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문화예술 下-류종민 교수(중앙대 명예교수)

삼천대천세계를 부수면 미진
현대과학의 마이크로와 같아

풍부한 문화를 즐기려면
감성지(感性知)의 안목이 높아져야 

 

▲ 기계적인 천안이지만 인공위성은 지구에 있는 가정집 마당까지도 볼 수 있는 천안을 가졌다. 지구 꼭대기에서 찍었지만 세밀하게 볼 수 있는 대상은 지구만이 아니다. 다른 천체, 별 등을 볼 수 있는 천안이 나날이 발전해간다.

후오백세 계법의 시대와 문화예술
오늘날 말법 시대의 모습을 투쟁견고시대(鬪爭堅固時代), 다툼이 굳어져서 견고한 시대로 본다. 나라간, 개인 간에도 투쟁이 있는 쟁투의 시대다.
18세기는 칸트가 말한 이성의 시대였다. 거기에 더해 칸트가 말한 오성悟性이라는 개념은,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진리의 모습 그대로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중간에 있는 사유능력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지성의 시대로 흘러갔다. 지성덕분에 우주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인간과 지구라는 작은 안목으로부터 벗어나 무한, 다중우주를 인지하게 됐다. 여러 개 겹쳐져 있는 우주 중에 우리는 물질로 돼 있는 우주만 보고 있다. 우주 속 나란 존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나지 다른 우주에 내가 또 있다고 한다. 게다가 과거와 미래가 혼재돼 어디든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구류중생 중 무색은 색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닌 세계를 뜻한다. 부처님이 2천500년 전 말씀하신 이 이야기는 오늘날 비물질로 존재하는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과학적 자료로 증명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수한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이제는 감성의 시대다. 문화의 흐름을 잡고 있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는 연극, 음악, 영화 등 종합예술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감성이 연루되는 미적 세계다, 감성 그 자체로는 느낄 뿐이지 그걸 판단하지 못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은 존재하나 그 사람과는 별개의 세계로 인식된다고 말했다. 판단할 수 있는 지(知)가 감성에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부한 문화를 즐기려면 감성과 지가 합해진 감성지(感性知)의 안목이 높아져야 한다. 감상자가 작품의 반을 완성한다는 말이 있다. 작품의 반은 작가가 만들고 나머지 반은 감상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를 향수(享受)한다고 하는데 향수한다는 것은 영어의 enjoy에 해당한다. 단순히 즐기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름다움을 향수 할 수 있는 소양을 가지지 않으면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복을 누리지 못한다. 복지국가는 주어진 복을 향수 할 줄 아는 국민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리고 21세기는 통섭의 시대다. 이성, 지성, 감성이 합쳐지고 종교와 과학이 상보적이 된다. 물질, 정신, 마음도 모두 합쳐진다.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는 이원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녹아들어 융섭되는 원융(圓融)의 시대다. 그러므로 이는 쟁투의 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처럼 좋은 것들을 취해 시대를 끌고 가야 할 것이다. 어느 것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그 세계가 복된 세계가 될 수 있다.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문화적 해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은 무상정등정각이고, 어떤 중생도 다 갖고 있는 마음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자리는 멸도일체중생(滅度一切衆生)한 마음자리다.
일체 중생이 내 마음의 어떤 원인으로서 현현된 것이라면 내 마음이 멸도 된 다음 일체 중생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이 된다. 수많은 구류중생과 내 속에 있는 중생은 일치된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아상 때문이다. 아상의 벽이 무너지면 그렇게 보지 못한다. 멸도된 그 자리는 바로 부처님 광명이 임할 수 있는 자리고 마음의 곳간이 깨끗이 정화되고 텅 비어 어떤 빛도 그대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다.
아응멸도일체중생은 보살의 발원이고 행원이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대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은 저절로 발해지는 것이며 그 자리는 청정해서 바로 불국정토가 임하고 있는 그 자리가 될 것이다. 이제 올 문화도 이러한 고양된 마음과 정신으로 확장 된다면 무상정등정각의 문화는 인류문화 최상 최고의 문화가 될 것이다.

