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행이 중요합니다

▲ 그림 최주현

모든 걸 내 안의 자동적인 컴퓨터에 놔라.
거기다 맡겨놓고 거기서만이 진행되는 걸 지켜봐라.
그렇게 되면 실험이 되고 체험을 하게 된다.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참 선의 직속길이다.
 

왜 인간들이 점점 더 흉악해지는 것일까요
문) 요즘은 정신적으로 정말 많이 메말라가는 것 같습니다. 가족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걸 보니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다 인간들이 이렇게 점점 더 흉악해지는 걸까요?

답) 우리가 부모 밑에서 올바르게 길러지는 자식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걷는데, 궤도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른이나 애나 다 똑같습니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즉 말하자면 이것이 자석처럼, 마음이 자석처럼 붙어 돌아가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어머니라는 인정, 그게 자석입니다. 그래서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그 자기네 가정을 벗어나지 않는 거죠. 인간이라는 자석을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마음이 벌써 있기 때문에 벗어나지 않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서 철을 모르고, 어른이라도 철모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철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자기 중심을 잃고 사는 사람들, 즉 말하자면 패배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느냐. ‘난 살아야겠어.’ 하고선 잘되고 잘못된 걸 번연히 알면서도 저지르는 것은 자기가 배고프니까 저지릅니다. 무댓방 저지릅니다. 죽입니다. 또 착취합니다. 이 국내에서 본다 하더라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렇고, 그렇게 그런 사람이 지금 각국에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고 살리고 싸우고 이 야단들을 하죠.

이 말을 내가 왜 하느냐 하면은, 이 오신통이라는 자체는 내가 자성을 깨달아서 주인이 돼 가지고 오신통을 부려야 말이지, 만약에 내가 내 안의 자성을 찾지 않고 바깥으로만 만날 신을 찾아 돌아다니고, 학문으로만 가지고 저거 하고, 그렇게 집이 빈 사람들은 항상 끄달리게 돼 있어요. 항상 끄달리니까 이거는 여기에서 들어와도 들어오는 줄 모르고 저기에서 들어와도 들어오는 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여러분은 유법으로나 무법으로나, 하여튼 그냥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나 생명들이나, 보이는 생명들이나 모든 것이 끄달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끄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내 몸을 가눠 가면서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생활을, 가정을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나요? 아니,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어떻게 끌고 나갑니까? 그러는 사람들이 어떻게 우주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이끌어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공부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 안에서만 굴리고 내 안에서 배신하지 말고 자기 주인공을 믿고, 패기 있게,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모두 거기서 나고 드는 것인데, 만법이 일심에서 나고 만법이 일심으로 드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배신을 하고 무시하고 자기는 아주 나는 모른다, 나는 뭐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니 신이시여! 아무개 신이시여! 용신이시여! 관세음 신이시여! 무슨 부처 신이시여! 이 신 저 신 찾다 보니까 내 신도 잊어버리거든요. 아니, 이 신 저 신 찾다 보니까 내 신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 신을 근중하게 생각하세요. 내가 지금 내 몸뚱이를 이끌고 가는 내 신을 말입니다, 자성신.

