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죽게 된다 할지라도 탁! 넘어설 줄 알아야

▲ 그림 최주현

모습 있는 자기는 모습 없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됩니다.
진짜로 믿어야 태평해지죠.
진짜로 믿어야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갖다 맡겨도
그게 진짜로 실천으로 옮겨지고
그게 법이 땅에 한데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공법으로서의 공용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공부 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겠죠?
문)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도 참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그러니 나를 알고자 하는 이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답) 여러분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듣기 싫은 말은 남편에게도 하지 말고, 여자에게도 하지 말고, 자식에게도 하지 말고 이렇게 인의롭게 슬슬 돌려서 좀 거북하게 걸리지 않도록 말을 잘해 주면서 안으로 굴리라고요. 안으로 굴리는 그 마음은 절대적으로 그쪽 마음으로 전달이 되거든요. 왜? 내가 그쪽을 생각하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선지식들도 부처님도, 역대 조사들이 다 마음과 마음을 전달해서 우리가 그 한마음이라는 거지,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한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진리라고도 할 수 없고 또는 묘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역대의 조사들이 어찌 스러져 가면서 불을 태우면서 온갖 노력을 다해서 그 공부를 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어떠한 공장을 하나 하든지 무슨 기술을 하나 배우든지 피나는 노력을 안 하고는 돈을 벌 수도 없거니와 기술도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헌 과목이든지 어떠한 부분이든지, 어떠한 기술이든지 어떠한 공장을 하든지, 어떠한 과학자든지 철학자든지, 뭐든지 하여튼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흥청망청 흥청망청 그저 해 나가다가 이렇게 보면은 그냥 흐지부지해 버리고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안이 망하듯이, 집안이 망하면 나라도 좋지 못하죠. 나라도 망해요. 인군이 마음이 흔들리면은 신하도 마음이 흔들리고 국민이 마음이 흔들리고 전부 안됩니다. 그렇듯이 이 몸에도 지금 내 오장육부 속의 세포를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다 내 한생각이 흔들린다면 그것들이 다 흔들려서 내 집안은 망하게 되는 거죠. 내 육신이 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작든 크든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또는 국가적으로나, 이것이 세계적으로 우주적으로 전체가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나투면서 아, 내 가정에 들어와선 가정, 내 몸으로 봐서는 내 몸, 또 사회에 나가선 국가, 이렇게 모든 것을 다양하게 해 나갈 수 있는 이 나툼이 옮겨다니면서 수없이 천차만별로 생각 생각 해 가면서 성품의 활용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공부 하는 여러분도 그렇고,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면…. 노력하는 것도 놔라 하는 것이 그걸 놓고 노력을 하라 이겁니다. 노력하는 것마저도 놓고 노력하라. 하지 말되 하고 하되 하지 말라. 안 하되 하고 하되 안 하라. 놔라. 놓되 해라. 이 모두가 우리가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각자 내 마음은 내가 아는 건데 내 마음도 내가 모르니까 그 마음을 알자고 해서 지금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도리를, 내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면은 참 세세생생에 우리가…. 한 말 항상 하지마는 그걸 모르면은 어떻게 될까요? 모르고 또 옷을 벗고 모르고 또 옷을 벗고, 좌천돼서 이 모습으로 저 모습으로 끌려다니면서 역시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돼요. 그래서 어차피 여러분이 사시면서 돈을 벌려고 피나는 노력 하는 거, 또는 살 양으로 노력하는 거, 그것을 떠나서 스님들처럼 노력을 또 해서 공부한다면, 똑같은 노력이라면 참 으뜸가는 노력이지요, 지름길이고.
그런데 ‘내가 그럼 지름길로 빨리 입산을 해야겠다. 그랬으면 좋지 않을까?’ 이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욕심도 없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에 있는 걸 버리고 내가 먼 데 있는 거, 좋은 거 찾으려고 하다가는 구덩이에 빠지거든요. 그런 인정, 도의, 사랑…, 이런 걸 모르고서야 어찌 도를 이루겠습니까? 앞에 있는 거 다 팽개치고. 옛날에는 사명 대사나 그런 분들은 다 팽개치고 갔다지만, 팽개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니깐 팽개친 거지, 환경도 되질 않는 걸 억지로 강제로 팽개치고선 내가 도를 이루겠다고 달아나가 봤자예요.
