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문화예술上 - 류종민 교수(중앙대 명예교수)


지난 주 금강경과 법철학에 이어 이번 주에는 본각선교원에서 진행하는 금강경과 문화예술을 만나본다. 불법의 핵심이 담긴 금강경에서 인류 문명을 읽어낼 수 있는 코드를 2주에 걸쳐 찾아보기로 한다.

금강경 통해 문화의 지향점 찾기
금강경은 세존께서 깨달으신 후 설하신 아함, 방등, 반야, 법화, 열반의 방대한 경전 말씀 중 그 밝기가 정오에 해당하는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이 경으로부터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신다고 말씀하신 반야부 600부 중에서도 뛰어난 경전이다.
인류문화가 진화한 이래 최상의 지혜경전이라는 금강경과 오늘의 문화예술을 접목해 그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일은 시대를 성찰하고 미래의 바람직한 문화적 모형을 살펴본다는 측면에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금강경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내포하는 무위세계의 본질이 깃든 최상의 반야지혜이다. 또한 오늘의 문화예술은 인류가 발전시킨 유위세계의 모든 기술과 생활과 정신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을 통해 문화를 살펴보는 일은 유위를 넘어 무위세계에 근접해 보는 일일 것이다.
과연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이며 그 바람직한 지향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예술은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창출해 나갈 것인가? 이는 오늘을 사는 인류의 대명제가 아닐 수 없다. 금강경의 지혜와 함께 이 명제를 비추어 보자.

종교와 예술의 맞물림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유위법의 세계를 환영과 순간의 세계로 표현하시고 참다운 본원의 세계에 깨어 있도록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신 말씀은 오늘날의 번잡한 문화생활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살심을 유지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란 규범 속에서 홀로그램(Hologram)의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다. 문명의 진보 속도가 빨라지면서 우리는 다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뿐만 아니라 광속계를 떠나 타키온으로 구성된 초광속계가 있으며 다중우주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까지 유추하게 되었다.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문명과 문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5안으로 실상을 통투하시는 여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무너져 없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마음도 불가득이며 삼천 대천세계를 구성하는 미진과 일합상의 관계도 범부의 사량과 다르다.
중국 역사학자 주겸지(朱謙之)는 문명의 발전 과정을 종교, 철학, 과학, 예술의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단계는 다시 다른 3단계의 분화로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종교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철학, 종교적 과학, 종교적 예술이 되겠고 예술의 관점에서는 예술적 종교, 예술적 철학, 예술적 과학으로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의 최종 단계인 예술의 측면에서 보면 종교, 철학, 과학이 예술의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으며 이것은 종교철학을 바탕으로 한 예술의 개화가 역으로 예술의 관점에서 종교철학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오늘날의 문화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예술로써 인도에서부터 중국 한국 일본과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자카르타등 불교가 성한 동남아 각국에서 이와 관련된 방대한 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 서구에서도 문화의 발전상에 따라 신전과 성당의 예술적 장엄의 변모를 볼 수 있으며 이는 곧 예술적 종교라는 코드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정신을 고양시킨 많은 예술적 공헌이 과거 종교를 통해서 현현 되었으나 이러한 종속관계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들며 문화로서의 종교와 예술은 인간정신의 위대한 발로로서 각각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금강경의 각분에 비추어 본 문화예술
1) 법회인유분의 기원정사와 탁발
기원정사는 기수급고독원의 약칭으로 기타태자의 땅을 급고독장자가 숲속에 건립한 정사다. 지금도 벽돌로 된 법당과 정사의 유적이 남아 있고 이곳에서 부처님은 금강경을 설하셨다.
당시 코살라 국의 수도였던 사위성은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운 격조를 지녔던 듯 한데 일설에는 스라바스티(Sravasti)성에서 음사한 실라벌이 신라의 서라벌이 되고 오늘의 서울의 어원인 셔블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지금은 숲으로 덮여 있지만 세존께서 천이백오십인의 비구와 함께 이 사위성으로 들어가서 공양을 비시는 정경을 상상해 보자. 질서 정연한 행렬의 선두에 서서 준칙대로 차례로 밥을 빌으시고 기원정사로 돌아오시는 모습은, 오늘날 태국이나 미얀마에서 행하고 있는 장엄한 행렬로 연상할 수 있다.