그런데 그 말을 하려니까 이거 괜히 신까지 말을 하게 됐습니다만, 내 주인이 없는 집은 귀신, 유체, 유령, 세균, 윤회, 유전, 이런 것이 다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몸뚱이의 그 모든 생명들이 자기 분야 분야 소임을 맡아 가지고 다 내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을 지금 지탱을 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으니까, 주인이 모르고 있으니까 이 내 생명체도 다 방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 세상에서만 그런가. 이 세상을 삼차원에 기준을 둔다면 중세계라고 봅니다. 그렇다면은 우리가 일차원이냐 이차원이냐 삼차원이냐 이런 때, 우리는 지금 삼차원이기 때문에 이차원이나 일차원에 있는 거를 갖다 막 집어다가 바로 실험대에 올려놓고서 실험을 합니다, 각 분야에서 말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차원 세계라면 삼차원에 있는 거 막 붙잡아다가 실험대에 안 올려놓겠습니까? 이 모두가, 이 오차원, 육차원, 칠차원 이렇게 차원이 있는데, 만약에 탑이 있다면 십이층 탑이 있다면 그걸 한데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서 바로 한 개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십이 층이 어떤 것이 층층이냐. 이렇게 세울 수 없으니까 공했다. 그 하나도 없다. 물감을 갖다가 여러 가질 갖다 놓고 “어떤 게 물감, 진짜 물감입니까?”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떤 게 진짜 물감입니까? 물감이 지금 열여덟 가지가 있다면은 열여덟 가지에서 “진짜 물감이 어떤 것입니까?” 한다면 진짜 물감이, 다 진짜 물감인데 어떤 거를 진짜 물감이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말을 못하고 ‘이것은 전부 공했다.’ 어떤 것을 물감이라고 세울 수 없으니까 공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렇게 차원이 계단이 있으면서도 계단이 없는 원인이 바로 아까 물감 얘기 했듯이 그러한 까닭에 그런 차원이 바로 평등이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평등이면서도 그 차원은 엄연히 있고, 엄연히 있으면서도 우리 살림살이의 차원은 엄연히 있어서 소소영영하게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씀씀이를 쓰고 있으면서 행하고 말하고 이렇게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사차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까 그 철없는 사람들 얘기 했죠? 그러면 딴 혹성이라고 철없는 게 없을까요? 그리고 국방이라든가 또는 정보국이라든가 또는 의학계의 연구 실험원이라든가, 이런 데서는 뭐라도 갖다가 붙잡아다 실험대에 올려놔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차원 세계의 문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지만, 사차원에서는 이 삼차원에 자기 문 드나들듯 해요. 사차원 오차원에서 드나들어요. 그렇다면 사차원에서는 삼차원에서부터 저 끝에까지 다 드나들게 돼 있습니다. 권리가 있어요. 사차원이라는 권리증을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문제가 한두 건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 모두 병이 많이 일어났다, 이럴 때는 우리가 에너지를 작간에 뺏기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빈 집인데요, 뭘. 주인이 없는 집이니까 그냥 막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안 하면 아니 된다는 겁니다.

이론으로 알면 놓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데
문) 놓는다는 것이 사실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라도 그 이치를 알고 배운다면 놓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답) 여러분이 말로 배우려고 하고 글로 배우려고 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 항상 자기 공한 주인공, 즉 말하자면 자기 몸이 공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공했기 때문에 세상도 공하듯이 전체가 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모든 것을, 내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쑥 빼놓으시고 항상 놓는 습을 가지셔야 합니다.
억겁을 거쳐 오면서 우리가 이 사람으로서 등장을 했습니다. 그럼 사람으로서 이렇게 형성된 지금 이 시점에서 억겁을 거쳐 온 그 자체의 습이 지금 현실의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각자.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시점에서 내가 공한 줄 알고, 공한 데서 나오는 거 바로 공한 나 자체가 화두인 줄 알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놓는다면, 진심으로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는 자기 자신의 일체 생동력 있는 생수물이 자기에게 맛을 보일 수 있고 상봉할 수 있겠지마는, 우리가 배우려고 한다거나 경이 자기를 보고 자기가 경을 보고 학으로다가 말로다가 이론으로다가 이렇게 배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백네 날이 가도 공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이 밝고 아주 화창한데 꽃이 피었다고 합시다. 봄이 돼서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떨어지면 왜 여러분의 마음이 허황되고 또는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 그러겠습니까. 꽃이 핀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면, 꽃이 진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요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좋은 것이겠습니까. 꽃이 피는 것도 아니요, 지는 것도 아니라면 그 가운데 무엇이 나한테 일체 이익하게 할 수 있는가. 일러 보실 수 있다면 일러 보십시오. 우리가 여태 놓는다 안 놓는다 말 없이 여여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런 문구 자체를 내 스스로서 함이 없이 이를 수 없다면, 저 아주 날은 창창하지만 안개와 아지랑이가 끼어서 앞을 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른 거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옛날의 선지식들은 “이 눈을 봤느냐? 봤으면 일러라!” 하고서 주장자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르지 못했을 때는 “그 참, 날은 어둡구나!” 하고선 그냥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 읊으시고 내려가고 이러한 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런 걸 떠나서, 우린 근본적으로 말과 그 흉내 내는 거를 떠나서 진실한 ‘참나’를 알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떠한 ‘이 뭣고.’ 화두나 ‘무’자 화두나 ‘시삼마’ 화두를 쥔다고 해서 그것을 들면은 드는 대로 벌써 상대방에서 나를 들게 해 줬으니까 의식적으로 벌써 그걸 알고 있습니다. 또 내가 공해서 없다는데도 불구하고 거기다가 또 받아서 그것을 들고서 온종일 헤매도, 해는 점점 저물어 가는데 온종일 들고 헤매도 도대체 알 길이 없어서 그만 저녁에 옷을 벗게 되는 그런 이치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몸이 없으면, 공한 몸이 없으면은 또 무효입니다.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무효니만큼 우리 몸이 있을 때 바로 그 이치를, 부처님이 바로 마음을 전달하신 그 뜻을 알면은 부처님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부터 헤아릴 줄 알아야 부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몸이 무너지기 전에. 무너지면 더하고 덜함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번뇌를 ‘끊어라가 아닌 ‘녹이라는 이유
문) 일반적으로는 번뇌를 다 ‘끊어라’라고 하는데 선원에서는 ‘녹이라’고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는지요.

