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초하루 법회-향적 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장)

▲ 향적스님은1967년 일타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해 월간지 <해인(海印)>을 창간하고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가톨릭 수도원 삐에르-끼-비에서 불교와의 수행방법을 비교하고 돌아와 조계종교육원 초대 교육부장직을 수행하면서 승가 기초교육을 체계화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초대 관장을 맡아 박물관을 개관했다. 불교신문 사장, 동국학원 감사 등을, 불교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제15대 중앙종회의장을 맡고 있다

부리를 바위에 찧어
새살이 돋게 하는 독수리
덕분에 30년 더 살아 

스스로 수명 정하는 독수리처럼
운명을 바꾸려면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야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미혹함을 떨치면 바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는 말처럼 운명을 단번에 떨치는 방법은 중생처럼 살지 않고 절실히 기도하는 것에 있다고 향적 스님은 말했다. 그렇기에 불교는 운명을 논할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다고 했다. 9월 5일 봉은사에서 열린 초하루 법회를 통해 이를 확인해본다.

중생처럼 살지 않으면 운명이 바뀐다
 오늘 법회 주제는 ‘불교는 운명을 바꾸는 종교’입니다. 운명이라는 말 때문에 굉장히 거창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접하고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고 하는 분들을 주변에서 종종 볼 때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바꾸기 위해 절에 오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참선하고 간경과 주력수행을 하는 것 또한 자기가 지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죠.
 부처님이 ‘인생은 고(苦)’라며 사성제를 이야기하셨을 때, 이는 태어난 자체를 ‘고’라고 여기신 걸까요. 그렇게 본다면 모든 생명체는 고통스러운 존재일까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란 날 때부터 지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살면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얼마나 만족하며 지내십니까. 자식도 불만족스러울 때가 많고 가족, 친구한테도 섭섭해 할 때가 많죠. 그것이 다 고통입니다.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잊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하면 운수나 팔자를 떠올립니다. 이미 정해진 것,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 노력은 쓸모없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 등을 운명이라고 여깁니다. 사람들은 가족, 친척, 친구 등과 관계를 맺으며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이유죠. 가정이 어렵다거나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거나 할 때면 사람들은 운수소관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모습은 누구나 비슷하기 마련입니다. 자식을 낳고 학교를 보내고 그리고 결혼시키고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하는 것 등이 말입니다. 혈액형별 성격을 보아도 0형은 활발하고 A형은 소심하다고 하지만 100% 맞는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전혀 안 맞는 것도 아니죠.
 이 모든 것들은 통계학적으로 인간의 삶과 모습을 기반으로 해서 맞춰놓은 것입니다. 관상, 사주 이런 것들 또한 옛날 중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데이터를 수집해 결과를 낸 통계학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가정도 꾸리지 않고 일반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는 다르게 살기에 이런 통계학에서 예외가 됩니다. 사주나 관상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생처럼 살지 않으면 자기 운명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님들 또한 ‘부처가 되려 하지 말고 부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는 거죠.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운명이 바뀌지만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크게 세 가지 사상 부류가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길흉화복은 브라만이라는 범신이 주재한다는 존우론적인 사상은 신이 이미 나에게 정해놓은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에 대한 신분차별인 카스트 제도를 탄생케 했죠. 또 한 사상은 숙명론이라고 팔자소관에 부쳐버리는 운명론적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전생에서부터 현생의 삶이 정해졌기에 기도한다고 혹은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무인무과론(無因無果論)이라고 인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위험합니다. 도둑질, 살인을 해도 죄의식이 없기에 사회질서가 굉장히 혼란스러워질 수 있죠.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 이러한 운명론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를 깨우쳐주기 위해 저잣거리로 나가 끈을 주어오라고 하죠. 그리고는 냄새 맡게 합니다. 향내가 나기도 하고 생선냄새가 나기도 하는 등 주어온 끈마다 냄새가 다르죠. 이에 부처님은 말합니다. 끈의 원료가 향이어서 혹은 생선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듯, 인간도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과 신분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구요.