
문) 예전에 아는 사람이 방생하러 간다고 하기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 제 생각엔 고기를 일부러 잡아다가 방생한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는데 이런 방생도 부처님 뜻에 맞는 것인지요.

답) 그건 놀부의 짓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에만 넣으면 사는 줄 알지 마십시오. 물도 몫몫이 다 있어요. 여러분이 볼 때는 물이면 물, 그냥 다 똑같은 줄 아시지만, 우리가 또 어떤 동네라도 영등포가 있고 종로가 있듯이, 또 그 어구에 들어가면 지게꾼도 “야, 너 여기 어딘 줄 알고 들어와? 여기 구역은 내 구역이야.” 이렇게 합니다. 이런 거와 마찬가지로 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통방통합니까.
그렇듯이 고기도 다 자기 자리를 알고 고향을 알고 그러기 때문에 방생을 한다고 고기를 다 집어넣으면, 개흙에서 사는 게 있고, 또는 모래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게 있고, 또 자기 고향 찾아서 가는 게 있고, 거북이도 그렇고 붕어도 그렇고 자기 고향을 다 찾아갑니다. 그러니 붙잡는 데 죽고 갖다가 놓는 데 죽고 또 담아 가지고 가는 데 죽고 갖다 넣는데 죽는단 말입니다. 또 갖다 넣으면 저 놀던 데로, 저희 집으로, 십 리가 되든 오백 리가 되든 그것은 한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집 찾아가느라고 허기가 져서 죽기도 하고, 또 그 물에 넣어서 병이 들어서 죽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게 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거기다 이름을 쓰고 온통 야단을 해서 거북이도 넣고 그러지마는 그거는 자기를 자기가 죽이는 일입니다. 달리 살생이 아니라 그게 살생이라고요. 그러니 얼마나 고생을 시키는 겁니까. 여러분이 그 원리를 몰라서 그렇지 그 원리를 안다면 너무 고생시키는 겁니다.

우리도 예전에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징용으로 끌어가서 탄광으로 붙잡아 갔거든요. 탄광으로 가 가지고서는 8·15해방 때 딱 놔놓으니까는 제 집 찾아가느라고 전부 그러다가 삼분의 이가 죽었습니다. 그 짝이에요, 딱 아주. 그러니 여러분이 방생이라고 해도 그건 방생이 아닙니다.
방생이라는 게 왜 생겼느냐 하면, 그전에는 많은 미꾸라지와 남생이, 뭐 자라, 새우, 또는 붕어 이런 것들이, 지렁이 뭐 할 것 없이 그냥 산중에도 비가 오면 쭉 널렸었어요. 그러면 스님네들이 어떡한 줄 아십니까? 깡통에다 물을 담아 가지고 거기다가 죄 흙바닥에서 펄펄 뛰는 거를 담아서 이렇게, 어떤 땐 손으로도 집고 그러는데 손으로 집으면 그 비늘이 없어지면 죽을까 봐 이거를 그냥 어떠한 그 체로다가 이렇게 해서 담아 가지고서는 쏟고 쏟고 이렇게 해 가지고 물에다 갖다 넣어 준 게 그게 아마 유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놀부처럼 잡아다가, 남 잘 사는 걸 잡아다가 그렇게 물에다 도로 놔 주는 게 방생이 아니라, 고기가 물을 잃고 바닥에 나와서 펄펄 뛸 때 그때 집어넣어 주는 게 방생이에요. 그리고 방생이 무슨 고기 방생만 해서 방생이 아니고요, 방생이라는 것은 어머니 없고 아버지 없는 고아가 정말 학교에도 못 가고 또 먹을 것도 못 먹고 고독하게 이리저리 저거 한다 할 때, 그때 참 보살펴 주는 게 방생이요 둘째, 또 사람이라는 것이 그 먹지 못해 부황이 나고 이럴 때 보태 주는 게 방생이요. 있는 것을 가서 내가 그냥 이름나게 하느라고 방송국에 갖다 내고 그러는 건 방생이 아니에요, 사실은. 특히 이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내 주머니에 오백 원이 있으면 가다가 차비가 없어서, 백 원이 없어서 앨 쓰는 사람이 있다면 백 원을 주시되, 주시는 사이 없이 주시면 그 백 원은 이자가 늘어서 삼백 원이 들어옵니다. 여러분은 그 묘법을 모르실 겁니다, 아마. 여러분의 마음이 우주 법계를 돌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걸 몰라서, 요 물질 하나만 가지고선 요러니 이게 나가서 이자를 붙여올 수가 있어야죠. 장속에는 금이 있어도, 이자를 붙이지 않는다면 그 금이 늘어나갑니까. 그러니 점점 좁아지고 그저 곶감 꼬치 빼먹듯 빼먹기만 하니 점점 줄어갈 수밖에요. 그러니 마음이 가난하면 집안도 가난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보면은 도와주고, 또 죽을 사람 있으면 살려 주고, 또 줄 사람 있으면 주고, 또 받을 게 있으면 받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남을 살리면 언젠가는 그 사람이 또 나를 살려 주게 됩니다.

