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말 한마디가 큰 오해 불러
제삿날 하루만이라도 효도하고파

말 한마디
우리집 아래층에 살고 있는 애기 엄마가 아기를 업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애기 엄마는 내가 현대불교에 연재하고 있는 ‘바라밀 일기’를 즐겨본다며 만날 때마다 과찬이다. 그리고 신문이 나올 때마다 이번엔 어떤 글이 실렸을까 궁금해 하며 연속극 기다리듯 다음 글을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고맙기도 하고 과찬에 쑥쓰러웠다. 얘기엄마는 그동안 내 글을 모두 스크랩했다며 모아 두었던 스크랩북을 들고 왔다.
우린 평소에도 서로 잘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날은 더욱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고마움에 대한 표시로 부처님께 절 할 때 방석위에 덮개로 쓰라며 내가 물감으로 그린 깔개 하나를 선물했다. 이웃에 좋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복이지 싶다. 더구나 그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살았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 관심이라는 것이 곧 정성이며 사랑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나는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누군가 나의 글을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쓸 일도 가벼이 여길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요즘은 주변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고 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는 일들도 종종 있어 더욱 글쓰기가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2주 전에 썼던 병아리(구족이) 이야기를 읽은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서울의 아들 가족이 계란(유정란)으로 엄마 닭 없이 인공부화하여 태어난 병아리 세 마리 이야기였는데 신문사 편집자의 윤문 과정에서 글의 원뜻과 많이 달라지게 됐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글을 읽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들이 키운 닭이 병아리를 태어나게 한 것으로 잘못 묘사되어 지인은 아들이 닭을 키우느냐고 물었다. 또 추석날 데리고 온 병아리를 마당 있는 집으로 데려다 키우게 할 생각이었다는 말도 잘못 전달되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내가 아파트가 아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지인들 중에 글을 읽은 사람들은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주택으로 이사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 많이 당황스러웠다. 결국은 내가 글을 꾸며서 쓴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말이란 이렇게 글자 한자 잘못 전달되면 한 순간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아들은 현재 모 회사에 근무하고 며느리는 미술관에 근무하며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글자 한자에 그 사람의 삶이 순식간에 변해버릴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아무튼 그 글이 나가고 나서 나는 글에 대한 해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신문사측으로부터 사과도 받았다.
잠결에도 바른말 진실한 말로서 자신도 속이지 않는 정직하고 진실함을 생명처럼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기회가 됐다.

제삿날
몇 년 전 큰오빠가 홀연히 운명을 달리 했다. 오빠는 전 해부터 가실 것을 예감을 하셨던지 집안 식구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의 제사를 아들 셋과 세 며느리한테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며 지금부터는 제사를 모아서 지낼 것을 당부하며 대신 마음을 다해 정성으로 지낼 것을 당부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딸인 나로서는 섭섭함을 금할 수 없어 큰 오빠의 당부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출가외인이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그 다음해에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제삿날이 되어 친정집으로 가지만 이제 위로 어른들은 다 떠나시고 올케언니만 조카들과 함께 살고 있어 마음 한편 서글퍼지기도 하여 걸음이 무거웠다.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과 우리 내외 그리고 작은 올케언니랑 갖가지 과일과 제물을 사가지고 갔다. 과일을 가득 담으면서 유독 눈에 들어온 과일이 감이었다. 예전에 감 밭을 크게 해서 감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어릴 적 마당 한쪽에 손이 닿는 감나무 가지를 잡고 잘 익은 감을 하나씩 돌려 따먹던 기억이 났다.
우리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엄마도 오빠도 그 옛날에 참으로 즐겨 드셨던 감이었다. 특히 나무에서 홍시로 익을 때면 곱게 따서 소쿠리에 담아 제일 어른이신 할아버지 사랑방에 들여 놓으면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 올 때를 기다렸다가 사랑채에서 꼭 안채로 보내 주시곤 했었다. 오늘 문득 감을 보면서 어릴 적의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렇게 여러 가지 과일이 흔하지만 그 옛날 시골의 엄마들은 임신을 해도 신 음식이라곤 살구와 매실만 보아 왔기 때문에 다른 것을 먹고 싶다는 말조차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의 과일까지도 맘만 먹으면 먹을 수 있는 좋은 세상인데 몰라서 먹어보지 못했던 그때의 엄마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다. 제상에 가득 차려진 많은 음식과 과일들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니가 지금 이 모든 음식과 과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맛보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랐다. 그동안 불효만 한 것 같아 가슴 아팠는데 하루만이라고 용서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례대로 모셔진 위패를 향해 나는 한 분 한 분 조용히 모습을 떠 올리며 은혜를 기려보았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