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불교리더스포럼 - 고우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 고우 스님은...청암사 수도암에서 출가했다. 봉암사, 묘관음사, 범어사 등 선원이나 암자에서 수행 정진해 왔다. 조계종 총무부장, 전국선원수자회 공동대표, 조계종 원로의원 등을 역임했다. 2008년에는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현재는 봉화 문수산 금봉암에 주석하며 조계사 선림원 증명법사를 맡아 간화선의 생활화와 사회화에 주력하고 있다.

불교는 하나입니다. 재가불교 출가불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단의 자정과 쇄신에 대해 재가불자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대해서는, 스님된 입장으로서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려면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목적도 분명해야 하죠. 불교의 방법과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부처님이 여러 말씀을 하셨지만 그 속에는 공통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불교의 핵심, 중도입니다. 선, 교학, 율 등 불교에 접근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지 핵심은 중도를 이해하고 생활화 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중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도로 일구는 불교의 생활화
선은 이론보다도 체험을 목적으로 합니다. 달마대사의 스승인 반야다라존자는 중도를 선의 입장에서 말했습니다. 반야다라존자가 교학이 융성한 남인도 향지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다른 스님들이 국왕 앞에서 독경을 하고 있는데 반야다라존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고 국왕이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존자는 “숨을 내쉴 때는 대상에 물들지 않고 숨을 들이쉴 때는 나라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독경법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라는 데 머물지 않으면 대상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라는데 끄달리기에 좋은 일을 접하면 기분이 좋고 나쁜 일에는 역시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경전을 많이 읽는 것이 불교의 생활화가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어떤 마음으로 생활할 것인가하고 참구하는 것입니다. 숨 쉴 때 조차요.
천수경이든 금강경이든 우리가 경을 읽는 목적도 이와 같지요. 안으로 내안에 머물지 않으면 밖으로도 끄달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밖으로 끄달리지 않으면 나에 대해서도 끄달리지 않습니다. 둘이면서 하나죠. 이것이 곧 불교고 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중도의 생활화, 중도의 재현입니다. 경전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외우고 마음이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독경이 아닙니다. 경을 외지 못하더라도 중도의 마음으로 생활하면 독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숨을 내쉴 때는 대상에 물들지 않고
숨을 마실 때는 나에 머물지 않아
이것이 중도의 생활화"



내 안에서 답을 구하는 선사들
2조 혜가 스님은 달마대사에게 몇 날 며칠 법문을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눈이 와서 허리까지 차도 합장한 채로요. 그때서야 혜가 스님의 진심을 보고 달마대사가 법을 전해주게 됩니다. 심심풀이로 불교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로 목숨 바치는 마음으로 불교를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대사는 혜가 스님에게 무엇 때문에 법을 구하려 하는지 물었고 혜가 스님은 마음이 불안하다며 편안하게 만들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혜가 스님이 갖는 불안, 인류가 갖는 공통 고민입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불안해하는지는 잘 모르죠. 장래, 건강, 경제, 지위 때문이긴 한데 이런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달마대사는 혜가 스님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이야기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안을 들여다봐도 없습니다. 혜가 스님이 깜짝 놀랍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불안해했다면서요.
혜가 스님의 제자 3조 승찬 스님도 출가하기 전 문둥병에 걸려 마음에 맺힌 한 때문에 고뇌에 빠집니다. 무슨 죄가 이렇게 많아 고통을 겪느냐고 한탄하는 승찬 스님에게 혜가 스님은 그 죄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패턴입니다. 4조 스님 역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냐고 3조 스님께 묻습니다. 3조 스님은 누가 묶어놓았냐고 되레 반문하죠.

중도에 대한 이해가 개혁의 첫 순서
이 세분들의 공통점은 해답을 안에서 찾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으면 자꾸 밖에서 찾기 마련입니다. 제도도 고치고 사람도 바꾸죠. 그러나 안에서 찾지 않고 밖으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듭니다. 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무용지물입니다. 재가운동은 의식개혁보다는 제도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의식이 먼저고 제도는 나중입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중도를 이해하는 게 의식을 바꾸는 일입니다. 불교의 문제 해결 역시 의식개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부처님도 의식개혁을 하기 전에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고뇌를 하시다 해결책을 찾아나섰습니다. 출가해서 존재원리를 깨달은 후에 의식만 변화시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죠. 그런 후 45년 동안 중도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개혁은 개개인들이 혼자서 이뤄내기에는 요원합니다. 집단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도를 추구하는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집단의식이 바뀌어야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며, 의식개혁은 꾸준히 해야 하는 지속적인 작업입니다.
혜가 스님은 불안한 마음 가지고 오라는 달마대사에 의해 깨달았지만 그런 경지는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같은 범부는 논리적으로 불교를 이해해 가면 됩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개혁을 이뤄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공부를 해가면서 불교적 논리로 사는 분들이 늘어날수록 뭔가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중도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법당가서 부자되고 출세하길 기원하죠.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밖으로 찾으니까요. 안에서 찾으라는 이야기는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24시간 동안 내가 있다는 전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안에서 과연 ‘내’가 어디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걸 찾아서 해답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본질과 형상은 하나
이를 알면 갈등 없어져"


모든 갈등은 나에게서 비롯
반야심경에는 오온 즉 몸을 뜻하는 색과 마음을 뜻하는 수상행식이 공한 줄 알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우리 안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모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안, 불만, 갈등 등을 가져오는데도요. 인류의 고통, 갈등, 대립, 투쟁의 원인이 ‘나’에 있습니다. 인종, 민족, 이념, 종교 이런 것들 역시 ‘내’가 있은 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있게 한 근원을 찾아가면 결국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때문에 인종, 종교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림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제게 핀잔을 주고는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좌복에 앉아 있는 스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면서요. 그러나 내가 있다는 걸 전제 하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는 건 스님이나 재가자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리 존재원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니까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1년에 갈등 때문에 소요되는 비용이 270조라고 합니다. GDP가 1000조원인데 그 중 27%가 갈등소모비용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불교의 중도를 이해하면 그런 돈이 복지 등 좋은 곳에 쓰일 수 있게 되겠죠.

형상과 본질은 다르지 않아
시골에 가면 새끼, 가마니, 짚신, 덕석이 있습니다. 모양, 크기, 쓰임새는 제각각이지만 재료는 짚입니다. 우리한테도 그것이 있다는 걸 부처님께서 발견하셨습니다. 불교는 짚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아, 공, 본질, 짚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몸이 한 개체라고 생각하고 이를 나라고 이해하지만 파인만 박사는 몸을 수억 만개의 원자덩어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원자를 가지고 자기라 할 것입니까. 그 수억 만개는 연기입니다. 연기되었기 때문에 공인 거죠.
얼마 전까지 뉴스에서 자주 보도되었던 힉스입자는 137억만년 전 빅뱅이 일어났을 때 최초로 존재했던 입자입니다. 다른 에너지를 만나면 물질화가 되는 비물질로, 이렇게 본다면 힉스입자 역시 연기이자 공입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흑백도, 인종도, 모든 차별이 없는 자리가 힉스자리입니다. 오온이 공했다는 것입니다.
형상 혹은 작용하는 면이 손바닥이라고 하면 손등은 본질이라고 합시다. 손바닥과 손등은 항상 붙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형상과 본질은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형상,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질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 알면 모든 갈등이 녹게 됩니다. 이를 중도라 합니다.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속에 자리한 본질도 내 속에 있다는 걸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오. 외형은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생활하면 전과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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