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삼가귀감 上-최동락 법사(방송통신대학교 강사)

▲ 최동락 법사는...성균관대학교 유학과 박사를 수료하고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 한문강사, 본각선교원 강사, 풍류서당 원장을 맡고 있다.

유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마음
따라서 마음 수양은 천성을 따르는 데서 시작

도가
마음은 우주ㆍ자연과 같아
방에 햇빛 들듯 자기를 비워내는 것이 마음 수양

이는 유상의 세계를 벗어나 무한한 마음이 되는 것
금강경, ‘응무소주 이생기심’과 상통


서산대사는 <삼가귀감>에서 “유가는 (마음의) 뿌리를 심었고(植根), 도가는 (마음의) 뿌리를 북돋우어주었고(培根), 불가는 (마음의) 뿌리를 뽑아버렸다(拔根)”고 했다. <삼가귀감>을 편찬한 서산대사가 살았던 당시는 유가의 독주로 타 종교와 사상이 통제되고, 임진왜란으로 혼란하던 시대였다. 국론의 통일과 백성들의 화합이 시대과제였고 이에 서산대사가 시대를 걱정하며 편찬한 책이 <유가귀감>, <도가귀감>, <선가귀감>을 합본한 <삼가귀감>이다. <삼가귀감>을 다시 조명해 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종교와 사상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금강경>과는 어떻게 회통될 수 있는지 알아본다.

1. 『유가귀감(儒家龜鑑)』
1) 유가의 심 -하늘을 받아들인 마음

유가에서 말하는 마음은 태어나는 순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란 원천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유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마음의 뿌리를 통하면 곧바로 그 근원인 하늘에 이르게 되고, 하늘에 이르는 순간 하늘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유가의 핵심 논리,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늘과 하나로 통할 수 있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의 근거가 된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늘과 일체감을 깨닫는 순간, 만물과도 더불어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하늘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다른 모든 존재 속에도 역시 하늘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중용>에는 “성(性)과 도(道)와 교(敎)의 세 구는 또한 이름은 다르나 실제로는 모두 같다”고 나와 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란 뜻이다. 도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개개인의 성을 아는 것이고, 교를 통해서 성의 도가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서산대사가 바라본 유가의 심(心)이란 천명(天命), 성(性), 중(中), 덕, 인, 경, 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한 마디로 하면, 바로 도심(道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2) 유가에서 마음 수양법 -마음속의 하늘알기
<유가귀감> 속 “지금 도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본성을 따르는 것을 이른다”는 말처럼 유가의 마음 수양법은 마음속에 뿌리내린 하늘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마음을 기르는 첫 걸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天性),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천성, 즉 도심을 밝히는 방법은 계구(戒懼)와 근독(謹獨)으로 마음속에 내재한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계구는 마음이 아직 발하기 전의 순수 무구한 허공과 같은 상태의 함양(涵養)공부를 말하고, 근독은 마음이 막 발하는 순간의 선악을 알게 하는 성찰(省察)공부를 말한다. 계구는 아직 일념(一念)이 일어나기 전의 공부(未發)고, 근독은 일념(一念)이 일어난 후의 공부(已發)다.
만약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욕심 없는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나오게 되면, 그 마음은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어 행동에 걸림이 없다. 이러한 마음은 저절로 남을 배려하게 만들고, 남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며, 결국 남과 더불어 하나가 되게 하므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행하는 수양법의 출발은 바로 마음속에서 순수 무구한 지선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하늘이 만물을 길러내듯, 모든 대상을 길러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남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도달처가 된다.
그래서 <유가귀감>에서는 “함양은 정(靜)의 공부이니 하나의 주재(主宰)가 엄숙한 것이요, 성찰은 동(動)의 공부이니 정념(情念)이 일어나자마자 깨달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미롭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고 지키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수양의 공부는 외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타고난 본마음을 함양하는 정(靜)의 공부와 외물과 접했을 때에 마음이 발하는 순간을 살펴서 바르게 응(應)하게 하는 동(動)의 공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무상(無相)’에 관한 구체적인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의 뿌리가 하늘로부터 근원하여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음이 밝아져서 그 근원인 하늘의 빛과 마음속의 빛이 하나가 될 때는 유상(有相)의 세계를 벗어나 무한한 하늘의 마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의 빛과 하나가 되면, 주렴계가 말하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이 된다. 이러한 경지에까지 마음이 이르러서 하늘과 같은 무한한 변용이 일어나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마땅히 주(住)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에서 그 본마음을 낼 수 있다”는 뜻과도 통한다.

