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자봉

원효와 의상의 보살핌으로 살아난 새
은혜 갚으며 시봉하다 성불해

시자봉은 염초봉과 백운대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시자가 사모를 쓰고 백운대를 향하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원효봉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시자봉은 경기도 고양시에 속하고 해발 712m의 가파른 암봉이다. ‘시자’라는 이름에 착안하여 근처의 원효봉, 의상봉과 연관지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원효와 의상의 은혜를 입은 새가 두 분을 시봉하다가 원을 이루고 봉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저는 시자봉 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냐구요? 궁금하시다면 제 소개를 좀 올릴게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래봬도 저는 성불한 것 같아요. 부처님처럼 크게 깨우친 성불 말고, 제가 간절히 바라던 원대로 이루어진 것도 성불이라고 해주신다면 말이죠.
저는 원래 경기도 남양만 출신의 작은 새였답니다. 참, 제가 살던 때는 우리 동네 이름이 남양만이 아니라 당항성이라고 불렸을 때였어요. 사람들 말로는 세 나라가 자주 싸우던 때라더군요. 제가 태어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엄마는 돌아가셨지요. 국경을 지키던 군인들이 심심함을 달래려고 돌 멀리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어느 군인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고는 그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어요. 나는 어리기도 했지만 그 돌이 제 다리를 스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 아파서 엄마의 죽음이 그렇게 슬프진 않았어요. 먹지 못하는 게 더 슬펐지요. 나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걷지도 못했기 때문에 며칠을 꼬박 굶고 있었어요. 자꾸만 잠이 오고 이러다가 곧 엄마 곁으로 가겠구나 생각하며 누워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스님 두 분이 제가 사는 숲에 오셨어요. 먼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그곳에서 묵기로 하셨어요. 당당한 풍채를 지닌 두 분이 우렁찬 목소리로 부처님이 어떠하시고, 신라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 분들의 불심이나 우정이 여간 깊고 큰 게 아니겠어요? 그 분들은 바로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었어요. 저는 이야기에 빠져 제가 아픈 것도 까맣게 잊었어요. 그 때 원효 스님이 저를 보시고는 안타까워하며 당신 품으로 안아 올리셨어요. 털은 다 빠져서 속살이 발갛게 드러나고 먹지 못해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저를 보시고는 수건에 물을 묻혀 제 입을 적시고, 바랑에서 밥 한 덩어리를 꺼내 잘게 부숴서 제 입에 넣어주시는 거예요. 그러자 의상 스님은 당신 옷을 조금 찢더니 제 아픈 다리를 감싸 주셨지요.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 생명을 구해준 그 분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두 분 스님은 저를 돌보시느라 이틀을 더 그곳에 머무르고는 예정과는 달리 각자 헤어져 다른 길을 가시는 거예요. 한 분은 다시 신라로, 다른 한 분은 먼 당나라로 가신다는 거였어요. 어느 분을 따라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다리도 완전히 낫지 않았기에 먼 곳은 무리가 될 것 같아 저는 신라로 가시는 원효 스님을 따르기로 했어요. 스님들은 제게 멀리 날아가 자유롭게 살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두 분 스님 곁에서 평생 심부름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두 분이 잠깐 헤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 분만을 따라간다고 해도 나중에는 두 분 다 모실 수 있으리라 확신했답니다. 원효 스님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멀리서 따라와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북한산이었어요. 스님은 봉우리에 앉아 날마다 수행하셨어요. 당나라로 떠난 의상 스님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지금의 원효 스님 봉우리 조금 위쪽으로 자리를 잡은 저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스님들 곁을 떠난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왜 제 얼굴이 스님 쪽이 아니라 백운대 쪽을 보고 있냐구요?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 두 분 모두 성격이 원체 깔끔하시거든요. 당신들 때문에 제가 수고를 한다고 여기시면 아마 두 분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실지 몰라서 그랬답니다. 저는 짐짓 백운대를 바라보는 척을 하지만 제 온 몸의 세포를 세워서 두 분 스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스님들이 수행하실 때 시끄럽지 않게 산새들 조용히 시키는 일, 스님들이 앉을 봉우리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나뭇잎이며 나뭇가지를 치우는 일, 스님들이 더워서 땀을 흘릴 때 바람에게 잠깐 다녀가 달라고 부탁하는 일, 추운 겨울 날 스님들 머리위로 따뜻한 햇빛이 많이 들 수 있게 구름에게 얼른 지나가 달라고 말하는 일 따위랍니다.
의상 스님께서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으로 오실 때는 제가 그 분 머리위에서 길을 안내해 드리기도 했어요. 물론 눈치 채시지 않도록 말이죠. 제가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제가 스님들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지요.
세월이 가면서 두 분 스님의 수행력을 보고 저도 함께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스님들 따라서 열심히 공부하면 나도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지요. 그 후로 매일 스님들이 정진하시는 시간에 저도 이곳에 앉아 기도를 했어요. 저는 원을 세웠습니다. “두 분 스님 곁에서 영원히 시봉할 수 있도록 천 년 세월에도 끄떡없는 바위가 되게 해주세요.”
어느 아침, 자고 일어났는데 글쎄 내가 바위가 되어있지 않았겠어요? 하늘을 날 때 보다 더 크고 깊은 자유가 느껴졌어요.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요. 고마운 마음이 너무도 깊으면 저 같은 미물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저를 시자봉이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큰스님 곁에서 심부름하는 바위라는 뜻이죠. 요즘엔 저를 파랑새바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뭐, 저는 무엇으로 불리든 상관없어요. 우리나라 불교의 큰 별이신 두 분 스님 곁에 이렇게 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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