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군부정권과 불교 그리고 아웅산 수치

네 윈, 쿠테타 이후 26년 군부통치
불교국교화 철폐 및 불교지원 중단
정부 주도의 불교통치 진행에 승단 반발
회유책으로 국립 불교대학 건립하기도

수치 여사, 1988년 대중연설로 민주화 앞장
가택연금시 위빠사나 수행하며 마음다스려
위나야 스님 가르침 하에 자비실천 서원
채식 등 불교적 삶 국민들에게 몸소 보여줘


1962년 쿠테타로 인하여 우 누의 시대는 마감하고 네 윈의 시대가 시작됐다. 네 윈(Ne Win :1911~2002)은 이후 1988년 7월 77세의 나이로 퇴진하기까지 26년간에 걸쳐 미얀마에 군부 통치했다.

네 윈은 우 누와 함께 미얀마의 현대 정치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두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미얀마 중부의 프롬 지방 출신으로 1941년 그의 나이 30세에 아웅 산과 함께 중국의 남쪽 하이난도(海南島)에서 군사훈련에 참가한 ‘30인 지사’의 일원이다. 나이는 아웅 산보다는 4살 위였으나 두 사람은 아주 각별했다고 한다. 그는 우 누가 수상일 때 부수상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종교성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8년 불교국교화 문제로 정세가 혼란스러울 때 군 총사령관으로서 우 누 수상을 대신해 내각을 맡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쿠테타 정권이 그러하듯이 네 윈은 이전 정부의 정책을 철폐하고 민심을 사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 대상은 불교 국교화로 추진된 정책들이었다.

먼저 불교국교화 철폐를 선언하고 헌법에 근거한 불교 지원을 정지시키고 ‘불교평의회’ 또한 해체시켰다. 방송에서의 불교 설법을 제한해 특정한 행사일에만 허용하였다.

더 나아가 쿠테타 이후 첫 해 동안은 외국인의 미얀마 불교 성지 순례도 허용하지 않았다. 1965년에는 불교대학과 불교승가 지원 법규를 모두 무효처리하였다.

또한 승단을 예속화하기 위한 시도로 정부 주도의 승려단체(Monks Union)를 조직해 승려증을 발부받도록 했다. 군부는 이와 함께 정권을 비판하는 승려들을 구금하는 동시에 많은 사찰들을 또한 폐쇄시켰다. 1년 뒤에는 승려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정부 기관인 종교성을 통해 승단을 관리하였다.

1980년에 이르면 군부는 승단의 통제를 본격적으로 단행한다. 앞선 1979년에 군부 주도로 승단 대표 승려 1,219명을 선출하고 다시 33명의 승려로 최고승가회의체(Supreme Sangha Council)인 ‘Sangha Maha Nayaka’를 결성한다. 승단의 통제와 예속화를 위해 승려들을 위계화시키고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이 단체에 의무적으로 등록하게 하였다. 이에 많은 승려들이 항의하고 거부하였다. 한 승려가 항의의 표시로 소신공양하자 결국 의무 등록은 철회되었다. 1985년에는 고등학교에 정규과목으로 불교를 도입하고 양곤과 만달레이의 불교 대학교인 ‘The State Pariyatti Sasana University’에 정부 지원을 시작하였다. 마찬가지로 파고다의 수리와 보수 그리고 증축 등의 불교진흥에도 나서게 됐다.

미얀마 군부가 1998년에 설립한 양곤의 국제 상좌불교 대학교
하지만 이러한 불교 탄압 정책도 오래갈 수 없었다. 이러한 조치와 시책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군부정권은 불교 지원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군부정권 또한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승단의 사회적 영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부정권은 차츰 승단에 대한 압박 대신 유화와 회유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전 정부와는 달리 불교에 주어졌던 많은 지원이 축소되었고 승단과의 긴장은 지속되었다.

군부정권을 이끄는 네 윈은 1965년의 승단 모임을 주도하면서는 스스로 불교 포교에 앞장 설 것을 밝히기도 했으며 1983~84년에는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맞은편에 네윈 파고다라고도 알려진 ‘Maha Wizaya’ 파고다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른 군부 실세들에게 여러 지역의 파고다 건립과 보수에 참여하도록 하기도 했다.

군부정권은 1990년 종교성을 불교 포교와 발전을 위해 재편하고 1998년 양곤에 국립대학인 국제 상좌불교 대학교(International Theravada Buddhist Missionary University)를 열기도 했다. 이 학교에는 다른 나라 학생들도 입학할 수 있으며 학비와 기숙사에서 숙식 등이 무상으로 지원됐다. 군부정권은 소수민족 지역에 불교 사찰과 파고다를 건립하는 등의 불교포교에 적극적이며 또한 2004년부터는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미얀마 선교를 공식적으로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1988년 이후 계속적인 정부 주도의 불교중흥 및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2007년 승려들이 주도한 ‘샤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이 일어났다. ‘샤프란’은 승복을 의미하는데 승복색깔을 내는 염료이며 향신료의 이름으로 군부정권이 승단을 통제하려했지만 그렇지 못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광주를 방문해 민주화운동 성지인 5·18 묘지를 참배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 수치 여사는 광주인권상도 수상했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과 아웅산 수치

미얀마의 현대 정치사에 있어 우 누와 네 윈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여사다.