답) 일어나는 망상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녹이라는 겁니다. 녹이라는 거지 끊을 게 어디 있습니까?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으니 망상을 끊는 게 아니라 녹이는 것이고 한마음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저놈, 조거, 너!’ 이렇게, 부부지간에 살면서도 ‘너, 두고 보자.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들어와도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게 아니라 엉뚱나가게, “야! 뭐!” 그러고 꽥꽥 악을 쓰고 외려 한술 더 뜹니다. 그러니깐 더 싸울 수가 없는 거죠. 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로 본다면, 자기와 같이만 본다면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의리도 나오고 도의도 나오고, 거기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향기 에너지는 거기까지도 다 밝아지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외려 들어오기도 전에 바깥에서 ‘아, 이거 미안한데….’ 하면서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서 “여보! 나 참 미안했어.” 이런 말 한마디를 들을 때 그냥 겨울에 고드름이 녹아서 떨어지듯이 그렇게 녹아 떨어지죠. 그러한 마음이 녹아 떨어질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장본인입니다.

사랑은 주는 거지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도 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받게끔 돼 있으니깐요. 내가 해놓은 거 어디 가겠습니까? 나쁜 일을 해 놨어도 나한테 올 것이고 좋은 일을 해 놨어도 나한테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준다면, 자비롭게 의리를 도모하고 또 그렇게 믿는 데에 인내가 있다면, 물러서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사랑하고 또 화목하게 이렇게 생활이 진행돼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뿐만 아닙니다. 세세생생입니다. 우리가 현실에 나쁘고 좋은 게 다 그냥 우리 죽어서 끊어진다면 별 문젠데, 세세생생에 억겁을 거치면서 자기 한 대로 그게 얽히고설킬 테니 그거를 어떻게 끊으렵니까? 물질이라면 아예 단번에 끊어 버리고 말겠는데, 물질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그 찔깃찔깃한 인연줄! 그 인연줄은 아무것으로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온 거 마음으로 끊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둘이 되니까 녹인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모든 것을 당신이 한 거, 당신이 해결해라!’ 이겁니다. 나왔던 자리로 다시 놓는 거죠. 나온 자리에 다시 놓는다면 다시 들어가서 하나가 돼 가지고 만법을 응용하게끔 거기에서는 생동력 있게 계발돼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문) 요즘 젊은이들은 쉽게도 사랑 사랑 하는데 저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참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 길을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그건 자식이 물에 빠질 때 부모가 그 자식을 위해서 뛰어드는 그런 마음이라야 됩니다. 조건 없는 사랑. 즉 말하자면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든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든가, 사랑도 가지가지 여러 사랑이 있죠?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또는 부모자식지간의 사랑…. 사랑도 많죠, 왜? 그런데 이런 말이 있어요. ‘남편이 싫다고 한다면 사랑을 하걸랑은 놔 줘라.’ 이런 말 있죠. 또 여자가 싫다 한다 하더라도 조건을 잘 만들어서, 싫다 하는 걸 붙들고 생전 살아 봤자야 그 타령이니까 사랑하면은 놔 줘라,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면서 모두 이기인 사랑이요, 조건 있는 사랑이에요, 모두가.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을 자비라고 그랬거든요. 자비라는 것은 아무나 쓸 수가 없어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행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차비가 없다고 그러는데 그냥 조건 없이 차비를 주는 게 자비예요. 또 셋방을 얻을 돈이 없어 거리로 나앉았을 때 누가 조건 없이 준다면 그게 자비죠. 조건 있는 거는 자비가 못됩니다. 그건 말로만 사랑 사랑 하지, 진짜 사랑들을 몰라서 그래요.

