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불교대학 신 화쟁법회-한탑 스님(문사수법회 회주)

불교공부하면 일체 적과 공포심 벗어나
불교의 화쟁은 한마음 한뜻 되는 것
'일제중생 실유불성' 마음 가져야

다툼은 겉모양에 속아 일어나는 것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한생명
참생각 방해 받으면 '나무' 염송하자

▲ 한탑스님은...고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원각회, 불광법회 초대회장과 금산사, 안국사 등에서 상임법사를 역임했다. 현재 문사수법회 회주다. 저서로 <반야심경과 나무아미타불>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 <반야심경의 재발견> <황금의 수레바퀴> <불교란> 등이 있다.

<한탑 스님의 법문은 막힘없었다. 갈등이 많은 시대에 이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우리 각자가 부처자리를 찾는 데 있다고 했다. 중생이라는 꿈에서 홀가분하게 깨어나 참생명을 찾으면 너와 내가 없어지는 한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10월 18일 동산불교대학이 '제1회 국제 신 화쟁사상 정진대법회'를 개최했다. 이날 한탑 스님과 일본의 후지 요시나리 박사가 화쟁사상을 주제로 강의했다. 다음은 한탑 스님의 법문이다.>

불교는 다툼이 없는 곳
불교의 화쟁이란 말은 결국 다투지 말고 한마음, 한 뜻이 되란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다툼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다툼을 만들어서 조계종 내부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는가 하면 태고종과 조계종으로 나뉘어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둘은 촌수로 따지면 몇 촌 차이도 나지 않는, 원래부터 같은 집안입니다. 한 곳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세상판이 온통 싸움으로 번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불교를 알게 되면서 얻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일체 모든 적과 원수, 공포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 들어오기 전에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것이 생존경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 이외에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부모, 자식, 친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죠. 그러나 불교에는 내가 해쳐야 할 존재도, 미워할 존재도, 다툴 존재도 없습니다. 그런 세계가 바로 참생명의 세계입니다. 아미타의 세계죠. 나무라는 뜻입니다. 귀명. 돌아갈 귀(歸)에 목숨 명(命)자를 써서 참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 밖에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갓바위에 가서 기도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특정한 곳에 특정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찾고자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은 존재합니다. 귀명한다는 뜻의 나무는 언뜻 생각해보면 뭔가 밖으로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참생명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모두가 한생명이니까 다툴래야 다툴 수가 없어요. 어디가든 모두가 나를 이끌어주시는,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부처님밖에 없으니까요. 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나무아미타불이고 귀명입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관세음보살이든 지장보살이든 소원을 들어주십사하고 떡을 바치고 과일을 바치고 하죠. 만약 부처님이 나에게 주실 것이 있다면 내가 달라기 전에 다 줬지 떡을 얻어먹으려고 기다리고 계셨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절을 천 배 정도 하면 그제서야 부처님이 눈을 한 번 뜰까말까 한다구요. 부처님이 그렇게 잔인한 분이십니까. 절을 죽어라고 했을 때 잠깐 봐준다고 한다면 그런 분을 믿어서 뭐합니까. 부처님은 우리가 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다 주시는 분입니다. 답답하다 하면 이미 해방되었다고, 자유롭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처가 되겠다고 하면 그럴 필요 없다고 이미 너는 부처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입니다.