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귀족이 될 수도, 천민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노력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팔만사천경에 법문하신 내용도 이것입니다. ‘너의 불행한 운명을 바꿔라’.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타고난 운명을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도 출가하시지 않았다면 강대국들의 틈에서 전전긍긍하는 소왕국의 왕으로 생을 마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망을 끊는 위대한 포기를 하셨기에 강대국 왕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관상, 사주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치는 것을 주역(周易)이라 합니다. 주나라 때 만든 것입니다. 역(易)이란 변화를 뜻합니다. 날 일(日)자하고 달 월(月)자 하고 합쳐진 거죠. 태양과 달의 변화에 따라 사계절이 변하고 여기에 적응하는 지혜를 인간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주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툭하면 주역을 봐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주역이란 로또에 당첨되게 하고 신통을 부려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문에 오늘의 운수를 챙겨보시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주로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사람이 조심하다 보면 사고가 덜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만하기 때문에 불행이 닥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 사이에 골이 생기는 것도 주로 자존심 때문이잖아요. 오만과 자기(自己)라는 것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깊은 선정을 닦은 스님들의 도와 덕에 대한 교훈을 모은 책인 <선림보훈>에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복은 서로 맞물려 있고 길흉도 한 곳에 있는데 사람 스스로가 이것을 부를 뿐이니, 어찌 깊이 생각치않을소냐. 혹 기쁘거나 성난 감정을 멋대로 부린다면 관대하던 포용력이 좁아지게 되고, 사사로운 마음으로 사치하며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이는 모두 사람으로서의 급무가 아니며, 실로 방자함의 싹이자 재앙의 바탕이다. 재앙이 복을 일으킬 수도, 복이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어려움이 많으면 뜻을 이루고, 어려움이 없으면 몸을 잃는다’고 하셨다. 얻는 것이 있으므로 잃게 되며, 잃기 때문에 또 얻게 된다. 이로써 복은 요행으로 구하지 못하며, 복을 얻는 것도 그저 틈을 엿보기만 하여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스럽게 살 때 재앙을 염려하면 그 복을 보전할 수 있고, 얻고 난 뒤에도 잃을까 염려하면 얻을 것이 반드시 이어져 간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다스러졌을 때에도 혼란함을 잊지 않는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지니고 살면 마음이 겸손해져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행복해질 것입니다. ‘어려움이 많으면 뜻을 이루고 어려움이 없으면 몸을 해친다’. 운명이란 이와 같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하는 기도
 부처님은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욕망이 바로 의지이기 때문이며, 그 의지가 곧 그의 행이 된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이기에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간은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운명이란 욕망에 의해 좌우 되며, 운명을 못 바꾸는 건 조그만 욕망 때문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기도를 하죠. 기도(祈禱)라는 단어 중 기(祈)자는 보일 시(示)에 삼갈 근(斤)이 합쳐진 것이고, 도(禱)자는 보일 시(示)에 목숨 수(夀)가 합쳐진 것입니다. 기도 속에는 삼가는 걸 보여준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절에 갈 때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단정히 하죠. 이 자체가 기도입니다. 삼가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요. 또한 목숨 바쳐서 해야 기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도(禱)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매일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을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죠. 기도로 수행하는 것은 나쁜 습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백일기도를 하고 삼천배를 할 때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듭니까. 오로지 바라는 바에 집중하고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하죠.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것은 중생의 나쁜 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큰 공덕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절실해야 합니다. 3주의 금식기도 끝에 간디는 인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독수리는 보통 30년을 살면 부리도 무뎌지고 날기도 힘들어 걷게 됩니다. 그러면 독수리는 6개월간 금식을 하면서 무딘 부리를 바위에 찧어서 새부리가 나오게 하고 이 부리로 깃털을 뽑고 발톱도 다 뽑습니다. 피범벅을 만들면서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30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만한 각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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