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뿌리에서 모든 걸 이끌어 간다는 것을 믿으세요

▲ 그림 최주현


우리는 한 치도 에누리가 없는
아주 정확한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시대는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중용을 하고 돌아가야만이 자유를 느끼며 살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물질계의 50%만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걸림이 많은지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의 진의를 완전히 터득해서 알아야만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 가르친다는 건 아닙니다. 나는 심부름만 할 뿐이지 내가 말하는 것도 없고 내가 하는 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우리가 다 죽는다 하더라도 불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서 우리가 다 죽는다 하더라도 불교가 끊어지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음의 근본이 삼천대천세계의 근본과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까닭은 직결이 됐다는 얘깁니다. 우주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법에 의해서 바로 우리들 마음에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돌아가고, 즉 말하자면 우리가 공생(共生)이며 공심(共心)이며 공체(共體)며 공용(共用)이며 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치도 에누리 없는 아주 정확한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상대가 없을 것이고 상대가 없다면 세상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옛날 얘기가 있지요. 소가 가다가 언덕을 보고서 비비니까 언덕이 하는 소리가 “허허! 언덕이라는 내가 있기 때문에 소가 나한테 와서 비비는구나.” 했답니다. 그래서 소의 탓을 하지 않았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는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오계향(五戒香)이, 다섯 가지 계향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 계향(戒香) 할 때, 모든 것을 잘못 생각하고 가기 때문에 마음과 육체가 따로따로 흩어지는 겁니다. 물질세계에서 겉으로만 계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모두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내 마음으로써 채찍을 삼고 모든 권속들하고도, 사형 사제들하고도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행동으로 모든 것을 해 간다면, 그리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생각한다면 마음의 계향이 되어 스스로 지킬 수 있게끔 마음의 자세가 슬기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나 아닌 나로부터 가야지 나를 세우고 내가 했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가 한다고 생각한다면 안 됩니다. 나를 빼지 않는다면 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우리 몸뚱이가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서 있는 것입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지수화풍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수화풍으로 뭉쳐졌고 지수화풍을 먹고 삽니다. 그리고 또 지수화풍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주어져 있습니다.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이 한군데서 나오는데 바로 좋은 마음으로 바꿔 쓸 수만 있다면, 우리들에게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광력도 전력도 자력도 통신력도 충만하고 자유스럽게 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안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가져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없으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 자체가 업식이 돼서 자기 영혼과 더불어 같이 그림자처럼 따라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다시 돌아서 미래를 향해서 현재로 다시 왔습니다. 다시 왔는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그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된 겁니다.
지금 세상에는 컴퓨터를 사람들이 입력을 해서 쓰지마는 우리에게는 바로 오신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의 속을 아는 것이며,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참으로 알 수 있는 것이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이며, 심안으로 보는 것이며,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이며, 자기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아는 것,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는데, 다섯 가지를 다 한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 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숙명통과 더불어 다섯 가지가 한데 합쳐져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력이 돼 가지고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마음의 도리를 모른다면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한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입력이 된 데다 다시 놓지를 않아서 다시 입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나오는 대로, 나오는 데다가 우리가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면서 새 입력이 들어간 대로 새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력된 것이 현실로 나오는 데다 되놓지 않는다면, 즉 말하자면 유전성 세균성 업보성 영계성, 이 모두를 아마 면치 못할 겁니다. 거기에 얽매이고 얽매여서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그 모든 고의 테두리에서, 또는 업의 무명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자기가 팔자 운명도 마음대로 못할 것이요, 또는 세균성이 와도 영계성이 와도 업보성이 와도 유전성이 와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 도리를 알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나온 데다가 되놔라. 나온 데다가 믿고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바로 구정물을 새 물로 바꿔 쓰는 거와 같다 이 소리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광대무변하면서도 그렇게 엉뚱하게 전락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악업 선업이 과거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과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과거가 현실이고 미래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 각자 몸뚱이 속에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올 때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다시 자기 영혼과 더불어 같이 혼합이 돼서 그림자처럼 따라갑니다. 