오안(五眼)의 문화적 해석
18분에 나오는 5안, 그중 육안은 물질은 보되 비물질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은 육근(六根)이라고 하는 여섯 뿌리의 첫째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작용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다음 단계의 천안天眼은 육안이 진일보한 눈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어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볼 수 있는 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간의 장애를 무화시키고 색즉시공으로 공화시켜 보는 것이다.
매체에 의해서 천안이 활용되는 것이 바로 멀리 있는 걸 볼 수 있는 텔레(tele)-비전(vision)이다, tele라고 하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을 보거나 말할 때의 형용사다. 텔레파시(telepathy) 역시 상대가 멀리 있어도 감정을 전송하며 이를 읽어내는 것이다. 공감(empathy), 연민(sympathy)도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안은 과학적인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눈이다. 시공간 속에 빛의 파장으로 입력 되어있는 걸 열어 보면 과거도 알 수 있다.
기계적인 천안이지만 인공위성은 지구에 있는 가정집 마당까지도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천체, 별 등을 볼 수 있는 천안을 가진 것이다.
지혜의 눈 혜안(慧眼)은 사건의 원인, 결과까지를 보는 눈이다. 천안에 대해서 해석하는 눈이며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보는 눈이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진리의 면모를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을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육안에 비해서는 진화된 정신적인 눈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원인과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을 연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혜안으로 사물을 비추어 보면 실상 이외에 염착할 것은 없다.
법안(法眼)은 객관적인 눈이다. 원인, 과정, 결과를 객관적으로 비춰보며 실상을 보고, 불안(佛眼)은 완전히 깨달은 전지전능한 눈이다. 이 눈에 비치는 모든 대상은 제도되는 입장에서 비추어 진다. 부처님은 미혹한 중생, 어두운 중생, 정신의 병을 앓는 중생, 어둠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생, 이러한 중생을 제도 하시려는 마음으로 보신다. 그리고 중생의 눈을 개안시킨다.
생명존중이라는 입장에서 봤을 때 인공적 가축사육의 피해가 재앙으로 나타나는 예는 많다. 먹는 사람이나 먹히는 동물이나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식도락이라는 인간위주의 문명을 자성하는 운동이 많이 일어고 있다. 제도를 받아야할 중생은 동물보다 인간일 것이다.

미진과 일합상(30분)의 해석
삼천대천세계를 부수면 미진, 아주 작은 단위의 가루가 된다. 티끌, 먼지며 오늘날 현대 과학에서 지극히 작은 세계를 일컫는 마이크로(micro)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한 덩어리라고 하는 현상계의 모든 모양들을 부수었을 때는 먼지와 티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는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화합으로 뭉쳐져 있는 가상(假相)이다. 영원히 뭉쳐져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생겨났다가 시간이 지난 후 부스러지기 시작해서 그 다음에 멸하고 만다. 유위세계에 있는 것은 전부다 인연 화합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주의 모습마저도 그러한 연기(緣起)와 인연화합의 모습이고, 또 그 인연화합은 까르마(업)에 의해서 그렇게 될 뿐이다.
삼천대천세계는 즉비 세계며 실로 있는 것이라면 일합상(一合相)일 뿐이다. 모양의 일합이라고 하는 것은 늘 현상계에서 변전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데 있어서는 그렇게 중시할 모습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법신여래의 견지에서 봤을 때 하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귀중하다.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요. 일귀하처(一歸何處)인가’ 는 화두로 쓰고 있는 말이지만, 하나로 돌아가는 자리 그것을 마음의 근본 자리라고 봤을 때 그 자리는 대단히 밝은 자리다. 여래의 밝은 당처일 것이다. 그랬을 때의 일합은 바로 뒤에 나오는 불가설(不可說)이다.

유위세계의 근원은 무위
지금까지 금강경과 문화예술을 개관하고 각분에 대한 연관 관계를 살펴보았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과제는 문화비평, 문화인류학, 신화학, 미래학, 전통문화의 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예술에 대한 연관도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각 예술의 범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근래 문명 담론에서는 문명과 문화에 대한 개념의 우위성에 대한 사적 고찰이 있었다. 문화는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전된다. 오늘날 종교는 문화와 연계되었지만, 이런 면에서 본다면 문화의 개념은 종교의 성격과는 다소 다르다.
금강경을 문화의 범주와 연계시키는 초점을 금강경의 무위와 무유정법의 상승법에 맞춘다면 현대문화예술의 지향점도 명료해 진다. 모든 유위세계의 근원은 무위다. 유위의 예술이 그 근원인 무위를 발견하고 본질에 접근해 감으로써 그 의미를 근원적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창작자의 입장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예술의 향수를 창달해 가는 대중이 고양 될 때 가능한 것이다.
굳어진 가식의 자아가 사라지고 일체중생이 멸도된 무아의 참나가 밝게 빛나는 여래의 여여한 세계, 다함없는 시간과 공간속에 빛살로 다녀가는 생명의 본모습을 보게 하는 금강경은 문화에 다함없는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이 원고는 본각선교원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미리 간추려 소개한 것입니다. 본각선교원 (02)762-4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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