수치 여사는 군부정권 당시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그녀는 미얀마 독립의 주역으로 전설적인 존재가 된 아웅 산 장군의 딸로 1945년 6월에 아웅 산 장군과 어머니인 킨 치 前인도대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7년 6월 아웅산 장군 암살당할 때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다. 1948년 독립 후 1960년에 인도 대사로 부임한 어머니를 따라 인도의 델리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에서 살다가 1988년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미얀마에 귀국하였다. 이 때 그 녀는 쉐다곤 파고다에서 40만 명이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데 이 연설로 그녀는 일약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그녀는 미얀마 민주화 및 인권 운동의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에도 방문해 5ㆍ18 국립묘지 참배를 참배하고 광주광역시 명예시민증과 광주인권상을 받기도 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영국인 남편에 의하면 아웅 산 수치 여사는 가택연금 시 수많은 불교경전을 외우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위빠사나 수행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으며 수행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 때면 U. Pandita 스님의 ‘In This Very Life : The Liberation Teaching of the Buddha’(불광출판사 번역 - <바로 이번 생애>를 읽으며 극복했다. 그녀는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불교를 새롭게 이해했다고 한다. 그녀는 미얀마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자유와 자비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10바라밀의 실천을 중시함을 알았다.

참고로 수치 여사에 영향을 미친 U. Pandita 스님은 원래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센터의 마하시 스님의 후계자였지만 독립하여 Paditarama 위빠사나 수행 센터를 세운 이다. 양곤의 Paditarama 위빠사나 수행 센터는 미얀마인은 물론 수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곳으로 네팔, 호주, 영국, 미국 그리고 한국에도 분원이 설립돼있다.

수치 여사에게 또 다른 큰 스승은 따마냐 서야도(Thamanya Sayadaw)로 알려진 위나야(U Winaya, 1910~2003) 스님이었다. 스님은 까렌 주(Karen State)에 주석하였는데 수치 여사가1995년 가택 연금이 해제되자 곧바로 찾은 이 이기도 하다.

수치 여사는 2002년 2차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뒤에도 위나야 스님을 찾아 가택연금 시 닦은 위빠사나(vippasana) 수행을 점검받았다고 한다. 수치 여사가 멀리 위나야 스님을 찾은 이유는 단지 수행에 대한 점검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위나야 스님은 오랜 사마타 수행 외에도 독자적인 불교공동체를 형성해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나야 스님의 불교공동체는 1979년 소박한 스님의 처소에 불과했다. 이어 갈수록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1980년 중반 300여 명, 1990년대 말 1000여 명으로 점차 불어났다. 1997년에 이르러서는 7000 명 규모로 공동체 구성원이 늘어났다. 이 구성원들에는 미얀마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미얀마의 여러 소수민족들과 인도인, 중국인들도 포함됐다. 특히 까렌(Karen)족 난민들이 4000여 명 공동체에서 머물고 있었다.

위나야 스님의 불교공동체는 군부 통치와 내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된 것이다. 불교공동체의 절에서는 2개 학교가 운영됐는데 13명의 승려교사들이 약 375명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위나야 스님의 불교공동체는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게 됐다.

위나야 스님을 친견하는 수치 여사
이 곳에서는 위나야 스님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채식문화였다. 위나야 스님은 자비의 실천을 강조했는데 그 실천으로 채식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권 스님들은 탁발문화에 따라 육식에도 걸림이 없었다. 하지만 위나야 스님은 예외적으로 채식을 고집했다.

이런 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불교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은 채식을 하였다. 불교공동체가 자리한 수행처로부터 사방 4~5Km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채식을 하여 식료품 가게는 물론 식당에도 육류 음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술이나 마약 등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자발적인 보시금과 가구당 한명의 울력으로 지역 정비 등이 진행됐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위나야 스님으로부터 자비실천과 사마타 수행 등 큰 영향을 받았다. 수치 여사는 위나야 스님의 영향으로 엄격한 채식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위나야 스님은 군부정권을 비판하고 수치 여사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군부정권의 어떠한 승직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초대에도 응하지도 않았다. 또 군부정권 인사들의 개인적인 접견도 허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95년 당시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국가 법질서 회복 1서기관(SLORC)이었던 킨늉(Khin Nyunt)이 위나야 스님을 접견하고자 찾아왔지만 스님은 사진촬영 조차 거절했다. 스님은 킨늉의 자동차 보시 또한 거절했다. 킨늉은 1984년 북한 테러범에 의한 양곤 아웅산 테러사건 시 정보국장(Chief of Intelligence)이었고 수상도 역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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