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ㆍ법성 이해해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워져야
연성ㆍ법성 이해해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워져야
  • 정리=배현진 기자
  • 승인 2013.10.1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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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 일요가족법회-종범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많다’는 말이 부족할 만큼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나고 죽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명이 되는 것도, 제대로 마무리를 짓고 가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때문에 죽는 게 끝이 아니라 하루하루 잘 사는 게 잘 죽는 일이라고 종범 스님은 이야기한다. >

숨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아냐
타인에게 남아있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질 때 비로소 죽음도 완성되

나이 들면서 노욕ㆍ억담ㆍ중담 금해야
나이듦은 문 없는 벽을 들이받지 말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거라 생각해야


▲ 종범스님은...통도사에서 사미계와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1년 통도사 강원 강주를 지냈으며,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를 지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를, 그 후 중앙승가대 총장을 역임했다. 한국불교학회 이사, 조계종 개혁의회 의원, 삼보법회 교양대학 학장, 제5대 승가원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다.

태어나는 데만 30년, 그 후는 늙어가기 마련
오늘 법문은 인생과 인성이란 주제입니다. 경전에서는 인생의 과정을 생로병사로 설명했습니다. 생에는 태생이 있고 출생이 있고 생성이 있습니다. 태아가 처음 생겨나는 것을 두고 태생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출생이라 합니다.
우리는 나이 계산을 할 때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여기죠. 이는 태아로 있을 때부터 한 살로 친다는 건데, 나이 계산을 만으로 하는 건 출생이 전제 됩니다. 보이는 데 나이를 맞추는 거니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는 생명으로 보지 않는 거죠.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아를 두고 벌어지는 생명존중 논란은 몰상식한 이야기입니다. 태아나이를 한 살로 보는데 이것을 생명으로 보느냐 아니냐는 말 자체가 안 되는 거죠.
그러나 태어났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닙니다. 눈도 뜨고 귀도 열리고 걷기도 하는 생성기간,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30년 정도 걸리는 듯 합니다. 그래서 태아에서 그 후 30년까지는 '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늙습니다. 인생이 참 별 것 아니에요. 생 다음에 노입니다. 늙음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요. 늙을 노(老)자에 익을 숙(宿)자를 써서 노숙기가 있고 쇠약할 쇠(衰)자를 써서 노쇠기가 있습니다. 30, 40, 50대까지는 노숙기입니다. 점점 인생이 익어가는 거에요. 그러나 나이 60이 넘어서부터는 노쇠해집니다.

죽음의 5단계
이제 병과 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병과 사는 같은 것입니다. 병이 나면 죽는 신호라고 보면 되는데, 병이 나서 살아나는 건 그건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것입니다. 병이 나면 생존할지 사망할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굉장히 오래 걸립니다. 죽으면 다 끝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일시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는 5단계가 있습니다. 제 1차적인 죽음이 숨지는 것입니다. 숨이 죽는 거고 목숨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체온이 식습니다. 몸이 싸늘해지는 그것이 2차 죽음입니다. 그 다음 3차 죽음은 몸에 수분이 다 빠져나갑니다. 마지막에는 백골이 흙이 돼서 날아가는 단계, 그것을 4차 죽음이라 합니다. 5차 죽음은 평소 자신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러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 기억마저 사라졌을 때, 그것을 두고 5차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이야기 할 때, 죽고 나서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까 하고 생각해보는 죽음에 대한 철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죽은 후에도 살아 있을 수 있어
어떤 사람이 평소에 잘 살아서 천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기억 혹은 좋은 기억으로 남겨지느냐, 이것이 죽음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이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만 하더라도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내는 이유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를 기억한다는 의미입니다. 고손자의 기억 속에는 고조할아버지가 살아있으니까요. 그러니 죽는 것을 함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떻게 죽느냐,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남겨지느냐에 따라 죽음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나이듦과 3고(苦)
노인에게는 빈고, 병고, 독고라는 3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빈고는 가난함에서 오는 고통이고 병고는 말 그대로 병들어서 생기는 고통입니다. 늙으면 별별 병들이 다 오기 마련입니다. 병원에가면 노인들이 참 많습니다. 오래는 사는데 유병장수를 하죠. 그리고 독고는 고독입니다. 사람들이 대개 노인을 싫어하기 마련인데 여기서 오는 외로움이죠. 이 세 가지 고통을 노인들은 지혜로서 소화해야합니다. 그래야 죽은 다음에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외롭거나 아프다고 생색을 내며 주변을 괴롭힌다면 사람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겠죠.