즉 말하자면 자기를 자기가 형성시키고 싶어서 어느 부부의 정자 난자를, 몸을 빌립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를 그렇게 형성을 시켜서 바로 자기 모습을 앞장세워 이 세상에 나와서, 자기가 집을 짓고 그 안에 자기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자기가 살고 있으니까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자기의 영원한 근본이자 바로 불성이자 뿌리인 것입니다. 나무뿌리로 비유한다면, 우리는 나무뿌리가 있는 것을 아는데 나무는 자기 뿌리가 흙에 덮여 있기 때문에 못 봅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도 자기 뿌리를 자기가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상대를 놓고 기도하고 빌고 온통 야단법석이니 그렇게 해서는 자유스럽게 마음을 발전시키면서 창조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또 정신계와 물질계를 혼합시켜서 같이 중용을 할 수 있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길을 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나무 살자고 남의 뿌리에다가 아무리 기도를 해 봤던들 그게 성립이 될 것 같습니까? 남의 나무를 쳐다보고 남의 나무뿌리를 쳐다보고 내 나무를 키워 달라고 아무리 빌어 봤던들 그거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뿌리부터 보십시오. 자기 뿌리부터 믿으십시오. 자기 뿌리부터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서 이끌어 가는 줄 아십시오. 차가 가려면 운전수가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운전수가 기름이 떨어지면 기름을 넣고 고장이 나면 고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운전수는 바로 양면을 다 움켜잡고 차를 몰고 조심스럽게 다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바로 육신과 영원한 근본인 뿌리와, 즉 말하자면 생명의 근본 뿌리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마음을 내는 법, 이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시공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지금 화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살림살이가 바로 자기의 주인공입니다. 여러분은 걸음을 걸어올 때나 일을 할 때나 고정되게 일하는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없고 먹는 것도 없고, 모든 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이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면서 바뀌면서 이렇게 영원히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란 그렇게 엄청나고 광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딴 종교에서는 마귀 소굴이라고 부르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학술적인 이론만 가지고 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눈감고 앉아서 그냥 귀신 놀음 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서나 앉으나 모든 게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이 부처님 법에는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눈을 감았으나 떴으나 똥을 눌 때나 먹을 때나 모두가 참선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몸 안에 수천수만의 생명들과 의식들과 모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진화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봅니다. 지수화풍도 한데 합쳐지기 이전에는 암흑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합쳐지니까, 화목하게 합쳐지니까 밝은 세상이 왔다고 봅니다. 밝은 세상이 오고 생명체들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거를 못 믿겠거든 우리의 몸속을 한번 보십시오.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겁니다. 생명들이 그렇게 진화돼서 쫓고 쫓기면서 수많은 모습으로 나투어 가면서 바뀌어 가면서 이렇게 인간까지 왔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중생들이 돼서야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다가 여러분은 만날 각자 내가 살고 내가 줬고 내가 잘하고, 이러고 있는데 ‘나’라는 존재는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몸뚱이는 육신 속에 있는 생명체들의, 즉 자생중생들의 집합소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심부름꾼이요 관리인입니다. 이 몸뚱이는 바로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 부처님께서도 또 사대 성인들께서도, 많은 조사들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죠. “얘, 배를 타고 저 강을 건너가는데 중생들이 배 안에 잔뜩 탔으니 선장이 노를 똑바로 잘 저어서 나가야만이 그 강을 건널 수 있느니라.”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문수보살이 유마힐 거사한테 병문안을 왔을 때 유마힐 거사가 “중생들이 다 나아야 내 몸이 낫겠노라.” 한 뜻을 여러분 한번 잘 새겨 보십시오. 여러분 몸 안의 자생중생들이 병이 나아야 여러분 몸이 건강하죠. 외부의 중생들을 다 건진다는 게 아니라 내 중생들을, 내 몸속의 중생들 병이 다 나아야 내 몸이 건강하다는 얘깁니다. 내 자생중생부터 제도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위로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평등공법 봉에 모두가 한자리를 하고 있어서 바로 거기에 직결돼 있고 한도량에서 분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력이나 금속이 어디든지 쓰이지 않는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여러분이 만약에 그 도리를 안다면 일체제불의 마음이 바로 여러분의 각자 마음을 통해서 바로 몸속의 모든 생명체들이 천백억의 보살로 화해서, 바로 천차만별의 응신으로 나투면서 천차만별의 중생들한테 자동적으로 조건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천백억이라면 바로 숫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딴 데 가서 묻지 마세요. 부처님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없으면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없으면 여러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가는 거는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몸속에 있는 자생중생들을 제도를 하려면, 거기서 악업도 나오고 선업도 나오고 잘못하는 일도 나오고 강도짓도 나오고 선행도 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작용이 거기서 다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하고 믿고 거기다가 다 놔야만 합니다. 병에 걸려도 ‘너만이 네 몸을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몸이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몸뚱이 속에서는 내면의 모두가 작용을 해 줍니다.