그 말 한마디 잘못 대답해 가지고서 여우의 몸을 받아 가지고 오백 생을 지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마는, 왜 울고불고하면서 간절히 그 여우 몸을 벗기려고 무척 앨 썼을까? 어차피 여우 몸으로 바뀌었다면 여우로서 이 우주를 통치해서 그냥 집어삼킨다면 여우의 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그 도리를 모르는 것보다도 더 위세하지 않을까? 내가 여우의 몸으로 이렇게 받으니까 고생이 되지, 여우의 몸으로서 받아서 여우로서 지내는 그 삶도 역시 내가 착을 버리고 여우라는 그런 생각도 없었다면 아마도 여우로서 온 우주를 활보했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면은 스스로서 모습도 아이, 여우의 모습만 되겠습니까? 어떤 땐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내가 무슨 모습이라고 할꼬?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할꼬? 이 세상에 구더기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구더긴들 어떠랴.’ 이겁니다. 구더기면 똥통 안에 들어가서도 구더기기 때문에 그 구린내가 아주 좋은 냄새로, 요리 냄새로 되거든요. 그러니 구더기로 된다고 애틋할 것도 없는 거죠.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까? 인과를 받아서 잘못될까? 좌천이 돼서 어떠한 모습으로 또 나오면 어쩌나? 또 앞으로 고를 받으면 어쩌나? 이런 것도 모든 걸 놔 버려야 해요. 순리적으로 물 흐르는 대로 흘러서 가지, 내가 뭐가 되든지 뭐 그렇게 걱정이 됩니까? 우리 인간으로서 보자면은 벌레를 봐도 ‘아유, 저거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사나?’ 이러지만, 파리를 봐도 ‘아유, 저거 저거.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사나?’ 이러지마는 파리는 파리 나름대로 재미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 염두를 두지 말고 모든 것을, 어떠한 것이 나에게 부닥친다 할지라도 모든 거를 자기 주인공에서 나온 거, 그 그림자니까 모든 거를 거기다 놔라 하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서 괴로워요
문) 저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서 너무 괴롭습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된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고 몸은 몸대로 축나고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저는 이렇게 복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답) 갖은 각색의 괴로움이 바로 적다 크다 그것뿐이지, 괴로운 건 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앞에 주어져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어느 집 어느 집 쳐 놓고, 내가 쭉 계속해서 한 30년 내려오면서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고 토론해 보고, 이러한 내가 아는 비밀만 해도 수천수만에 달해요. 참, 그 당대에 생기는 문제, 2대에 생기는 문제, 유전성, 인과응보 이런 문제 등등으로 인해서 오는 그런 인연, 그 인연줄을 끊지 못하고 얽히고설켜서 앨 쓰고 사는데, 그런 까닭에 가난도 거기에 좇아오거든요.
그래서 어려운 거 가난한 거 외로운 거 고독한 거 어떤 우환, 가환, 병…. 또 병도 그래요. 이것은 말로 할 수 없으리만큼 병들이 인간으로서는, 의학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병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나 많은 그런 걸로 인해서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급한 게 아니라 그 뿌리를 끊어 주는 게 시급한 것입니다. 뿌리로 인해서 그게 끊어지니까. 그런데 그것들은 모르고 ‘나는 지금 급해서 아주 발등에 불이 떨어지겠어서 왔는데 주인공 찾으래.’ ‘저이는 저 남의 급한 걸 모르니깐 그렇지 그래, 저 말이 나와?’ 그럴 겁니다. 분명히 그럴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어디로부터 온 거를 당신네들이 모르니깐 그렇지, 그게 어디로부터 온 거라는 걸 안다면 내 주인공 믿고 거기다가 맡겨 놓고 살아라 이겁니다. 모든 일체 만법은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가 맡겨 놓고 살게 되면은 바로 그 우환, 가환, 병 이런 것을, 모든 것을 용광로에 놓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새로 생산될 건 생산되고 바로 녹여 버릴 건 녹여 버리고 이렇게 해서 가환을 면하고 우환을 면하고, 가난을 면하고 내 마음의 지혜를 넓히고, 넓히면 넓힌 그 마음이 무기가 돼서 일체 만법을 자유스럽게 활용할 때에 내 근본의 인간이 거기에서 뚜렷하다.

이렇게 얘기해도 당장 급한 거 있으면 ‘그것 때문에 지금 죽겠는데 공부할 새가 뭐 어딨어?’ 그러시겠죠? 그러나 그게 바로 나로부터 나온 거니까 나로부터 거기에다가 모든 거, 그런 거 저런 것을 다 맡겨 놔야 그것이 녹아 버리지, 나로부터 생긴 건데 거기다 놓지 않는다면은 어떻게 그것이 면해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얘기예요.
그래서 석존께서도 육 년 동안 앉아서 그 모든 것을 고행하실 때 모두 항복 받았다는 얘기가 있죠? 항복 받은 것은 왜냐? 내 몸의 중생들, 모든 것이 그것이 자기가 공부하려니까 그게 모습을 바꿔서 자꾸 앞에 탁탁, 인연에 따라서 나오는 겁니다. 그게 다 자기 모습이에요. 그런 걸 부처님께선 ‘아, 이것은 바로 내 모습이로구나.’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다 항복을 받은 거예요. 자기가 억겁을 통해서 살던 그 습의 모습을 다 항복 받은 것입니다.