나이듦과 3금(禁)
그리고 나이를 들어가며 주의해야 ‘3금(禁)’이 있습니다. 첫째 노욕(老欲)을 금해야 합니다.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하려 하는 것을 노욕이라 합니다. 2-30년 걸릴 사업인데 당장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를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노욕입니다. 혼자 하지도 못하면서 꾸역꾸역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이어지는 일, 노욕입니다. 책임도 못 지고 감당도 못하고 제대로 하지도 못할 일을 자꾸 벌리는 거죠.
두 번째는 추억 억(憶), 말씀 담(談)자를 써서 억담을 금하라고 합니다. 현실생활과는 관련없는 왕년의 추억담만 계속 이야기해서는 곤란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젊은이들은 현재가 중요한데 노인들은 자꾸 과거를 중요시하니까요. 라면을 먹어도 맛없다고 할 수 있는데, 노인들은 ‘예전에는 그것도 못 먹었다’ 며 듣는 사람에게 핀잔을 주곤 합니다. 현재가 중요하지 왕년이 왜 중요합니까.
세 번째는 중담(重談)을 금해야 합니다. 계속 재방송만 하고 생방송은 하나도 없습니다. 새롭게 공부를 하면 생방송을 할 수 있는데, 그러지를 않으니까 같은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품격있는 노인이 되고 죽은 다음에 멋있게 기억이 되려면 이같이 해야 합니다. 말을 듣다보니 죽는 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연성과 법성
인생을 이야기했으니 이제 인성(人性)을 이야기해봅시다. 인생 자체의 성격, 인성은 연성(緣性), 법성(法性)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연성은 인연(因緣)과 맥을 같이 합니다. 씨앗이 없으면 열매가 없듯 심은 것을 거두는 인과 옷 조각을 꿰매서 옷을 만드는 연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처럼 인과 연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연성입니다. 우리 몸은 부모님한테서만 온 것이 아니라 태양, 물, 밥, 먼 인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유전되어 온 것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연성이라는 것입니다. 옷이 되기 위해서 많은 실올이 합쳐져야 하듯 우리 몸도 연성인 것이죠. 그렇기에 연성은 자성이 없는 무성입니다. 하나하나 조각으로 떼어내 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주먹에 자체 성격이 없는 것과 같아요. 손가락을 오므려야 주먹이 되듯 주먹은 그저 손가락과 손바닥이 모인 것입니다. 이것을 연성이라 합니다. 몸이란 것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손가락을 셀 때 엄지를 1번으로 둘 수도, 새끼 손가락을 1번으로 둘 수도 있어요. 인생이 1번이 되느냐 2번이 되느냐는 순전히 그 당시의 인연에 의해서 첫째 혹은 나중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연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둘에서 나왔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다섯도 없고 다섯이 없으면 하나도 없죠. 이게 인연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선생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법을 모르기에 열등감과 우월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인연법에 의하면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다음에는 법성을 살펴봅시다. 없다는 건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이는 곧 연성이라 하였죠. 유와 무, 하나와 둘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둘은 하나와 셋 사이에 있는 것이죠. 법성은 둘의 법성이나 셋의 법성이 원융무이상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뉘지 않고 다 통한다는 뜻입니다. 자성이 없고 다른 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삼았다는 거죠.
집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습니까. 건축자재와 장식품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집은 전부 다른 것으로 자신의 자성을 삼습니다. 법성이 이런 것입니다. 목탁에 구멍을 내기 전에는 허공이 없었나요? 구멍이 생김으로써 공간이라는 것이 생겨났나요? 목탁에 구멍을 만들기 전이나 후나 목탁의 자성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집짓기 전과 집지은 후가 다를 바가 없듯이요.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같다고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자성이 없는데 같다는 말과 다르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불생불멸, 법성 속에 사는데 생로병사만 보고 법성을 모름으로써 미혹해집니다. 죽지도 나지도, 하나도 둘도 아님을 깨달으면 그게 해탈입니다.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몸은 자꾸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는데 안 늙길 바라고 안 죽길 바라는 전도몽상을 꿈꾸지 마십시오. 이는 될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문이 열렸는데 열린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이 없는 벽을 자꾸 들이받아서 머리를 깨려는 미혹한 짓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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