또한 방생이라는 건 물질만 방생이 아니라 이 마음, 이 마음으로 주는 방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남이 괴로워 할 때 마음의 안위를 가질 수 있도록 마음을 내서 한마디 해 준다면 그것도 방생이요, 모든 게 마음 한생각을 잘 내 주는 것도 이게 방생입니다. 마음 하나하나 내 주는 게 전부 방생입니다. 이 도리를 공부하는 데에 전력을 다해서 이끌어 주는 것도 역시 방생입니다. 우리가 방생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두가 자기한테 하는 겁니다. 우연히도 없고 공짜도 없습니다. 다 자기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방생한답시고 억지로 잡아다가 놔 주는 놀부 방생을 하지 마시고 마음을 인의롭게 써서 전부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 버리는 마음, 일체 방생하는 마음으로 보살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가재가 살겠다고 길을 막고선 두 팔을 이렇게 벌리고선 오똑하게 서 있습디다. 길을 가니까 밟을까 봐. 그것도 살 양으로 하는 거죠. 내가 그걸 보고선 껄껄 웃었습니다. “야, 가재야. 너는 왜 가재라고 이름을 했지?” 하면서 “너도 살겠다고 그러는데 연쇄적으로 전부, 생명이 있는 거는 전부 살겠다고 이렇게 나서는구나. 내가 너를 왜 밟니? 미리 그렇게 좌절하고 그러지 마라.” 하면서 그 풀이파리로다가 이렇게 끌어서 물에다 넣어 주곤 지나갔습니다마는, 그게 방생입니다. 방생이 어떤 것이 방생인지 그것을 똑똑히 아셔야 합니다. 물이 강이나 어떤 연못이나 이런 데서 수증기로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거든요. 그래서 땅으로 스미는 것도 있고 강으로 흘러서 그 바다로 들어가는 물도 있고 연못에 그냥 고이는 물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절간에 그냥 많은 미꾸라지나 거북이나 새우 뭐, 이런 거 고기들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예전엔 물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많이 잡아 내기 때문에 그렇게 그렇질 않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마당에, 도량에 그냥 펄펄 펄펄펄 뛰었습니다. 그럼 스님네들이 “야, 방생하자.” 하고선 통을 들곤 주어 담아서 물에다가 갖다 넣어 주곤 했습니다. 그게 방생이지, 도대체 여러분은 왜 물에 가만히 노는 걸 잡아다가…. 자꾸 갖다가 사 가지고 넣으니깐 자꾸 잡아오죠. 그 어린 것들을 말입니다. 왜 그럽니까?

