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명심보감 상 - 정대구 교수(전 영산대)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인
명심보감 책 이름에 이미 불교 깃들어있어
‘명심(明心)’은 무명 밝히는 마음 연등을,
‘보감(寶鑑)’은 불교경전을 연상시켜

명심보감은 수많은 서책 속 격언, 속담 엮은 것
그 중에서도 석존의 가르침 중요시해
금강경과 제전화상, 도청화상 등 스님 말씀 싣고
불교와 관련 깊은 용어들 수록돼 있어

▲ 정대구 교수는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문리범대 및 숭실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의 친구 우철동씨>가 당선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표 시집으로 <양산일기> 등 10여 권이 있으며, 그 외 <녹색평화>, <구선생의 평화주의>, <김삿갓 연구>등을 펴냈다.

*필자와 금강경

전통적인 유교가문에서 태어나 억불숭유의 유교이념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한 필자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불(佛)’은 오륜삼강의 인지상도(人之常道)도 모르는, 글자 그대로 사람도 아닌 인불(人弗)로 치부되어 부모자식 사이의 관계마저도 부정하는 아주 해악적인 것으로 외면해 버렸지 싶다.
이러한 완고한 입지에 있는 나에게 처음으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의 ‘불’이 필자에게 다가오는 연기(緣起)가 발생했다. 그것은 소위 “모든 부처님법과 무상정등각의 최고지혜가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개종차경이 출(一切諸佛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法이 皆從此經이 出)고 하는 경중의 경 금강경을 만난 것이다. 금강경독송회의 백성욱선생께서 펴내신 <금강반야바라밀경>이었다.
천재일우로 만난 금강경을 일품, 이품, 삼품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필자는, 보이는 현상계는 물론 삼천대천세계에 보이지 않는 티끌들(미진중微塵衆)까지 골고루 다 비추어내시는 그 섬세하고 아름다운 거울(경鏡)의 미묘한 그물 속에 푹 빠지게 되었다. 제 오품 여리실견분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라 若見諸相이 非相이면 卽見如來)”라고 하는 사구게는 읽는 이에게 가히 환희심을 불러일으킨다. 필자 또한 사구게를 접한 후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면서 새로 태어나는 듯한 감동을 받았고, 투명하고 가벼운 존재로 환골탈태 하는 듯 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금강경 공부하기

금강경의 알쏭달쏭한 어려운 글뜻은 초보자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금강경에 수없이 많이 나오는 부정적인 말인 부(不)나 비(非), 무(無)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언사가 우리의 이해를 가로 막고 읽기를 방해할 수도 있지만, 한 부분에 마음이 머물러 너무 오래 머리 쓸 일은 아니다. 도연명 또한 “독서를 좋아해 글을 읽는 즐거움으로 식사를 잊어버릴 때도 있었지만, 어려운 부분을 만나면 굳이 깊게 해석하려 들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好讀書 不求深解 每有意會 便欣然忘食)”며 독서의 즐거움을 말한 바 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자꾸 읽다보면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意自現)이라고, 어느 순간 문리가 터지는 법이다.
필자는 적당한 가락을 메겨 되도록 큰소리로 금강경을 읽는다. 그러다보면 금강경 읽는 목소리가 리듬을 타고 우주공간으로 울려 퍼져 우주와 공명을 일으키게 된다. 읽는 이의 정신이 부처님의 맑은 정신과 소통되어 금강경이 의도하는 바, 평정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금강경을 체험하고 여래를 실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무조건 자꾸 읽다보니까 그 어렵다는 ‘아니다’라는 부정적 언사도 차츰 감이 잡혔다.
예컨대, 제10품 장엄정토분에서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했는냐 아니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를 장엄하게 했다는 것은 장엄하게 함이 아니기에 장엄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라는 말을 살펴보자. 부야(不也)나 즉비(卽非)는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보살인 내가 불토를 장엄하게 했다는 아상을 부정하고, 선업을 했다는 생각 과 인식을 갖지 않아야 그 행위가 비로소 장엄이 되고 선행선업이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행(行)의 부정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했다는 생각 아상의 부정인 것이다. 금강경에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제17품 구경무아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일체중생을 멸도한다 했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고 보니 실로 내가 멸도한 중생이 하 사람도 없었다.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道者)”. 내가 많은 중생을 구원했다면서 구원받은 중생이 하나도 있지 않다는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내가 중생을 구원했다하는 생각, 곧 아상(我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읽다 보면 금강경도 그렇게 접근하기 어렵지만은 않다는 대긍정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요컨대 금강경은 ‘아인중생수자상’이라고 하는 사상(四相)과 무엇을 무엇이라고 깨닫고 규정하는 법상과 그 반대쪽에 비법상까지 멸해야 아뇩다라삼보리의 무상정등각 최상최고의 보리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무아법(無我法)의 가르침이다. 제7품 무득무설분에서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을 보면 일반 중생과 현성을 식별하는 척도로 등장한 무위법(無爲法)은 무아법(無我法)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무아법(無我法)과 노장의 무위자연의 무위법(無爲法), 양자의 상관성을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무아법(無我法)은 아(我)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그 일을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 나 잘났다고 하는 생각을 없이하라(無化)는 가르침으로 이를 잘 안다면 우리는 이미 부처님의 말씀을 터득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노장의 무위법 역시 행위 자체를 다 부정하는 게 아니다.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는 걸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오해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유위(有爲)의 반대개념으로서의 무위(無爲), 즉 작위적으로 조작되고 인위적으로 지어서 함(僞)이 없는 무위(無僞)인 것이다. 붓다의 무아법(無我法)이든 노장의 무위법(無爲法)이든, 금강경에서 보았듯이 무아법이 무위법이고 무위법이 무아법이다, 이렇듯 대성현의 가르침은 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명심보감