이 원점 한 점에다가, 입자 하나에다가 그냥 모두 몰아친 거죠. 그러니 항복을 받았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항복을 받을 것 같으면 우리 살아나가는 데 아무 지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렇게나 그냥 우연히 온 거고, 이렇게 이렇게 됐기 때문에 이런 병이 났다 이러는데 그건 이유일 뿐이에요. 모두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기 때문에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과학적으로도 그렇고, 요건 요렇고 요건 요렇고 요걸 내놔야 모두 그것이 아주 철두철명하다고 하는 거죠.
그러나 철두철명한 거는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안으로부터 철두철명해야 바깥으로도 철두철명한 거예요. 내가 안을 기필코, 눈이 밝고 청림하고 참, 오고 감이 없이 그 오관을 다 내가 부릴 줄 알아야, 소소영영하게 철두철명하게 찰나찰나 응용을 할 때 그것이 아주 참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모습도 허망한 모습이 아니라 영원한 모습이죠.
그러니 우리가 지금 그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거, 누구 탓하지 말고 모든 건 자기의 자원에 있다. 모든 건 거기에다가, 거기서 한 일이니까 거기에 놔라. 수억겁을 거쳐서 나온 어떠한 잘못, 과오가 있다 할지라도 거기서 한 거니깐 거기다 놓는 거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과학적으로도 생각하고 이론적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사람 하나가 어떠한 걸로 인해서 사람이 됐을까요? 중생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부처가 하나 났죠? 안 그럴까요? 여러분 그 사람이라는 그 속에 중생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중생이 그렇게 모여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의 사람이 성장된 겁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됐다면 그 중생들을 다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그 중생들을 이끌어 갈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는 이름만 가졌지 그건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인연에 따라서 중생들이 한데 모여서 내가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나왔다면은 그 수만 억겁을 거치면서 생활하던 그 습의 모습, 그것들이 모두 나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바로 한데 모여서 한 사람이 된 거거든요. 뭉친 거거든. 뭉쳐서 한 사람이 생산된 거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가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수억 개가, 억만 개가 그렇게 됐기 때문에 나라고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이건 무시하고, 내 속에 있는 생명들을,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는 일꾼들은 무시하고 자기 사장, 즉 말하자면 사람이라는 그 하나에서 자기가 산다고 하는 겁니다. 거기서 한 부분만 폐허가 돼도 자긴 죽는 건데 그걸 무시하는 거죠, 다.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중생들을 무시한단 말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하는 것도 바로 그 짝이에요. 위로는 자부처와 더불어 한자리 한 부처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자기 중생을 제도할 줄 알아야 네 중생 내 중생이 따로 없느니라. 네 중생 내 중생이 어디 따로 있나요? 그러나 내 중생을 모르고 내 중생을 이끌어 갈 수 없을 때엔 네 중생 내 중생이 아주 낱낱이 수만 개, 억만 개에 달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 억만 개의 모습이 여러분 안에 인과를, 응보, 유전 이런 것이 자기가 한 거만치, 그것이 자기가 사는 대로 일 년에 나올 수도 있고 당대에 나올 수도 있고 2대에 나올 수도 있고 그런 거죠. 그러니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될 만하면 안되고, 될 만하면 안되고,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죠. 이건 누구의 짓입니까. 모두가 자기가 한 거 만큼입니다. 자기가 해 놨기 때문에 그런 법이에요.

그러니까 하나하나를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말고 녹여라 이겁니다, 선이든 악이든. 그 대신에 악을 녹이려면, 인과를 녹이려면, 유전을 녹이려면, 업보를 녹이려면 바로 내가 한 거마저도, 내가 잘했다는 거마저도 놔야 그것이 놔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 못했다를 몽땅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을 생각해서 낱낱이, 참 주저주저하고, ‘야, 요거 조금 좀 낫게 되면 어떻게 해야겠다.’ 이러거든요. 그럼 벌써 이미 걸린 겁니다. 당장 죽게 된다 할지라도 탁! 넘어설 줄 알아야 돼요. 그래야 그것을 다 녹일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게 시급한 것입니다. 이게 놓는 거부터, 맡겨 놓는 거부터, 믿는 거부터, 물러서지 않는 거부터 이게 배워야 그것이 다 홀랑, 나중에는 다 점차적으로 “어, 이런 게 언제 이렇게 없어졌지? 어느 때 보니까 웃고 살게 됐어.” 이렇게 된다 이겁니다. 그런 업보의 인연줄이 없어야 바로 우리가 웃고 살 수 있고 항상 봄처럼 사시사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하게 살면 되지 꼭 관을 해야 하나요?
