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국교화 시도와 군부정권의 대두

1961년 불교국교화 이후 정부행사에 앞서 기도를 올리는 우누 정부요원들의 모습.
1947년 불교 국교화 첫 논의
아웅산 사회혼란 이유로 반대
1948년 기독교인 군인 반란 발생
불교도 주축으로 국교화운동 일어나

우누 수상 초기 유보입장 견지
1960년 총선에서 불교국교화 공약
타종교 역배려에 불교도 반발
불안 정세 속에 1962년 네윈 쿠데타 일으켜

인류사에서 근현대는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종교국가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세속주의(secularism) 사회로 나아간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에서는 종교국가 체제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특히 중동의 많은 나라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른 종교국가로 남아있다. 물론 터키, 시리아, 이집트, 튀니지 그리고 모로코 등은 이슬람 종교가 지배적이지만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한 나라에서 특정종교가 지배적일 경우 헌법으로 이 종교를 국교로 명시하는 국가들이 많다. 예를 들면, 영국은 정교분리의 세속주의를 표방하지만 성공회를 국교로 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말레이시아 등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아르헨티나와 바티칸시국은 로마 가톨릭을, 그리스는 그리스 정교회를 국교로 하고 있다. 최근 네팔은 세계 유일의 힌두교 국가에서 세속주의로 바뀌기도 했다.

그렇다면 불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들은 어떠한 나라가 있을까? 대표적인 국가로는 태국이 꼽힌다.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1947년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불교를 국교로 명문화했다. 하지만 1975년 공산화되며 불교의 국교 지위를 폐지했다. 이 밖에도 부탄과 스리랑카, 캄보디아 그리고 칼미크(Kalmykia) 공화국이 있다. 칼미크 공화국은 유럽 유일의 불교국가로 알려졌다.

불교권을 상좌 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티베트불교로 구분하면 상좌 불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는 태국이 있으며, 대승불교는 부탄과 칼미크 공화국으로 모두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흔히 국교는 ‘법률에 의해 국가 또는 국민의 공식종교로 인정되어 민간·정부의 지원을 받는 종교’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불교의 경우 헌법에 명목 상 국교로 명시하고 있더라도 종교와 정치가 이원체계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불교를 국교로 지정한 부탄 등을 살펴보면 과거 유럽의 기독교 국가나 현재 이슬람 국가들처럼 국가가 강제적으로 불교를 믿도록 구속하고 있지 않다.

우누 미얀마 초대 수상
미얀마의 불교국교화

미얀마에서는 52년 전, 우누 수상에 의해 국교화가 시도됐다. 불교 국교화 논의는 1947년부터 진행됐는데 이해 5월 독립 지도자들이 양곤에서 회합을 갖고 헌법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두됐다. 당시 1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불교국교화가 개진됐는데 여기서 아웅 산이 미얀마 통합에 저해가 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아웅 산은 국가는 종교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며 불교 국교화를 거부했다. 당시 위원회에서는 대신 미얀마 헌법에 ‘국가는 연방의 최대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다.(제21조1항)’는 조항을 넣음으로서 불교의 특별한 지위를 명시했다.

이와 함께 ‘국가는 헌법이 발효되는 날 연방의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그리고 토속신앙(낫) 등의 종교를 승인한다.(21조 2항)’ ‘국가는 신앙과 신념을 이유로 결격조항을 부과하거나 또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21조3조)’ 등 조항을 제정했다.

미얀마에서는 이후 공산당과 국민의용군 그리고 소수민족방위군 등에 의한 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특히 영국식민지 시절 기독교로 개종한 꺼인족(까렌족, 현재 까렌족의 60%는 불교도이다) 출신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1948~1949년 미얀마 남부 몰라민과 서부의 뻬테인 그리고 삐를 점령하게 된다. 여기에 공산당이 합세해 미얀마 중북부인 만달레이까지 점령할 정도에 이르렀다.

1952년 미얀마 연방군 창설로 치안상태가 진정되자 불교국교화는 다시금 사회적 이슈로 대두됐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1954~56년 진행된 제6차 결집의 계기가 됐다. 결집 폐회 때 양곤과 라카인 그리고 만달레이의 세 승가 단체가 불교 국교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불교계에 큰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국교 제안은 수상과 종교성 장관에 각각 전달됐다.

여기서 우누 수상은 불교 국교화는 미얀마 통합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한 정세불안으로 외세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들어 우려와 함께 유보적인 입장을 표했다.

우누 수상은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차별이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찬반 대립이 거세지자 우누 수상은 직무수행을 잠시 멈추고 8개월 간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도 했다.