방생이라는 것은 만들어서 방생을 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방생을 하려고 놀부처럼 잡아다가 또 넣는 게 방생이 아니라 스스로서 남이 괴로워할 때 마음을 내서 한마디 해 줘서 바로 마음의 안위를 가질 수 있어도 그것도 방생입니다. 또 물질적으로 없어서 참 애들이 등록금을 못 낸다거나 이래도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걷어서 그 학비를 내게 해 주면 그것도 방생입니다. 물이 없어서 물 바깥에 나와서 펄펄 뛸 때에 물에 넣어 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마음 하나하나 내 주는 것도 전부 방생입니다. 우리가 방생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과 통신이 안돼서 답답해요
문) 공부를 하느라고 하는데도 부처님과 통신이 안돼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도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여러분이 겨울에 눈 온 거 보면 어떻습니까. 눈이 딱 묻혀서 함박꽃이 희게 피고 모두 덮여서 전후사를 다 덮었으니까 뾰족한 게 안 보이죠? 억울한 것도 보이지 않고 악초도 보이지 않고 선초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공부하는 분들이 가끔 나와서 눈 온 산을 볼 때 하얗게 덮었으니깐, 악초니 독초니 이런 나쁜 초식이 없고, 죄 덮였으니깐 인젠 공부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근데 인연줄이란 그게 아니라 알면 아는 대로 붙들고 공부를 해야 되겠죠. 왜냐하면 내 내면처에 공마당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공이 있어야 공을 치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귀신 방귀씨를 얻었느냐고요. 귀신 방귀씨를 얻지 못하면 공을 칠 수가 없거든요. 그 뜻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개개인이 못났든 잘났든 다 가졌습니다. 이거는 누가 억울하고 누가 덜 주고 더 주고도 없이 평등하게 그렇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따져 보면은 우리가 한 치도 움죽거릴 수가 없죠, 그게 없으면. 그래서 에너지 주장자라고도 하고 자불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 말을 왜 자꾸 하느냐. 거기에 미묘한 무엇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산다고 생각하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고, 뭐든지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다 한다고 생각을 하니깐 정신계에 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모든 마음이 둘 아니게 들지를 않는단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도 말했듯이 여러분이 다 죽어야 당신들을 본다, 이런 말을 했죠. 그래서 완전히 보려면 세 번 죽어야 당신을 본다고 그랬죠. 그러니깐 눈이 싹 덮이면 아주 깨끗하죠, 뭐. 조금 이렇게 납득이 돼서 좀 마당을 골라서 이 공 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야 그게 도리천하고도 둘이 아니요, 삼세하고도 둘이 아니요, 우주 천지 삼세가 다 둘 아니게 공굴려지는데 그게 공굴려지지를 않거든요. 하다못해 밭에 초식을 심어도 굵은 돌은 골라 내고 모두 호미로다가 김을 매서 이렇게 초식을 심어야 제대로 초식을 먹는데 하물며 일생을 공부해서 세세생생을 얻어라 이렇게 한 말씀을 그렇게 소홀히 듣지 마세요.

우리가 살면서 죽는다 산다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진데. 나를 버리면은 두려움도 무서움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나를 버리지 못해서 모든 결과가 벌어지고 말죠. 지금 우리 스님네들이나 여러분들이나 공부하는 율은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따로따로 이렇게 있지만, 공체로써 따로따로 있지만 공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움죽거리고 있는 사실은 그건 말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애가 죽게 됐다고 그러는데 보니깐 과거로 돌아가서 서류를 다 없애야 걔를 살릴 수 있겠더라고요. 그러니 저승엘 가야죠. 저승엘 가서 그 서류를 세 군데서 다 받아서 해결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되는 거지, 내가 할 수 있어야 나를 건지지 내가 할 수 없다면 나를 건지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건집니까. 그래서 남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사는 공생이다. 우리가, 우주 천지 삼세가 다 어우러져서 다 공생이다 이러는 겁니다. 작게는 내 몸 하나가 공생이지만 크게는 우주 천지 삼세가 다 어우러지는 그 한마당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되면 모두가 이 자리부터 만들어야 이게 자꾸 거기다, 즉 말하자면 한군데다가 일거수일투족 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갈 때에 비로소 오색이 영롱한, 이 세상의 천지를 뒤집는 색색 가지가 화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그 도리를 알게 되는 거죠.
그리고 또 자기가 바로 자불한테로 가면은 위 부처님으로 하나가 되고 자로 내려오면은 바로 법으로 하나가 되고, 이렇게 하는 도리를 또 생생히 알게 되죠. 그러니까 스스로서 이거는 대신 누가 공부해 주거나 그런 법이 없어요. 자기만이 자기가 앉았는지 섰는지 누웠는지 일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하다못해 밥을 한 숟가락 떠먹든지 변소엘 가든지 뭐를 하든지 생명의 근본을 자기가 태어날 때 가지고 들어가니까요.

지금 물질적인 모습은 정신적인 모습 없는 자기를 지금 찾는 겁니다. 찾는 것이 아니라 둘 아니게 만드는 요리죠. 그 요리들을 못하면은 부처님 도량처에 통신이 되지를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게 가짜로 하지 말고 진짜로 진실로서 한발 한발 딛는 도리를 아시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해요
문) 몸이 계속 아파서 우울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큰스님께서 ‘죽든지 살든지 맡겨 놔라.’ 하시는 법문을 듣고부터는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이 오락가락합니다. 어떻게 하면 탁 맡겨 놓을 수 있을는지요.