2) 대승정종분의 항복기심과 구류중생
금강경의 요체인 3분의 항복기심과 구류중생은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으나 승려이자 정치가, 교육자인 백성욱 박사는 각자의 마음속에 구류중생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마음을 정화하여 멸도하는 것을 일차적 항복기심으로 보았는데, 그러면 자연 바깥으로 일어난 증상도 사라질 것이라 했다. 이는 오늘날 임상심리학에서 자가 치료를 하듯, 구류중생의 마음에 근접해 내부의 심적상태를 정화하는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구류중생의 문화적 해석은 태, 란, 습, 화의 생물적 해석 외에도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의 방대한 해석이 있다. 물질화 되어 있는 유색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무색은 형상이 없으니까 볼 수가 없는데 여기까지도 부처님은 중생이라고 보셨다. 중생의 종류는 이렇듯 광대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성을 지닌 생명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범주로 보면 몸이 물질화 돼 있는 곳에 있으므로 우리는 태생이고 유색에 속하는 존재다. 그러나 물질이다 아니다하는 분별도 멸도 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생각이 있기도 하고 생각이 없기도 한 중생(有想, 無想)에 대해서는 해석이 어렵다. 생각이 있다고 하면 생명체는 당연히 유상이고, 개유불성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생각이 없다고 하는 그 속에도 생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위나 책상에도 불성이 있냐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을 현대문명에 비춰 살펴보자.
무상이라고 하는 개념은 현대물리학의 강입자 이론에서, 물체 속 입자들이 불규칙적인 운동을 하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 현상을 두고 말하는 상호교신하는 의식의 존재유무와 이 의식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다. (Carpra, The tao of physics) 라이프니츠 또한 모나드(monad)라는 마음의 입자와 비슷한 단자론을 내세운 적이 있다. 물론 이는 가설에서 머물렀지만 앞으로 더 발전된 이설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부처님이 일체중생지류를 아홉 가지로 나눈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범위는 무한하고 거기에는 무념의 생명, 생각이 없는 생명까지 포함된다.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범위를 지구에 국한하는 시야에서 벗어나 문화와 문명이 확대됐을 경우를 고려해야 된다.
우리는 좁은 시야로서 생명을 한정짓지만 부처님 말씀하신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까지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무념의 생명, 생각이 없는 생명까지 포함된다.
이것이 다 내 속에 있는 생명들이고 서로 연기를 이루고 밖에 나타나 있는 생명들의 모습이기도 한데, 백성욱박사는 일차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중생을 멸도하면 밖으로 투사 되어 있는 중생도 멸도 될 것이라고 해석하신 것이다.

3) 복지사회의 문화와 보시의 적극적 의미
물질화된 금세기 문화에서 금강경4분 보시의 의미는 나눔의 행복으로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덕목이며 물질에 천착되어 있는 탐심을 정화하기 위해서도 반듯이 닦아야할 제일바라밀이다. 조건 없는 무주상 보시를 행할 수 있다면 오늘날 문화는 혼탁하지 않고 한결 높은 격조와 향기를 지닐 것이다.

4) 약견제상 비상(若見諸相 非相)의 궁극적 표현
‘만일 모든 상(相)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5분의 말씀을 시각예술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사실재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한 사진작가는 여기서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표현 하는데 중점을 두기도 했다. 그 작가의 작품은 개념미술이나 모노크롬(monochrome)의 단색회화에서 보이듯 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상은 있으되 제상이 비상인 경지,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관점에 따라 만날 수 있는 본질적 세계이며 시각예술에서의 궁극적 화두이기도 하다.
여러 논의 끝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될 예정인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1호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서양의 고뇌상과는 다른 언어로 표현한 부처님 세계의 정일한 사유상이다.

5) 무유정법(無有定法)의 문화와 해석
금강경7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정해진 법이 없으며 정해진 법이 없음을 여래가 설하신다’고 했다. 정해진 법은 여실한 법이 아니며 위없는 보편타당의 바른 진리도 아니라는 말인데 이를 오늘날 문화에 적용해보자. 진리라고 믿었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사례 외에도 오늘날 패러다임의 전환은 문화의 극점에서 항상 발생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각 시대의 문화에는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양식적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흐름일 뿐이고 어느 양식이 다른 양식보다 더 우수하다는 법칙은 없다. 문명에는 진화의 개념이 있으나 예술적 측면에서 본 문화에서는 진화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다. 예술은 진화보다는 그 시대와 조응하면서도 정해진 법의 테두리를 뛰어 넘으려는 자유의지가 있다.
무유정법은 범주에 갇히기 쉬운 인간정신의 창달을 위해서도 또한 계속 시야에서 일탈하려는 인간정신의 고양을 위해서도 오늘날 문화예술이 가져야 할 요건이다.

6) 금강경의 무위법과 오늘의 문화
금강경은 무위법이라 할 수 있으며 유위법의 무상함을 비추어 보게 한다. 그러나 일체법을 개시불법(一切法 皆是佛法)이라 하여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나누지 않았다. 문명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는 유위에서 무위로 향해 가는듯하다. 예를 들면 수도꼭지를 틀어야 물이 나오는 유위는 손만 갖다 대면 물이 나오는 무위로 진화되어 가고 사람이 없을 때는 불이 꺼져 있다가 사람이 있으면 불이 켜지는 감지기능의 발달은 점점 유위보다 무위가 상위라는 인식을 들게 한다.
이것이 더 진화되면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까지 감지해서 한 생각이 행동의 유위성 없이 그대로 현현되는 무위세계가 점점 도래 할 것이고 무위법이 상위법이 될 날이 올 것이다.

<계속>
이 원고는 본각선교원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미리 간추려 소개한 것입니다. 본각선교원 (02)762-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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