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오신날 달았던 연등을 철거하지 않거나 장식물처럼 재활용하는 것은 연등을 잘못 관리하는 예들이다. 사진은 대구광역시 ㅅ사찰. 연등을 나무에 장식물처럼 재활용하고 있다.
등을 밝힘으로써 번뇌와 무지에 싸인 어두운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고자 했던 것이 등공양을 있게 한 기본적인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불교가 도입된 이후 등공양을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간등(看燈)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이 곧 연등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정월 보름과 이월 보름에 국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연등을 밝히고 잔치를 벌일 정도로 국가적인 행사로 열렸는데, 의종 때에는 백선연이 사월초파일에 연등회를 시행하고, 고종 때에는 최이가 연등회를 열어 밤새도록 즐겼으니 이것이 오늘날 사월초파일 연등행사의 전신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성장안에서 열린 관등놀이는 한성팔경의 하나일 정도로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얼마 전 진주에서 열린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이 진주대첩을 거둘 때 동원했던 군사전술이 시원이라고 하나, 이 역시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연등회와 무관하지 않다. 요즈음 서울 한 복판인 청계천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등불축제 역시 부처님의 지혜를 등불로 밝힌 연등회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을 보면, 최근에 많은 지자체에서 등불축제를 여는 것이 이벤트를 통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불가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등공양의 전통이 숨어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사찰에서 사월초파일날 연등을 달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축하하고, 밤에는 거리행진을 하며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등불이 이 땅 모든 곳에 두루 비치기를 기원하는 연등회를 여는 것은 이제 국가의 큰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사월초파일이 지나고 난 이후에도 달았던 연등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고 찢어져 너덜거리는 것을 보면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또한 부처님 오신 날 달았던 연등을 하나의 장식물처럼 사찰에서 재활용하는 것 역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연등을 잘못 관리하거나 아무런 생각 없이 다른 용도로 전용하는 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등공양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이 된다.

사찰에 다는 연등은 등공양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공양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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