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관음재일 법회 - 시명 스님(통도사 한주)

기도의 첫 번째는 중생,
두 번째는 깨달음을 위해
자기를 위한 기도는 마지막이어야

부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
부처님께 빌기 위함이 아니라
격려받기 위해 법당에 와야

▲ 시명스님은...통도사에서 경봉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통도사와 해인사 교무국장 및 ‘해인’, ‘등불’ 편집주간을 역임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수백 차례 이상 공연한 음성포교의 대표주자다. 불교텔레비전 ‘우리들의 찬불가’를 진행했으며, 불자들의 노래모임인 ‘불교성악회’ 회장을 역임했다. ‘청산에 드는 마음’ 등 음반을 발표했다.

참회하면 새 삶으로 건너갈 수 있다 했다. 좋은 것도 참고 나쁜 것도 참으라 했다. 일사불란, 번잡함 없이 마음을 탄탄히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스님은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 비움에 대한 불사가 먼저라는 시명스님의 법문을 들어본다.

올바른 원력을 세워야

불교에서는 원(願)이라고 하지 않고 원력이라 합니다. 원은 소망이지만 원력은 거기에 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원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한다고만 해서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보태져야 할 것은 바로 실천입니다. 원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살다보면 불행하고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원력을 세워야 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성불하길 바라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떤 바람이 있겠죠. 법당에 온 이유도 원하는 바가 있는데 내 힘이 부족하니까 부처님에게 격려 받으러 온 것일 겁니다. 세상사 헤쳐나갈 수 있게 용기를 주시고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겠죠. 그래서 뭔가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용기를 가지고 해낸 것입니다. 부처님은 도와주시는 거죠. 부처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그러니 절에 올 때 원력을 세워서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세 가지 회향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중생회향입니다. 중생을 먼저 건지겠다는 서원이 없으면 기도를 열심히 해도 반쪽밖에 안 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음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비로소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늘 세 번째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는 소승, 작은 배를 만들려고 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앞으로는 기도를 할 때 어디에 살든가 상관없이 빈자든 부자든 차별없이 기도하는 순간은 다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이 작은 기도가 그 사람들의 가슴에 가서 작은 소망을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 사람의 소망을 이루면 곧 내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관세음보살을 닮고 배워 관세음보살처럼 살겠다 다짐하는 것 아닙니까. 천수경의 근본은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는 데 있습니다. 비록 원수라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이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 끝에 ‘아버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보살의 염원이 이 땅에 널리 퍼지길 바랍니다’ ‘나 자신의 원보다 먼저 관세음보살의 원이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의 원력을 이루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 없는 곳이 바로 지옥

부처님은 우리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떠나길 바랐습니다. 왜죠? 그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문 입구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고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원한 고통으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혼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나를 지나가는 자는 온갖 희망을 다 버릴지어다

이처럼 지옥은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부처가 될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늘 고통을 받기 때문에 성불을 생각하기는커녕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절망스럽죠. 살아가는 데 희망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결국 지옥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알고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참회 없으면 새 마음으로 건널 수 없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참회를 하지 않으면 다음 순서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새로운 마음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잘해왔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고칠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잔에 물이 찼는데 새로 물을 채우려면 있던 물을 비워버려야 하는 게 이치입니다. 물이 꽉 차 있는데 더 채울 수가 없듯 우리 마음도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불사는 마음비움에 대한 불사여야 합니다. 집을 새로 지으려면 있던 집을 허물어야 하듯, 일상의 모든 묵은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참회하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됐구나, 이것이 장애가 돼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구나’ 하고 깨달으라고 합니다. 멀리 뛰기 위해서는 몇 걸음 뒤로 멀리 물러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뭔가를 하기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참회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참회가 없이는 새로운 삶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이참, 두 번째 사참을 해야 합니다. 이참은 ‘내가 왜 그랬지’하고 자기를 되돌아보는 마음입니다. 사참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참회(懺悔)라는 말 중 ‘참’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고 ‘회’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입니다. 참회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참회진언, ‘옴 살바못자모지사다야사바하’란 말은 ‘일체 모든 불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참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습니다. 조계사에 법문을 들으러 온다는 마음자체가 참회하는 마음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법당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께 근심 걱정을 던져버리고 가리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곧 참회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탄탄히 해야

우리는 법당에 와서 서로에게 성불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서 부처를 이루라는 말이죠. 과연 부처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마음을 고치면 됩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손안에 있듯,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새기십시오. 나쁜 마음은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복을 받으려면 자신부터 마음을 잘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1초 동안 75번이나 움직인다고 합니다. 컴퓨터가 계산하는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마음 즉 삼매에 들어가서 일체 움직임을 보지 못하면 일상이 평안해 집니다. 그리고 마음을 통일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햇볕과 돋보기로 불을 내려면 초점을 맞추어야 하듯이 마음이 하나로 정해지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마음을 제일 먼저 통일해야 합니다. 마음은 일심불란(一心不亂)이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 모습 가운데 하나인 준제보살은 일체 모든 근심과 걱정을 없애줍니다. 준제주를 독송하면 적정한 마음이 들어 어떤 어려움도 이 사람을 침노하지 못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무엇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공기 중에도 결핵균 등 온갖 균이 떠다니지만 건강한 사람한테는 붙지 못하죠. 설사 감염되었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은 능히 이겨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단단하고 견고하다면 어떤 것이 들어와도 비켜갑니다. 마음을 탄탄히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사바세계는 반쯤 반쯤 있는 세계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반쯤있습니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선도 악도 반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뒤엉켜 있기에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극락세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살지 못할 세계도 아닙니다. 세상살이가 반쯤은 살만하고 반쯤은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참을 줄 모르면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경봉스님은 참을 인자 세 개를 가슴에 새기고 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아야하는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좋은 것입니다. 나쁜 것은 고진감래라고 생각하면서 넘길 수 있지만, 좋은 것은 여간해선 참기 힘듭니다. 그러나 좋은 것도 많이 취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참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 만족한 삶을 살줄 알아야 합니다. 적은 것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거죠. 만족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행복합니다’라고 하루에 10번만 해 보십시오. 일심이 청정하면 일신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다신이 청정하며, 나아가 시방중생의 원각이 청정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그 울림이 전체로 가서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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