문) 사람이 진실하고 바르게 살면 될 것 같은데 스님들은 왜 자꾸 관하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답) 왜 관하라고 했느냐. 왜 관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살기도 어렵고 괴롭고, 하는 일도 그렇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많다. 그러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살아야만 되겠으니까 그렇게 해라, 이랬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자기 모습은 부모의 인연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지만 생명의 능력은, 생명력은 자기가 가지고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 원소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 생기면 바로 모습 아닌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되겠죠. 그게 ‘불성’입니다. 그것이 천차만별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바로 절대적인 에너지 처입니다. 그래 주처라고 그러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주처를 자기가 각각 그렇게 영리하게 쓸 수 있다는 그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이 몸도 공체고, 공체이기 때문에 속에 제각기 모두 분리돼서 작용을 하게끔 돼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몸뚱이 속도 한 지구와 같기도 하고 우주와 같기도 하다 이런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가 하고, 누가 고통을 받고, 누가 그 문제가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당하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됐기 때문에 자기는, 모습 있는 자기는 모습 없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된단 얘깁니다. 진짜로 믿어야 태평해지죠. 진짜로 믿어야 갖다 맡겨도 ‘너만이 할 수 있어!’ 이렇게 맡겨도 그게 진짜로 실천으로 옮겨지고, 그게 법이 땅에 한데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공법으로서의 공용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데는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 그대로,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하고 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못하죠. 못 쓰죠. 말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말을 못하죠. 또 사용하는 것도 마음대로 사용치 못하죠.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 있어요? 마음대로 하려면 그냥 그대로 자기의 실체를 그냥 알아야 되겠죠. 그게 어렵다고 생각지 마세요. 그냥 자기한테 원소가 들어 있으니까요. 자기가 있으니깐 들어 있고요. 그 원소가 없으면은 자기는 송장이 되는 거고요. 누구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어요, 모두가 다.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요. 먹고 자고 행하는 것을 도무지 못하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걷고 여러분이 행하시라 이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너만이 알게 해 줄 수 있어!’ 하고 자기 불성, 주인공을 자꾸 찾아보십시오.

환자를 진료할 때 맡겨 놓는다면…
문) 저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데요, 급하면은 간절하게 마음이 모아지면서 주인공과 통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보통의 경우는 그렇게 몰입이 되지 않고 그냥 환자가 잘 나았으면 하고 마음자리에 맡겨 놓는데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인지요.


답) 선생님이 간절하게 해서 그렇게 자꾸 되는 걸 안다면 진짜로 믿어지지 않습니까. 믿어지면 그렇게 안 해도, 그냥 생각만 해도 그렇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거기서 그 인체에 모든 것이 들어가게 되니깐요. 선생님이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들어가는 걸 모르시지만 선생님이, 즉 말하자면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열도 되고 스물도 되고요. 병자가 만약에 인체가 저거 해서 수술을 해야 할 텐데 이 거죽으로 수술은 할 수가 없고 안으로 들어가서 막힌 걸 떼어 내야만 되겠다 한다든가, 백혈병에 대해서 뭐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든가 이런 문제가 있으면은 그냥 그냥 자기 하나가 화해서 넷이 되든지, 그걸 수술을 하려면 셋 넷이 되어야 수술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그렇게 되어서 수술을 하고 나도 찰나입니다. 그걸 인제 대략 잡고 하시다 보면, 그걸 아시게 되면 그거를 도라고 하고 그러죠. 그러니깐 도란 말 없더라도 선생님이 진짜 그렇게 되셔야 되겠죠.
그러니깐 평소에 진찰하면서 마음이 급하지 않고 할 때에 이렇게 잘돼라,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건 그냥 ‘잘돼야 돼.’ 하는 거죠. 그 결정이죠. 그게 결정력입니다. 그래서 그걸 자기는 화해서 바꿔지는 걸 모르겠지만 그렇게 화해서 바꿔지기 때문에 인체로 들어가죠. 인체로 들어가서 수술을 하고도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해서 하나가 거기 지키고 있어도 무방하게끔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깐 선생님이 좁쌀 알갱이만하게 돼서 들어가겠죠. 좁쌀 알갱이도 아니고 흔적 없이, 들어가는 사이 없이 들어가겠죠. 그래서 그것이 묘법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깐 걱정 없고, 한다 안 한다 말도 떠벌일 것도 없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바로 선생님의 마음이 그렇게 돼야 그렇게 된다는 얘기죠. 그렇게 자꾸 실험을 해 보세요. 진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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