진짜 사랑이라는 것은 자비를 말하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 부모들은 이상스런 부모들도 또 많습니다만. 물론 마음을 어떻게 돌리질 못해서 자식들한테 해가 가게끔 하는 수도 많죠. 그러나 몰라서 그렇지 그것이 자식을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나, 부처님이 뭇 중생들을 나 아님이 없다고 사랑하는 거나 똑같아요. 작고 크고 이것뿐이지, 아마 그것이 자비일 겁니다.
그런데 자식을 사랑한다면서 조건 있는 것을 만날 붙이죠. 무얼 바라고, ‘저놈이 잘돼야 내가 저거 할 텐데….’ 하고 이렇게 기대는 게 있다면 자비가 못되죠. 부처님께서는, 하다못해 기어가는 벌레라도 나 아님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달마 대사가 구렁이 속에 들어가서 그 길을 비켜서 딴 데다 갖다 놓고 자기가 나왔다는 얘기도 있죠?
그러니까 이 몸뚱이 속의 모든 중생들을 천백억화신으로 화하게 만들어서, 즉 말하자면 이 공부가 그 공부예요. 내 마음을 한마음으로 따라 줄 수 있는 그런 천백억화신으로 화해서 벌레가 울든 짐승이 울든, 어떠한 생명들이 다 용도에 따라서 청하면 청하는 대로 응해 주십니다. 그런데 천백억화신이라고 해도 천백억화신으로만이 그 숫자가 돼 있는 게 아니에요. 천백억이라면은 숫자 없는 숫자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한생각에서 수만이 일어나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작용도 하고 그러다가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는 겁니다.
모두 다 잘 알겠지만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나 아님이 없이, 내 아픔 아님이 없이, 내 자리 아님이 없이, 내가 높다는 생각도 없이, 모두가 나 아님이 없다고 생각을 했을 때 진짜 자비예요. 그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이 도리를 공부하기 이전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왜냐. 수억겁 광년으로 거치면서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도리를, 하나로 들고나는 그 도리를 알고….
이게 아주 알려면은 모든 게 복잡하니까 모든 거를 그 자동적인 컴퓨터에다가 놔라. 거기다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진행되는 걸 지켜봐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실험이 되고 체험을 하게 된다. 체험을 하게 되면은 그것이 바로 참 선의 직속길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진짜 우리가 말로 사랑 사랑 하는 이름이 사랑이 아니라, 진짜 자비를 행하는 그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 편해지니 몸이 게을러져요
문) 주인공에게 맡겨 놓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몸이 자꾸 게을러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답) 여러분은 편안하게 사시라 하면은 몸이 편안한 거를 생각하시는데 몸이 편안한 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면은 마음이 아무리 뛰어도 편안치 않은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사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많이 해도 군색함이 없고 편안합니다. 그리고 또 이걸 해야지 하고 하는 일은 아주 편안합니다. 그러니깐 모두 일하고 밥 먹고 똥 누고 얼마나 편안합니까. 똥 못 눠도 참 편안치 못한 겁니다, 그거. 그러니깐 일을 하시는데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거니와 변소에 가도 시원하고. 이거 모두가 좋은 거 아닙니까. 소화 잘되니 좋고. 모두가 좋은 거니까 편안한 생각을 하시고 편안한 일이 닥치게끔 하고, 내가 부지런히 뛰게끔 할 수 있는 사람 정말 편안하단 얘깁니다. 우리가 몸이 편안한 거를 말하지 마시고 하루 우리가 일을 안 하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일을 안 하면 어떻게 먹습니까?
그래서 우리 집의 이 승려들도 그저 한 치도 쉬지 않고 움죽거립니다마는 편안합니다. 편안하게 삽니다. 이유가 없으니깐요. 누구의 탓이 없고 이유가 없으니까. 일이 나한테 닥치면 닥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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