답) 우리가 이 사람 모습이 사는 게 아니라 모습을 살리는 겁니다. 자기가 모습을 살리는 겁니다. 그래 모습을 살리는 자기, 즉 선장이 있는데 이건 부처님께서 배로 비유를 했죠. 배가 떠가는데 모두들 그냥 아우성을 치고 야단들인데 어느 스님이 가만히 앉아서 아우성도 치지 않고 그냥 내리니까 배가 잔잔해지고 전부 괜찮아지더라고, 그런 말이 있듯이 그렇게 진정코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자기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이 세상 누굴 믿어요? 법당의 저 부처님이 저렇게 앉아 계셔도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달린 겁니다. ‘저분이 정말 넉넉해.’ 이런다면 정말 넉넉하게 활용을 해 주시고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지 않은 거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따라서 조금도 어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게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으로 인해서 항상 거죽으로 나오게 돼 있거든요. 생각에 의해서 꼭 거죽으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아무리 안 그렇다 해도 이 사람이 속으로부터 거죽으로 나오지 거죽으로부터 속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죠.
그러니깐 항상 그저 태연하게 웃고 살고, 어저께 생각을 하지 마시고 내일 생각을 하지 마세요. 살 생각을 말입니다. 살 생각을 한다면 노냥 그 살 생각을 해야 돼요. 여러분의 습관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도 많습니다. 이 습관이 되면은요, 걱정하지 않을 것도, 하루 걱정 안 할 것도 걱정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한생각에 불과해요, 모두가. 모두 문제가 있는 것도 한생각에 다 완화가 되고 한생각에 그냥 뒤집어지고 하는 겁니다.

에너지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데…
문) 요즘은 자연 자원이 많이 고갈되면서 에너지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데요, 마음공부를 통해 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지요.

답) 우리가 생활이 그냥 도(道)예요. 생활이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도도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생활 속에 도도 있고 도가 바로 생활이에요. 근데 생활 하나하나 해 나가는데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에너지가 잘 나오고 잘 에너지를 쓸 수 있고 그런 겁니다. 우리가 생명력이라고 하는 그 이름은 바로 에너지 통이에요.
바로 말한다면 에너지 통인데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그게 주장자가 되죠.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주장자. 그러니까 그 에너지를 그렇게 하다 보면은 자연적으로 이 에너지라는 게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데도 있어요. 전체 가까운 데 먼 데서 이게 빨아들이면 그냥 이렇게 빨려오듯이 이렇게 되는 것이 에너지에요.

그래서 정신계를 무시하지 마라. 정신계를 무시하면은 에너지와 전체의 그 사람들이, 죽은 영혼들도 다들 통신이 되질 않는다. 선신도 통신이 되질 않는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에너지도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이나 똑같은데 우리가 생각에 따라서 그 에너지가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고 좁쌀만 해질 수도 있고 좁쌀만 한 것이 커질 수도 있어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여기 이 공기에 담겨서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에너지가 모자라서 못 살고 이런 게 아니고 시대가 변천하면서 이 에너지가 모자라던 것이 잘 자라서 쓸 수 있게끔 돼요. 우리 인간도 몸이 이렇게 공체로서 이렇게 있는데 우리가 생활 속에서 아주 뭐가 모자라고 참 힘이 든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모자라는 걸 생각하는데 이 속의 의식들도 다 한생각으로 뭉쳐요. 그래서 그것이 에너지가 발동이 되는 거죠.

그러면 어떠한 병 증세라도, 지금 진실하게 그렇게만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병 증세라도 그건 단호히 고칠 수 있다. 이건 전부 이 인간에게도 에너지가 흐르고 있거든요. 그래서 전자에 부처님께서 전부 보통 사람들이 그냥 있는 거를 그냥 해야지, 만약에 깨달았다고 해서 안 죽거나 깨달았다고 그래서 안 아프거나 늙지를 않는다거나 이런다면 혼란이 온다. 그래서 혼란이 오게 그렇게 하지 마라. 또 비가 와도 너만 비가 오지 않게 하지 마라. 그러면 이상스럽게 또 혼란이 또 온다. 그렇게 아주 무척 제시를 했죠. 그럭하지 말라고요.
그러니깐 이 사람이라는 게 살아나가면서 고통을 받아 봐야 고통의 구석구석의 이유를 알게 되고, 아파 봐야 아픈 사람의 그 이유를 알게 되고, 또 좀 어려운 지세에 좀 살아 봐야 어려운 문제를 빨리 생각해서 해결을 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생긴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것도 걱정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냥 시대가 변하는 대로 그대로 먹고 살게 되고 또 에너지 쓰게 되고, 걱정 없이 쓰게 된다고요. 우리 마음공부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살 때에 아무 걱정, 내일 걱정 하지 말고, 어저께 지나간 거를 걱정하지 말고 오늘 사는 데에, 찰나찰나 돌아가는 데에 평화스럽게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살아라 이 소리예요. 어저께 지나간 거를 생각하면 골칫덩어리고 내일 걱정을 한다면 또 하루에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외려 고생을 하게 되는 거니까. 그러니 고생도 자기가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겁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