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성 보살의 바라밀 일기

자식 키워본 엄마가 ‘엄마’마음 알아
나도 언젠가 ‘조상’ 된다…잘 살아야


아기의 울음소리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그치질 않았다. 계속되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나를 포함한 승객들에게 불편을 주기 시작했다. 부산까지 길어야 한 시간이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그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승객들이 불편할 것을 모를 리 없는 아기의 엄마도 당황스럽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모고 있으려니 불편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 아이 넷을 데리고 다녔고, 버스나 기차에서 같은 경험을 했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득 지난 13년 전 쯤의 일이 생각났다. 미국 뉴욕으로 갈 일이 있었다. 나와 남편은 미국 뉴욕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밤이 되었는데 맨 앞좌석에 젊은 여인 두 사람이 똑 같은 어린 아기를 안고 우유를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 두 아기가 동시에 자지러지듯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기는 계속 울어댔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오래도록 계속됐다. 처음엔 걱정도 되고 했지만 아기의 울음소리가 계속 되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옆자리에 앉은 부인을 보니 나보다도 더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니 일어난 짜증을 조금은 참을 수 있었다. 더 놀랐던 것은 옆자리에 앉은 그 부인이 아기를 받아 업고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고, 짜증을 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말로라도 한 수 거들고 싶어서 부인이게 물었다.
“아이가 어디 아픈가요?” 했더니 아이를 업은 그 부인이 “이 아이들이 외국에 입양을 가는 길이랍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남편도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면서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와 남편은 잠을 잘 이루질 못했다. 꽤 긴 시간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고, 아기들의 기구한 사연에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와 남편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뉴욕에 도착 했다.
그 두 여인은 아기를 입양자에게 인도하는 도우미였는데, 비행기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그들의 짐을 찾아주었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 아기는 지금쯤 열 세 살쯤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자랐을까? 문득 그 때 일이 생각났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짠하다. 태어난 땅에서, 나아준 부모 밑에서 살지 못하고 겨우 2달 만에 다른 나라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했던 그 아이들이 궁금해졌다.
우리나라 다문화가족의 설움을 보면서 그 때 그 아이들이 혹시 어려움을 격지는 않았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부디 잘 커서 다시 고향을 볼 수 있기를 축원했다. 그날, 그 아기의 울음에 그때 그 아기의 모습이 떠올라 비행기에서 내려 숙소로 가는 내내 ‘인연’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됐다. 세상엔 남의 일 같지 않은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특히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비슷한 것이리라. 그 옛날 먼 곳으로 입양되는 아이들의 기억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자식을 키워본 ‘엄마’의 마음일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선 긍정이 쉽지 않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이해하고 마음을 내는 일이야 말로 ‘이타(利他)’의 시작이 아닐까.

조상과 후손
4월 보름이면 하안거 결제에 들어가고 기도 도량에서 는 백중까지 조상님을 위한 기도를 시작한다. 영단에 조상 위패를 모시고 왕생극락을 발원한다. 그 옛날 우리들의 조상님의 모습을 뵌 일은 없지만 그 어른들이 계셨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음이니 당연히 모실 일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지금 그 어른들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모두 겁 다생으로 맺어진 인연들일 텐데.
모셔진 위패를 보면서 나와 인연 있었던 영가들의 모습을 기억하니 어찌 인연이 눈앞에 있는 인연만 인연일까 생각됐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한 시절로부터 시작된 인연의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니 지금 눈앞에 서있는 인연의 모습들이 가벼이 보이지 않음이다.
나의 이 작은 기도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성으로 그들 영가들을 향해 합장하고 발원한다. 이미 좋은 몸 받아 좋은 세상에 태어났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영가를 위해 더 나은 부처님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 만나기를 축원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우선 내가 행복하다.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마치 숙제를 마친 느낌이라고 할까.
나 역시 언젠가는 후손들의 조상의 될 것이다. 이제 후손들에게 기억될 나의 모습에 마음이 쓰인다. 좋은 모습으로 살다 좋은 모습을 기억되기를 바랄뿐이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첨부다라니경 기도문〉을 사경하시던 모습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그 공덕으로 극락에 계실거란 믿는다. 기억에 남을 좋은 일 꼭 하나만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70이 되니 주변에 경사보다는 조사가 더 많다. 가까운 인연들이 가을 낙엽처럼 한 잎 두 잎 떨어져 가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육신을 벗어야 한다. 누군가의 기도를 받기 위해서라도 좋은 모습으로 살다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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