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해인사 법문-덕현 스님(전 길상사 주지)

<마음을 깨닫는 길, 그리고 이를 잘 쓰는 일. 불법을 구하는 과정에서 참구해야할 대상은 오로지 마음이고 이를 위해 사라져가는 것에 스스로를 옭매지 마라고 덕현 스님은 말했다. 홀연히 가는 바람의 길 속에 이미 휴식이, 편안함이 있다고도 했다. 이방인으로서 해외에서 살아가는 교포들에게는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을 말이다. 10월 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해인사에서, 덕현 스님은 불자로서 기댈 '참고향'이 어딘지 일러주었다.>

▲ 덕현 스님은...1989년 법정 스님을 은사로 송광사로 출가했으며 운문암, 수도암 등 제방 선원에서 선수행을 하고 여러 해를 산중의 수행처에서 홀로 정진했다. 법정 스님 입적을 전후하여 2년 정도 길상사 주지직에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산으로 돌아가 봉화와 음성에서 법화도량을 일구고 수행공동체 법화림을 꾸려가고 있다. 편역서로 <법구경>이 있다.

 우리 일상은 무의미하고 지루하며 그저 하염없이 벌어지는 우연의 장난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 우리 산다는 일은 그 시종이 성불을 향해서 나아가는 유장한 구도의 여정이며, 그것도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이 시대와 터전을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모두 어울려 대승의 반야선을 함께 타고 저 구경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는 기나긴 항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자들에게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문명학자 토인비는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원자폭탄의 발명도 아니고, 세계대전도 아니고, 컴퓨터의 대중화도 아니고, 바로 불교가 서양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다르마가 인류의 정신문화 유산 가운데 가장 가치로운 것이고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위없는 진리이며 또 우리 모두를 이 현대의 문명적 혼란과 질곡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실다운 가르침이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나 진정성 있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까? 사실은, 동시대의 교육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우리의 맥박 속에, 우리의 유전자 속에 숨 쉬며 살아있는 불교를, 그저 낡은 역사 속의 케케묵은 것, 첨단의 서구문명이나 현대과학에 비하면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실용적이지 않은 어떤 사상체계나, 혹은 매우 비사회적이고 도피적이며 염세적인 종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실천적 검증을 도외시하고 어떤 도그마나 계시 따위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영웅적인 용기와 헌신으로 진리를 찾아냈던 옛 모범을 믿고 따라가, 스스로 그것을 증험하는 일입니다.
 저는 근자에 가끔 서양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적지 않은 외국인들을 만나보는데 그들에게서 오히려 우리 불교의 현주소와 그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미국의 스티브잡스나 엘 고어 전 대통령 후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사람들이 불법에 귀의하고 불법과 선을 닦으며 우리 현대사의 주역들로서 시대의 문명적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동유럽 같은 데 가 보면 거의 대부분 번잡한 도심의 넓지도 않은 사무실이나 사옥 같은 공간들을 살려 선원을 만들고, 그런 데서 어렵사리 예불을 모시고 법회와 수행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진지함과 순수한 열정은 몹시 가슴을 뭉클하게 했고 우리의 처지를 냉정히 돌아보게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곳을 찾은 사람들 대부분이 젊은 사람, 사회의 엘리트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서의 이념적 대립구도를 막 벗어난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성인들이, 한창 삶의 현장에서 애써 일하는 젊은이들이, 그리고 남녀가 앞다투어 함께 와서, 전혀 익숙하지 않을 가부좌를 하고 앉아 참선시간을 배겨내고, 잘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반야심경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그 긴 중세유럽사회의 암흑기를 빠져나와 근현대 과학기술문명의 시초를 열었던 사람들이 왜 지금 불교에 심취하여 아픈 다리를 꼬고 앉아 한국말로 천수경을 외고 있을까요? 그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사고하며 직접 자신이 해보고 경험해 봐서 옳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케케묵은 것이고, 비논리적인 것이고, 실천해보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알 수 없는 가르침이 결코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누구든 믿고 실천해보면 그 결과를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진정한 과학이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들에 힘주어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불법의 위대성이나 과학성, 진리성, 그리고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누구신가요?
 이런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답이 궁해지면 안 됩니다. 불법은 이 모든 것 속에 스며있고, 이 모든 것이 다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경전이나 고준한 법문 속에서나 있는 말이라고 치부하고 한 귀로 흘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여기 법상 위에 시계가 하나 있지요? 
 그렇지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시계라고 하는 것은 이름, 말일 뿐입니다. 그러니, 또 묻거니와, 진짜 이것이 무엇입니까?
뜯어보면 쇠붙이나 플라스틱으로 요리조리 모양을 만들어내고 건전지를 붙여가지고 그 에너지로 바늘을 움직이게 한 물건이잖아요?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만도 아닙니다. 더 나눠보면 분자, 원자들이고 미립자들이고 에너지들이고 결국은 텅 비어서 없는 것이고, 결국 모두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보지 않으면 이 형상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지 않으면 이 시계 소리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지지 않으면 이 물질은 인식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떠나서 이것이 있지 않습니다. 현대의 양자물리학은 물질은 그것을 보고 경험하는 자에 의해 창조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합니다.
 2천 6백여 년 전, 부처님은 화엄경에서 모든 것이 다 마음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다 마음이고, 마음 안의 일이고, 마음 작용인 것이고, 마음의 기능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불교를 아는 것이고, 부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매일매일 부처님을 만나고 순간순간 부처님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불자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깨달아서 마음을 바르게 쓰는 일입니다. 사실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게 무엇이냐?’ 했을 때 ‘시계’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이 이름 붙이는 것이고, 그저 말일 뿐입니다. 선禪은 불법의 정수이고, 말을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그곳에서 활로를 엽니다. 심지어는 구경의 그것을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 부처라고 말하는 것, 법이라고 말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지금 저를 보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 봅니까? 정말입니까?
 여러분 지금 눈을 감고 장미 한 송이를 떠올려보십시오. 눈을 감았음에도 장미 한 송이가 분명 보이잖아요? 그걸 눈이 보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그 말은 육안으로 대상을 볼 때에도, 눈이라고 하는 창을 통해서 다른 무엇이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고요? 여러분이 하는 생각도 뇌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뇌를 통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죽고 뇌가 썩어 없어져도 여러분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어도 썩거나 불타 없어지지도 않는 이것이 무엇이냐고요?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을 그 무엇이 하고 있느냐고요? 그것은 모양이 없어 볼 수도 없고 개념화하여 이름을 붙일 수도 없지만, 우리가 부득이 마음이라고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을 그저 ‘마음’이라고 이름붙일 줄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과연 그게 무엇인지 정말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여실히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짜 불법의 반입니다.
 나머지 반은 무엇인가? 그 깨달은 마음을 잘 쓰는 것입니다. 잘 쓴다는 것은 마음을 제대로, 지혜롭고 자비롭게 작용하도록 해서 중생을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본래 지닌 이 마음을 등지고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육신, 업식을 나로 여기고 울며불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 중생인데, 그 환상과 미망을 깨트리고 진짜 내가 무엇인지, 다시 말하면 이렇게 보는 이 주인이 무엇인지, 이렇게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확철히 깨닫고 그것을 바로 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렵게 얻은 소중한 인생을 어물어물 보내서는 안 됩니다. 이러다가는 불법의 정수 선이 살아있는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들이 곧 서양 사람들에게서 불교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미래를 향해 가능성과 희망이 있는 종교는 불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실제의 인구조사 결과로도 개신교 다음의 종교는 불교라고 합니다. 미국의 불교 인구는 천만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계를 받고 불교에 입문하여 실제로 수행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든지, 가끔 절에 가보기도 하기 때문에 불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불자란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법화경에서 말하듯이,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는 길 잃어버린, 집과 부모를 잃어버린, 자기가 억만장자의 아들인 줄도 모르고 정처 없이 떠돌면서 허접한 것들을 비굴하게 구걸하고 다니는 거렁뱅이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참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지만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의 정체를 제대로 아는 일이고 참 부처님을 뵙는 일이고, 스스로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참 불자가 부처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안목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 눈먼 중생을 눈뜨게 하는 그것이 정녕 이 세상에서 가장 고차원의 일이고 우리가 유일하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대장부의 소명입니다. 진짜 이 일을 믿고, 그 참 눈깔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참구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불자입니다. 이름만, 무늬만 불자는 불자가 아닙니다.