즉 말하자면 인간이 ‘내 뿌리인 바로 내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다.’ 하고 생각을 했을 때 바로 마음으로부터 대뇌를 통해서 소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결정을 지어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사대로 통신이 되면 사대에서 통신을 받고 다 작용을 해 줍니다. 안에서는 그렇게 작용을 해 주고 또 바깥으로는 세포의 생명들이 화해서, 이 지구에서 레이더망으로 역할을 하는 거와 같이 혹성과 같은 내 몸의 모든 세포에서 작용을 해 줍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의식들이 전부 나가서 마음을 조정하고,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면서 내 가정을 조절하고 또 사회를 잘 조절합니다. 이렇게 잘 이끌어 나가는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세포입니다. 이 세포가 바깥에서 세균성이 들어오는 것도 막습니다. 이것도 내 마음에서 벌써 입력을 해 놔야 됩니다. 내 마음에서 내면으로다 입력이 항상 돼야 되는데, 1년을 해 놓든지 2년을 해 놓든지 그건 자기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력을 해 놓으면 거기에서는 세균성을 막고, 또 들일 건 들이고 내보낼 건 내보내고 체로 치는 역할을 합니다. 통신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잘 파악해서 들이고 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통신하고 조달을 하는 것이 이 세포의 모든 소임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 마음 도리에서 ‘하나’를 안다면 ‘하나’로 돌아가는 걸 알고, ‘하나’로 돌아가는 걸 안다면 바로 너 나 없이 전체가 같이 돌아간다는 걸 알 겁니다. 이 내면으로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그게 누구라고 보십니까. 여러분이 아닐까요? 여러분 한 몸뚱이 속에 수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는데 내가 밥 한 그릇을 먹는다면 혼자 먹는 것입니까, 그게? 혼자 듣는 것입니까, 혼자 보는 것입니까, 혼자 하는 것입니까, 혼자 사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혼자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했단 말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 몸뚱이 속에 그 많은 생명의 의식들이 바로 더불어 나인 고로 내가 혼자 나라는 걸 세울 게 하나도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다가 외부적으로도 나를 세울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만사,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몸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어찌 내가 했다고 하며 내가 잘한다고 하며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내가 한 말이 하나도 없고 내가 생각한 것조차도 없느니라. 나의 고깃덩어리를 믿지 마라. 나를 따르되 나를 믿지 말고, 너부터 믿어서 너부터 알면 바로 과거의 부(父)를 현재의 자(子)가 상봉케 되느니라. 상봉케 된다면 바로 너를 지도할 수 있는 자성부처가 바로 너를 이끌어 갈 수 있으며 바로 서로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면서 점검을 하면서 일체 모든 만물을 보고 깨달을 수 있고, 병풍 둘러치듯 둘러친 이 세상이 팔만대장경에 속하느니라. 너만 못한 게 하나도 없으며 너만큼 또 잘난 것도 하나도 없느니라.” 하셨던 겁니다.


이 모두를 우리가 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 자체가, 내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부딪친다는 것을 알고 상대를 탓하지 말고 상대를 원망하지 말고 상대를 증오하지 말고, 가정에서도 그렇고 마음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저 사람의 주인공이나 내 주인공이나, 저 사람의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둘이 아니니 바로 내가 나왔기 때문에 나한테 부딪치는 거니까 모든 것을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믿어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모두가 얽히고설켜서 살림살이를 해 나가는데, 상대가 잘못하더라도 자식들에게 욕을 하지 말고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모든 건 거기에 맡겨 놓으면서 마음으로 잡아야지 말로 몸을 잡으려고 한다면 몸이 잡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의해서 몸이 움죽거리지 몸으로 인해서 마음이 움죽거려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어서 마음으로부터 바로 몸이 움죽거리고 생명의 근본으로부터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이 병이 나거나 일가친척이 병이 나거나 내 식구들이 병이 났어도, 주인공은 둘이 아닌 거를 알고 내 주인공에다가 ‘너만이 낫게 할 수 있다.’ 했을 때에 그게 즉각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말이지마는 병이 나서 아팠을 때 주인공에다 맡겨 놓으면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찰나찰나 내 마음을 통해서 나투십니다. 이 말을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이 모든 마음들이, 내가 병이 나서 주인공에다 맡겨 놨을 때는 여기가 일체제불의 마음이 올 수 있고 갈 수 있게끔 하는 통신처입니다, 통신처. 내 집에 전화를 놓지 않는다면 전화가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듯이, 내 집부터 전화를 놓아야 되듯이, 내 주인공의 뜻을 세워 놓지 않으면, 선을 세워 놓지 않는다면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병이 나서 거기다 맡겼을 때는 바로 한 찰나에 이 몸속에 들어 있는 자생중생들이 약사 보살이 돼 가지고 병을 낫게 하는 의사가 되고, 또 가난하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주인공! 당신만이 이거를 대치해서 해 나갈 수 있잖아.’ 했을 때는 관세음이 되시고 ‘아이고, 명이 짧아서 어쩌나.’ 하고 거기다 맡겼을 때는 칠성이 돼 주시고, 또는 ‘아이고, 좋은 데로 가야 할 텐데,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면서 주인공에 맡겼을 때는 지장이 돼 주시고, 또 마음에 물리가 터지지 않아서 애를 쓰고 거기다 맡겼을 때는 동방의 아촉이 되고,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물리가 터지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둘 아니게 지켜볼 수 있는 관법을 잘 알아야지.’ 한다면 바로 아미타가 돼 주십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각자 마음속에는 기묘한 법이 있으며, 아까도 얘기했듯이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을 여러분이 충만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쓸 수 있다 이런 소립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