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과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원죄에 대한 고뇌 담아
대상을 객관화하는 표상

옅은 미소가 매력적인 
한국 국보 반가사유상
적멸의 즐거움 일깨워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

우주 속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전 우주를 능가하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파스칼이 지적한 것처럼 ‘생각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인 무기를 만들고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연장을 개발했다. 그 덕분에 인류는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으며 이제 그 문명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복제한 인공지능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유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모습은 인간만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이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다.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 산 로렌조 교회에 있는 메디치 무덤에 조각한 ‘Il pensieroso’와 시스티나 성당 천정벽화 ‘예레미아’가 그 최초의 작품이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크게 영향을 받은 로댕이 그 뒤를 이었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 기베르티의 조각 ‘천국의 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원래 파리의 장식미술관에 전시될 기념문으로 계획된 ‘지옥의 문’의 한 부분으로 제작되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주제를 따온 ‘지옥의 문’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 작품의 중심으로 1880년 독립적인 청동조각상으로 제작되었다. 로댕의 무덤에 놓일 정도로 로댕이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작품인데, 최초에 붙여진 ‘시인’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단테의 형상이며 동시에 로댕 자신의 자아를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을 왼편 무릎에 얹고 오른 팔꿈치를 왼편 다리에 받치면서 턱을 괴고 있는 이 조각상은 일반적으로 턱을 괸 자세와 달리 안정적이지 않다. 그 어떤 자세보다 강한 동세를 함축하고 있어서 어느 미술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머리나 찌푸린 이마, 커진 콧구멍, 꽉 다문 입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팔의 근육과 등, 다리 단단히 쥔 주먹과 긴장된 발가락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의도적으로 비틀어진 자세는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렇다면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그처럼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신곡 ‘지옥편’ 中>

‘지옥의 문’ 윗부분에서 아래의 군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신과 인간의 세계로 나누어 모든 인간을 신에 의해 심판 받고 구원받는 대상으로 생각. 이 작품은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구원받을 수 없는 지옥의 영혼들을 내려다보며, 지옥에 막 도착한 단테는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구원받을 수 없는 지옥을 응시하고 있다.

지옥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압도적인 장관의 위대함에 몸을 떨며, 그는 지옥의 어둠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영혼들의 몸부림과 절규를 바라보고 있다.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그는 묵묵히 온 몸으로 인간의 ‘원죄’를 사유하고 절망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이며 동시에 로댕 자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는 중세인의 종교적인 고뇌가 아니라 보들레르가 말한 ‘악의 꽃’처럼 타락한 현대사회에서 고독한 개인의 내면적 고뇌를 표현한다.

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의 사유는 지옥 바깥에서 응시하는 자의 사유로서, 서양 근대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대상을 객관화하는 사유이며, 주관은 항상 대상과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근대의 도구적 사유는 대상을 지배하는 지식을 제공하며 그래서 일종의 권력이 된다. 이처럼 일종의 권력으로서의 사유는 파토스로서, 비극적인 힘으로서 몸과 세계를 지배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사람’의 몸은 정신과 일체화된 몸이 아니라 대상을 객관화하는 사유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한 미켈란젤로가 돌로부터 영혼을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과 달리,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서양 근대의 조각가 로댕은 청동의 몸에 근대적 사유를 각인하였다.

▲ 로댕의 대표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사진 왼쪽〉과 한국의 국보 제78,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사진 오른쪽〉 원죄에 대한 고뇌를 담은 ‘생각하는 사람’은 객관화를 통해 대상을 분리한 근대 사상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반가사유상은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적멸의 진리를 부드러운 곡선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사유에 대한 동서양의 간극과 깊이를 두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반가사유상’은 ‘생각하는 사람’과 포즈도 비슷하고 이름도 유사하기 때문에 종종 비교되곤 하는데, 이 두 작품만큼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기 때문이다.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청동으로 제작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세부묘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오른 손가락을 얼굴에 살짝 대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같다. 이 자세 때문에 ‘반가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반가부좌가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동양적인 얼굴에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눈, 두 눈을 반쯤 감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이 보살상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뇌하는 표정도, 불안정 자세도 없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지만 매우 안정적이며 편안하고 우아하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사유하는가?

미륵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자 시절에 농경제에 갔다가 보습에 걸려 벌레가 죽는 모습을 목격하고 생성과 소멸, 삶의 근본 원리를 사유했던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이 조각상을 ‘태자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 사유상이 사유하고 있는 것도 ‘생각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삶과 죽음을 사유하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태자가 바라보았던 장면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벌레의 모습이었다. 미물에게도 생명은 덧없고 몸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벌로 받은 것도 아니다. 몸은 저주받은 것도 아니고 정신을 가두는 감옥도 아니며 단지 과거에 내가 했던 행동의 결과일 뿐이다. 영원한 실체도 아트만도 아니며, 지, 수, 화, 풍,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생겨나면 곧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하지만 생과 멸이 사라지면 적멸의 즐거움이 거기에 있어, 그래서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행한 사유, 즉 선정은 어떤 것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내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나를 비우는 행위이다. 나의 이성, 나의 판단을 모두 비웠을 때 사물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몸을 대상으로 삼거나 단지 영혼을 담는 집이나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다. 몸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할 뿐이다. 몸을 대상화하는 사유는 몸을 소유하려고 하고 몸에 집착하지만 몸의 느낌을 모두 수용하는 사유는 몸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한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몸과 정신을 유기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수행을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또한 몸은 정신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매체로 보았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외형의 유사성을 중요한다고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동하는 정신을 묘사한 작품이 최고의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신체의 비례나 사실적인 묘사보다 그 형상에 깃든 정신을 잘 반영하는 것이 좋은 예술작품의 관건이었다. 그 결과 동양예술은 몸보다 정신이 더 잘 표현되는 얼굴을 더 세밀하게 묘사했지만, 몸은 정신의 반영으로서, 정신이 깃드는 장소로서 소중하게 여겨졌다. ‘사유상’의 엷은 미소와, 가는 허리, 기다란 손가락의 곡선은 아무나 모방할 수 없는 경지를 반영한다. 보살의 고요하고 깊은 정신세계는 그 섬세하고 부드러운 몸이 없었다면 형상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과 ‘반가사유상’은 서양 근대의 사유와 육체, 그리고 동양의 선정과 몸에 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가 닿을 수 있는 사유의 깊이는 어디인지 되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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