 하여, 지금 눈앞의 하찮은 것들, 잠시 있다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얽매여 연연하지 마십시오.
 삶이란 매일매일 이별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다 분명 무상하지만, 그 무상하다는 것이 허무하고 공 허하다는 뜻으로 새겨져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만남을 향해서 낡고 어차피 사라져가는 것들을, 내가 그동안 의지하고 있던 것, 가지고 있던 것, 알고 있던 것들을 제때에 놓아버려야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인생길에서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간다는 것은 그동안 묵었던 것들, 내가 딛고 있던, 알고 있던 것들을 뒷발로 박차 걸음걸음 이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만남과 이별은 순간순간 멈추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에 한 순간도 어딘가에 붙들려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당당하게, 활기차게 수행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상을 꿰뚫어 무상의 길을 닦아 가는 위대한 구도자이고 불자이고 부처님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고향땅에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옛 철인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은 다 변해가고 있고, 우리가 더듬을 수 있는 시공 속에서 어디멘가 하고 고향을 찾으려 한다면, 그런 고향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내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고향 소식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걸음걸음,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찾아 누리면서 기쁘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시간을 넘어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꽃과 열매가 벌써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마십시오.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십시오.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바람의 길을 가야합니다. 나약한 것들이 늘 어딘가에 안주하려고 하고 걸핏하면 그만 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휴식과 안락은 정지해버린 공허 속에 있지 않습니다. 바람은 쉬려고 하면 벌써 바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물에 걸린 것보다 더 부자유한 것입니다. 눌러 있던 자리를 즉시즉시 놓아버리고 어디에도 집착 없이, 걸림 없이 자유롭게 나아가야 합니다. 바람의 휴식은 그 속에 있습니다. 안락이 그 여로에 있습니다.
 참고향의 길을 바람이 되어 가십시오. 여러분 모두 이 길에서 만나게 된 인연에 서로 감사하며 근본의 불심을 잃지 말고 가십시오. 이렇든 저렇든 스님들을 잘 믿고 의지하고 또 어떤 때는 스님들을 경책하여 정신 차리게도 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대승승가를 이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자항(慈航)을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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