명심보감은 본래 중국 명나라 때 사람 범립본(范立本)에 의해 편찬된 책이지만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보급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이다. 조선왕조 오백년간 훈몽교육과정의 하나로 천자문 계몽편 동몽선습과 함께 꼭 읽고 배워야할 국민필독서로서 명심보감은 유대인의 탈무드, 서구인의 성경과 같은 입지(立地)에서 수신제가 입신처세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삶의 온갖 지혜와 삼세(전세, 현세, 내세)에 윤회하는 인과응보의 신념과 확신을 심어준 우리 선인들의 필수교양서였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가훈으로도 많이 쓰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문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 말이 정작 명심보감에서 나온 줄은 잘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이 명심보감의 명언들이 21세기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명심보감은 금과옥조로 사랑을 받고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도 읽히고 스페인어로도 번역되었다.

*명심보감과 불교

<명심보감(明心寶鑑)>이란 서명 자체가 불교 자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명심’이 그러하고 ‘보감’ 또한 둘 다 불교용어다. ‘명심’은 우리의 무명을 밝히는 마음의 연등(蓮燈)을 떠올리게 하고, ‘보감(寶鑑)’은 불교경전 또는 사찰이나 스님을 연상하게 한다. ‘보’는 금강경에도 칠보(11품) 칠보취(24품) 등에서 볼 수 있다. 절에 가면 ‘백년탐물일조진 삼일수심천재보(百年貪物一朝塵 三日修心千載寶)’라고 쓴 주련도 쉽게 만날 수 있고 대웅전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쓴 현판도 많이 볼 수 있다. 한편 ‘감’은 진감국사(眞鑑國師) 원감국사(圓鑑國師) 덕산선감(德山宣鑒) 등 대사들 법호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명심보감 공부하기

명심보감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것은 단종 2년(1454)에 청주에서였다. 하지만 불교적이고 도교적인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억불숭유를 국시로 삼은 조선초 사회에서 곧 잊혀지고 그 뒤 1550년에 담양에서 초략본(담양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초략본은 불교적, 도교적 성향의 내용을 상당부분 제외한 글자 그대로 초략본이다.
논어는 공자의 말을, 성경은 예수의 말을 여러 제자들이 듣고 기록한 것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면, 명심보감은 범립본이라는 한 사람이 실로 유불도선에 관한 수많은 서책에서 경구 명구 속담 격언 이어(俚語) 등등을 모아 엮은 책이다. 즉 현철의 총집합이다. 편자가 서문에서 “여러 책의 요긴한 말과 석존의 가르침(慈尊訓誨)을 모아, 명심보감이라 한다. (集其先輩 已知通俗諸書之要語 慈尊訓誨之善言 以爲一譜 謂之明心寶鑑)”고 밝혔듯 선철들의 여러 책들 가운데서도 특히 석존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심보감은 상편에 계선ㆍ천명ㆍ순명ㆍ효행ㆍ정기ㆍ안분ㆍ존심ㆍ계성ㆍ근학ㆍ훈자, 하편에 성심ㆍ입교ㆍ치정ㆍ치가ㆍ안의ㆍ준례ㆍ존신ㆍ언어ㆍ교우ㆍ부행 등 총 20편 775조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책명에 불교색채가 암시되어 있듯, 편명 중에도 계선 천명 순명 안분 존심 계성 성심 등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고 실제로 본문에도 불경(금강경 32품 사구게) 이나 제전화상, 도청화상 같은 스님의 말씀이 나오고 불교와 관련 깊은 용어들이 수없이 보인다. 예컨대 염불ㆍ예불ㆍ불도ㆍ불경ㆍ불심ㆍ작불ㆍ성불ㆍ간경ㆍ무상ㆍ인연ㆍ삼악ㆍ참선ㆍ번뇌ㆍ윤회ㆍ보시ㆍ계율ㆍ방편ㆍ장경ㆍ경전ㆍ부생ㆍ인과응보ㆍ중생제도ㆍ지족안분 등이 그렇다. 우선 이들 용어들이 보이는 문장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불경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佛經云,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성심편」 190조
-불경(금강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유위법(인연 따라 생긴 현상계)은 마치 꿈과 환상과 같고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으며 마치 이슬이나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세상사를 이와 같이 볼지니라.

<계속>
이 원고는 본각선교원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미리 간추려 소개한 것입니다. 본각선교원 (02)762-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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