2. 『도가귀감(道家龜鑑』
1) 도가의 심 -자연을 향한 마음

<노자>에서는 마음을 두고 “어떤 물건이 혼성(渾成)하여 천지(天地)보다 앞서 생겼으니, 지극히 크고 지극히 묘(妙)하며,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신령(神靈)스러우며, 한없이 넓고, 뚜렷하게 밝으나 방위로도 그 장소를 정할 수 없고, 겁수(劫數)로도 그 수명(壽命)을 헤아릴 수 없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억지로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 한다”고 했다. <노자>의 마음은 곧 도(道) 또는 대(大)인데 서산대사는 이를 심(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심이란 도라고도 할 수 있고, 도심(道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심은 시간적으로는 천지보다 앞서 생겼으나 그 수명은 무한하고, 공간적으로는 한없이 넓고 텅 비어 있으면서도, 늘 신령스럽고 환하게 밝다고 하였으니, 바로 우주(宇宙)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마음은 천지의 여관이요,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다”는 말처럼, 우주와 같은 도심 속에서는 천지 만물도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이 되는 것이다.
우주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으므로 자연(自然)이란 말과 같다. 자연인 우주는 본래 하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개개인이 바로 작은 우주이자 자연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신의 마음에 심어진 우주심(宇宙心)을 통하여 누구나 자연과 하나로 통할 수 있다. 그래서 <도가귀감>에서는 “이 마음은 나가는 데도 근본이 없고, 들어오는 데도 구멍이 없으며, 실상이 있어도 처할 데가 없으며,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다”고 말을 한다. 우주가 쉼 없이 움직이면서 다양한 자연현상을 일으키고 삼라만상을 길러내듯, 사람들의 움직임도 마음과 같이 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있고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고 없는 것이나,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심오하고 또 심오하여, 온갖 묘한 것의 문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을 통해 보면 노자가 말한 마음은 바로 도심이면서 여관이고, 우주면서 만물이 나오는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도심은 곡신 (텅 비어 있으면서도 밝고 신령스럽고도 묘함)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삼재(하늘·땅·사람)의 근본이 되고, 만물의 어머니가 된다.

2) 도가에서 마음 수양법 -마음에 펼쳐진 자연
도가의 마음수양법은 외물(外物)에 의한 모든 인연 작용을 끊어버리고, 오직 마음의 묘한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체인 도가 자연스럽게 덕으로 작용하여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그러므로 진인(眞人)은 한결같고 변하지 않는 기운을 안고 있다”는 말처럼, 자연을 본받아 진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한 자연과 천지에 흐르는 자연이 하나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도를 얻는 사람은 궁(窮)하여도 즐거워하고, 통하여도 즐거워하였다. 그가 즐긴 것은 곤궁(困窮)이나 영달(榮達)에 있는 것이 아니니, 곤궁과 영달은 바깥 물건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외물에 관계없이 스스로 자연인으로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수양을 하게 되면 “하늘은 덮어주지 않는 것이 없고, 땅은 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군자는 그것을 본받는다”는 말처럼, 사람은 마음을 확장시켜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즉 스스로 수양을 통해 하늘과 땅과 만물과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자연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저절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보면 『도가귀감』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마음을 받아 태어났으므로 자연과 한 마음이 되도록 확장시켜, 만물과 더불어 사는 것이 최상의 수양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으나 항상 선인과 더불어 하고, 하늘의 도는 말하지 않으나 잘 응한다”는 말과 같은 경지에 노닐게 된다. 하늘의 도는 곧 자연이고, 도심이다. 자연의 도는 각자 마음에 내재한 도심을 따라 선(善)한 행위를 한 사람과 함께, 그 선한 행위에 응할 뿐인 것이다.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무엇을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행동에서 본래의 선한 마음이 드러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도가에서 선을 따라 응(應)한다는 것은 바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한 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은 “빈 골짜기는 잘 응해주고, 빈 방에는 햇빛이 밝다. 사람이 능히 자기 몸을 비워서 세상에 놀면 누가 능히 해롭게 하겠는가”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비움의 방법이다. 항상 자신의 욕심을 비우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밝은 빛과 같은 자연의 마음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유가에서, “미발시(未發時)의 순수 무구한 지선의 마음을 보존하고 있으면, 외물에 응하여 발하는 순간에 저절로 외물과 화합하게 된다”는 말과 같다. 또한 <금강경>에서 말하는 “마땅히 주(住)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에서 그 본마음을 낼 수 있다”는 말과도 통하게 되는 것이다.
<도가귀감>에는 “세상에서 작록(爵祿)에 얽매인 사람은 그 좋아하는 바로 인하여 얽매이는 것이다. 내가 만약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만물 밖에 벗어날 것이니, 누가 얽맬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 순간순간 이어지는 삶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이는 것은 바로 세속의 작록을 잡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잠시 스쳐가는 하나의 외물 현상일 뿐인 작록을 잡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사람은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극(無極)으로 세우고, 태일(太一)로서 주관하면, 움직임은 물과 같고, 고요하기는 거울과 같고, 응하기는 메아리와 같게 된다”는 말처럼 스스로 마음을 거울 같이 맑게 하여 무극으로 비워서 사물에 응하게 하면 된다. 이 말을 『금강경』에 대비해 보면, 무극(無極)이란 무상(無相)과 같고, 태일(太一)은 무주(無住)와 같고, 메아리와 같이 응하는 것은 묘유(妙有)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계속>
이 원고는 본각선교원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미리 간추려 소개한 것입니다. 본각선교원 (02)762-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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