나무아미타불로 모든 다툼 사라져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괴로움이 많습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미운사람과 만나야 하고, 구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등, 세상살이가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런데 여기다대고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짓말을 하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괴로워지고 외로워지죠. 뭔가 의지하고 싶을 때, 그때 궁극의 의지처가 되는 곳이 종교입니다.
절대 무한이 됨으로써 궁극의 의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절대라는 말은 대립이 없다는 말입니다. 끊을 절(絶)에 상대 대(代)자를 씁니다. 상대나 대립이 없으며 대신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온 세계가 1인칭인 세계이고 2인칭 3인칭이 없는 세계인거죠.
그리고 무한을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이자 법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나 그 내용이 드러나 있는 것이 절대 무한입니다. 무한은 자기 스스로 특정한 모양을 가질 수 없어요. 만약 둥그런 모양을 가졌다면 네모와 세모 모양과 맞지 않을테죠. 그래서 모양이 없는 절대 무한을 법신이라 합니다. 법신불밖에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신불은 모양이 없으니까 우리 같은 못난이들은 보지를 못합니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아요.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는 본래부터 법신생명이고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합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간다는 신념만 있으면 다툴 일이 없습니다. 한생명의 세계니까요. 그러나 이 못난이들이 참생명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만 눈이 팔려서 속고 지내는 것입니다.
법신불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으니까 법신불이 저절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떨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제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내는 거죠. 그러나 눈먼 장님인 우리는 모양 없는 법신불을 보지 못하니까 그는 원력에 부응해서 보신불이 됩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이라 부르는 분입니다. 아미타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절대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 무한입니다. 우리와 떠나있는 아미타가 아니라 함께 있는 아미타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그리고 다시 무지몽매한 이들을 위해 상이 있는 존재로 변화해 나타난 불이 석가모니불입니다. 화신불이죠. 화신불은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한 몸이라는 뜻도 있고 몸이 없는데도 몸으로 변화해 나타난 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조그만 나라의 태자로 태어날 이유는 없었지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범위 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려고 특정한 공간에 시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나신 분이 석가모니입니다. 또한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후 화하신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 약사여래불 또한 아미타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부처님이 낫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다툼이 일어났던 본래자리로 돌아가면 아미타불을 만나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로 모든 다툼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데 추울 때는 따뜻한 태양이고 밤에 생각할 때는 밝은 태양이죠. 그러나 따뜻한 태양과 밝은 태양이 따로 있는 건가요? 밝은 것은 문수보살, 따뜻한 것은 관세음보살입니다. 문수보살 따로 있고 관세음보살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겉모양에 속고 있으므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외견에 속지 말고 참생명으로 돌아가면 내 밖에 남이 없습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송이 꽃이므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만공 선사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내가 미워해야 할 적이 없습니다.

다툼없이 사는 법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지 간에 항복해야할 생각입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수보리 존자에게 석가모니는 부처되고자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합니다. 자타일시성불도, 나와 남이 함께 부처되어지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기도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은 부자되겠다는 생각은 물론, 부처되는 것조차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의 중생을 극락세계로 보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은 지금은 중생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스스로 중생이라고 우기기에 중생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참생명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만 가지십시오.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지 간에 그건 전부 내버리고, 본래 부처자리 그것을 참생명으로 알고 지내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를 의지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나와 더불어 사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싸울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착하지 않은 사람이,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이 나를 못살게 군다고 이야기합니까. 그들은 적이 아니에요. 나잘났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못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나가 강합니까. ‘내가 편해야겠다, 사랑받아야겠다, 대접받아야겠다’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타인은 나를 꺾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아상을 꺾어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우깁니까.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꿈 입니다. 자다가 경기 일으키는 아이를 보면 엄마는 얼른 깨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부처세계에 살고 있는데 중생이라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본래 이름은 아미타에요.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면 ‘응’하고 깨어나면 됩니다. 이처럼 나쁜 꿈을 깨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다투면서 사는 것은 내가 마음이 어지러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 뺏기지 말고 참생명으로 돌아가십시오. 우리는 본래부터 빛나는 생명을 살고 있지만 쓸데없는 근심걱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다리가 짝짝이라면 짧은 다리를 보지 말고 긴 다리를 보듯 남의 장점을 보십시오. 공양은 보시에 정성과 공경을 더하는 것입니다. 주는 마음으로 살면 그게 참마음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쟁. 평화로운 상태에서 남과 다투지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원효의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생명으로 돌아가라는 나무입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참생명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하고 해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로운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아요. 이처럼 참생각이 방해를 받으니까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나무나무 하십시오. 이렇게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나는 참생명인 부처생명으로 돌아갑니다. 부처생명은 남이 없습니다. 남이 없으므로 미워해야할 남도 없고 다퉈야 될 남도 없습니다. 원망해야할 남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한생명입니다.

나무나무하면 하늘에 낀 구름을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푸른 하늘이 나오죠. 구름이 꼈을 때는 푸른 하늘이 어디 출장 갔었나요. 하늘은 그대로 있었죠. 이처럼 아무리 우리가 중생이라고 우겨도 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무 아미타불하면 천지가 고맙기 한량없는 세계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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