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정사 관음재일 법회-성운 스님(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이사장)

▲ 성운 스님은...속리산 법주사로 동진출가한 후 해인사, 대흥사, 화엄사 등 전국 유명 사찰에서 정진수행하였다. 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최초로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1980년대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을 역임했고 1994년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였다. 그간 사회에 공헌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 대통령표창,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고 2010년에는 만해대상 실천부문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불교사회복지론>, <노인복지현장경험론>, <부처님 고뇌의 미소>가 있으며 편역서로 <묘법연화경>, <금강경 강해>가 있다. 현재 인덕원 대표이사, 서울 삼천사 주지이다.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관세음보살에게 정성을 다해 50일이고 100일이고 빌어보라고 했다. 믿음을 가진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다면서. 동시에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말로써 행동으로써, 생활로써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복됨을 나누라고 했다. 거기서 분명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성운 스님은 확신을 가지고 이같이 말했다. 10월 28일 관음재일을 맞아 불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다잡아준 성운 스님의 법문을 들어본다. >
 
나누지 않고는 '업,불행' 바꿀수 없어
자신을 제대로 이끌어 나가면
이웃에 기쁨 주고, 지혜, 자비로 확대

말,행동,생활 정화가 수행...매일 점검
"서로 믿고 서로의 관음 보살이 되자"

 모든 종교의 목적은 중생제도에 있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10대 보살이 이 땅에 출현하신 목적은 중생구제에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는 아픔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제도하고 구원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자들 또한 깨달음을 이룬 후에 가장 먼저 아프고 병들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찾아갑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이고득락이라 합니다. 고를 여의고 행복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불교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비는 것은 구원이고 내가 행복할 수 있게끔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구원을 이야기하는 타종교와 제도를 말하는 불교가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누군가 ‘구원’해주는 것이고 제도는 스스로 고를 소멸하는 길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불교를 공부하면서도 성경도 함께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평화방송도 자주 듣고 신부님들도 종종 만납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취하면 되는 것이고 맞지 않으면 보류하면 됩니다. 무조건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얽매여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 성인의 말씀은 열린 마음으로 듣고 익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불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 보면, 우리 모두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픔과 고통을 겪는 이유가 그 죗값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에 구원 받으려면 회개하고 용서를 해야 합니다. 직접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도 용서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가 소통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아담과 이브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원죄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조상이 하나님한테 죄를 지었는데 한 번의 단순한 잘못으로 이렇게 큰 멍에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대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불교에서는 현재의 고통이 업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업에는 좋은 업과 나쁜 없이 있는데 보통 업하면 나쁜 업을 떠올립니다. 업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며 종종 실수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치에 밝지 않고 어두운 무명상태에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거죠. 그래서 업이 쌓이고 고통이 옵니다. 엿과 비슷하다고 분필을 먹었다간 배탈이 나는 것처럼요.
부처님은 무지와 무명으로 인해 고와 만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고통을 없애는 길은 무지와 무명의 소멸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에서 벗어나는 길은 망상, 번뇌, 탐욕을 소멸한 후에 완전한 자유, 열반을 얻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하죠.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진, 정념, 정정. 이 여덟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어, 정업, 정명입니다. 말을 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주된 일이니까요.