1958년 계속해서 불교국교화에 대한 주장으로 찬반 대립이 극심해지자 우누 수상은 당시 군 총사령관이었던 네윈에게 내각을 맡기고 수상직에서 물러난다.

1960년 총선거에서 미얀마의 불교국교화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우누가 속한 정당이 선거 승리를 위해 Kaba Aye 파고다에서 불교국교화를 공약으로 내건 것이다. 결국 선거에서 우누의 정당이 크게 승리하였으며 우누는 또 다시 수상직을 맡게 된다. 이제 우누에게 있어 불교국교화는 완수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 된 것이다.

1960년 18명의 고승과 17명의 재가자를 중심으로 불교의 국교화를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국교화의 여론을 살피기 위해 여러 종교지도자과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우누 수상 또한 불교도가 아닌 종교지도자를 초청해 불교의 국교화로 인한 차별이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양곤에 있었던 가톨릭 대주교와 이슬람 측 대표는 반대 입장을 보였지만 우누 수상은 불교 국교화가 독립된 미얀마가 이루어내야 할 당위적인 요구이므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우누 수상은 “식민지배 당시 방치됐던 불교의 조속한 부흥과 함께 불교 계율에 따르지 않은 승려와 불심이 떨어진 신도들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 불교가 국교가 돼야 하며 불교 국교화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척결과 혼란스러운 내정의 안정화 등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1961년 8월 29일 우누 수상은 국회에 불교국교화를 상정했다. 이러한 법안(The State Religion Promotion Act of 1961)은 재적의원 371명 중 찬성 324, 반대 28, 기권 19로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됐다.

미얀마 헌법 제21조1항의 ‘국가는 연방의 최대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한다’는 ‘연방의 최대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로서 불교는 국교다’로 변경됐다.

이러한 국교화에 따라 국가가 담당해야 할 세부적인 사항도 규정됐다. 국가 예산의 최소 5%를 종교사업의 재정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새롭게 추가됐다. 즉, 국가는 국교인 불교교학의 연구와 불교정신의 실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6차 결집 당시 공인된 경전과 주석서의 인쇄가 정부 허가제로 변경돼 국가 관리 하에 진행됐으며 제5차 결집의 결과물인 석경의 관리 등도 국가가 맡게 됐다.

이와 함께 연 1회 고승 회의를 열어 사회 전반적인 사안에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불교 경전어인 빠알리나 산스크리트 어의 연구 및 보급도 정부가 지원하며 파고다 등 문화유산의 보존관리, 승가 병원 건립 및 국립학교 불교 의무교육 등도 추진됐다. 불교 대중화를 위해 법원과 학교 등 공공기관에 불상을 봉안하도록 했으며 모든 도서관에는 삼장을 소장토록 했다. 또 불교방송을 실시하고 3개월의 안거(安居) 기간에는 주류의 판매 또한 금지됐다. 국교화 이후에는 포살일(布薩)이 공식적인 수행일이 돼 모든 학교와 관공서가 쉬며 종교적 프로그램이 상영되도록 했다. 포살일에는 공공장소에서 음주도 금지되며 도축 또한 금지됐다.

이렇게 불교국교화에 따른 정책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우누는 불교도가 아닌 다른 종교인과 민족들을 달래기 위해 다음 헌법 개정안에서 공공학교 교육에 있어 부모 동의에 따라 종교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우누 수상의 태도는 불교도들의 반발을 샀는데 불교도들은 이슬람교 명절 때에 이루어지는 소의 도축 등을 이유로 크게 반발했다.

특히 미얀마 불교교단에서는 결국 이렇게 되면 모든 종교를 국교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불교국교화의 의미가 없다며 거센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이런 계속된 반대에도 우누 수상이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불교교단의 정부 비판이 더욱 격화됐다. 개정안이 통과된 한 달 뒤에 미얀마 양곤에서는 반 이슬람 폭동이 일어나 양곤 외곽의 이슬람 사원이 점거됐으며 사상자사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안한 정세는 결국 군부정권이 개입할 빌미를 주었으며 1962년 3월 네윈(1911~2002)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우누 수상은 물론 각료 50여 명이 체포됐으며 이후 미얀마는 네윈의 혁명위원회에 의해 통치된다.

네윈의 군부정권은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된 불교국교화를 폐지했다. 국교화 법안이 통과된지 채 일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국가가 불교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한 네윈은 우누 정권 당시 포살일의 공휴일, 포살일의 주류 판매 금지, 도축 금지 등 불교정책을 철회했다. 네윈의 혁명평의회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해 국교화로 인한 정세불안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불교국교화는 미얀마 독립 후 첫 정부에 의한 일 중 가장 유명한 일로 평가되지만 미얀마는 혼란에 빠졌으며 군부에 의해 통치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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