정어, 정업, 정명을 통한 보시
 또한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번뇌, 망집, 탐욕의 소멸을 할 수 있습니다. 나눔을 통하지 않고서는 업을 씻을 수가 없고,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자들과 철학자들이 배움을 완성한 후에 하는 것이 말입니다. 복된 말이죠. 이를 도구로 중생들을 제도하니까요. 이 또한 나눔이자 보시입니다.
 나를 제대로 이끌어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환희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극대화되면 자비입니다. 자비를 이루기 위해서는 업이 소멸되고 지혜가 나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만, 인간 사이에 통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 업, 명이 정리 되어야 합니다. 어, 업, 명이 계로써 정리되었을 때 현실상을 볼 수 있는 지혜가 나옵니다. 너도 나도 평안해지는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어, 업, 명을 정화해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화가 오고, 지혜의 힘이 나오고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 업, 명으로 어떻게 나눔을 실천할까요. 말로써 행동으로써, 생활로써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복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날 주판을 두드려봐야 합니다. 오늘 하루가 적자가 났는지 아닌지요. 자기평가와 자기점검을 매일 한다면 행복의 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어업명이 사람들한테 복되었는지 아닌지 점검하고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지극히 참회합니다. 이것만 실천 수행하더라도 신기하게도 여러분이 겪는 고통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된다면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도반에게, 나아가 사회에 자비심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신뢰심, 청정심, 확정심
 우리 모두 사는 게 괴롭고 마음 안에 있는 괴로움 때문에 이를 떼어버리고자 부처님 품을 찾아 왔을 것입니다. 고통이 소멸되는 데는 세 가지 믿음의 단계가 있습니다. 신뢰심, 청정심, 확정심입니다. 신뢰심이 강건해지면 믿음에 의심이 없는 청정심이 생기고 이는 다시 확정, 절대 변치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변모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관계 속에서 기본입니다. 가장 먼저 갖추어야할 것이 믿음이고,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불신입니다. 불신은 재앙을 불러일으킵니다. 관계 속에서 불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불평불만과 비난만이 나옵니다. 반대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이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긍정적 사고를 가진 도반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서로를 믿고 아픔을 쏟아낼 수 있는 도반이 옆에 있다면 숨통이 트이겠죠. 그런 도반이 여러분에게는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야 합니다. 
 주변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금덩어리가 나올 수도, 암덩어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 법문을 듣는 거죠. 부처님의 말씀은 금덩어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어냅니다. 농부가 논에서 씨를 뿌리고 작물을 수확하듯이 우리들에게는 사람이 논이고 밭이 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농사를 잘 지으면 좋은 작물이 나오겠죠. 돈, 명예 행복, 재수가 모두 인연 속에서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1년에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그리고 현재 어느 정도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기껏해야 10~15명 범위 내에서 여러분들은 웃고 울고 찌푸리고 하겠죠. 서울시에 천만명이 살고 있든 60억 명이 지구에 있든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나와 가장 가까운 인연들이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죠. 행복과 불행, 고통과 즐거움이 오는 곳이 어디입니까. 10명 범위 내에서입니다. 나는 인이고 상대는 연입니다. 인과 연이 만나 작용하는거에요.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인연처를 명확히 아세요.

 지금 여기서 행복해지려면
 어떠한 부를 갖다주고 명예를 갖다 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부족해하고 탐욕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고통이 오기 마련이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 100%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100%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불교에는 있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각자 원이 있어 법당에 왔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 원하는 바를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관세음보살을 주력하고 백팔배를 해보십시오.  그렇게 관세음보살 품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심으로 하다보면 자신의 마음이 청정해지고 절망하는 나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 자리에 내가 원하는 ‘나’가 서게 되면, 관세음보살님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세계입니다.
 내세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있는 법을 부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이 불행하면 내일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어제의 내일이 오늘이고, 내일의 어제가 오늘입니다. 우리에겐 항상 오늘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해지려면 위에서 이야기했던 신뢰심과 청정심이 굳건해져 확정심이 된다면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오자마자 녹아 없어지게 됩니다. 제대로 기도하면 50일 이전에 성취할 것이고 설령 100일내 성취 못하더라도 다시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성취를 통해서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까 여러분들도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자족하는 삶
 거룩하고 성스럽고 소중한 것을 마음에 품고 그에 기대면 고통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타력, 신앙의 가피입니다. 마음자리라는 것은 무한한 가피를 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끝없이 원하고 부르면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마음법입니다. 마음에 먹구름이 끼이고 탐욕이 끼이면 내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게 탐욕이고 먹구름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거기서 깨어날 수 있을 때 습관과 악습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고칠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속에 천국, 지옥이 있고 불행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 탐욕을 씻고 자족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다리가 절단되었습니다. 집에 있는 쌍둥이 자녀를 먹여는 살려야겠는데 밥벌이를 할 수가 없으니 밤에 폐지를 줍고 다녔습니다. 한발로 기어 다니면서 폐지를 주웠는데 겨우 3만원 벌더랍니다. 그래도 부족하지 않더랍니다. 천원을 받아 천원을 다 쓰면 돈이 없고 천원을 벌어서 이천원치를 쓰면 부족한데, 천원으로 5백원만큼만 쓰니까 자족하더라는거죠. 탐욕에 쫓기지 않는 삶을 스스로 터득해 살고 있는 거죠. 게다가 그는 집에서 외발로 뛰어다니면 아랫층에 사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기어다닌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바로 부처요, 예수입니다. 행복의 참 모습이고 그 자신이 바로 등불이 되죠. 삼각산에 꽃이 피어서 온 사방에 그 향기가 진동해도, 등산객들이 밟고 다니는 꽃 한 송이 속에서도 삼각산을 능가하는 꽃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든, 자족한 삶을 사는 것이 영원한 행복의 자리요, 번뇌에서 해탈하고 열반의 진정한 자리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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