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정치철학 下 - 정천구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라는 집단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집단을 내세우는 정치철학은 인류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성불의 주체가 개인인 것처럼 정치의 주체도 어디까지나 개인이어야 한다.

중국 강대국 부상은
시장경제의 고정관념 버린 덕분

'상을 버리라'는 금강경 사구게와 상통

금강경 속 사상해방

 금강경 제5품 ‘여리실견분’에는 “있는바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보리라” 하는 사구게가 나온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상을 내려놓으면 대 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붙잡혀서 고통에 시달리고 부자유하게 산다. 제 생각 속에 누에고치 같이 집을 짓고 머문다. 마음을 비운 사람의 경지는 고려말기 나옹선사의 선시에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청산은 날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는 시가 그것이다.
 나라를 책임지는 정치가가 마음을 비우고 고정관념을 버리면 그 국토의 민생이 혜택을 받는다. 예를 들어 중국개혁의 설계사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 전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사상해방,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기치를 내걸고 마오쩌뚱 치하에서 가난에 찌들던 중국을 개혁해 오늘날 미국이 인정하는 G2 강대국으로 부상하도록 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 사회는 끊임없이 혁명해야 한다는 마오쩌뚱 주의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덕분이다. 북경정권을 세운 뒤 사회주의 중국이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데 50년이 걸렸다. 사람이 마음에 머무르는 바가 있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생각의 노예가 되고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머무는 바 없이 모두 내려놓고 자유롭게 놓아두는 게 중요한 이유다.

성불과 정치의 주체
 금강경 6품에는 법에 대한 뗏목의 비유가 나온다. “모든 상은 허망한 것이니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보리라”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보리 존자는 “어떤 중생이 있어서 말세에 이런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부처님은 “미래에도 오랫동안 상을 짓지 않고 부처님 처소에서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은 무량복덕을 지을 것이니 그런 사람은 아?인?중생?수자상, 그리고 법과 법 아니라는 상도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며 이를 뗏목에 비유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은 4상과 법상, 비법상 등 어디에 붙들려도 다시 아?인?중생?수자상에 빠진다. 그래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은 건넌 다음에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했는데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 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불하는 주체와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불교와 정치철학의 중요한 개념과 만나게 된다. 이는 개인이 주체인가 집단이 주체인가 하는 문제다. 제6품의 말씀을 비추어 보면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持戒修福者)의 주체는 개인이고 성불하는 것도 개인이다. 부처님의 설법도 개인과의 문답 형식이고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설하시나 중생이 근기에 따라 달리 듣는다.
 당나라 때 조주스님의 선문답에서 나온 무(無)자 화두는 불성이 어디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없다(無)”고 답변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열반경)고 하셨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더니 조주스님은 “업식성(業識性)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냥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업식성을 버리지 못해 없다는 것이니 논리적 답변이기도 하다. 간화선에서는 이 선문답에서 무자 하나만을 화두로 삼아 머리로 분별하지 말고 의심이 타파될 때까지 사무치게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정치와 불성의 주체는 개인
집단 내세우는 정치 인류 불행 초래
'반야지' 닦으면 정치적 통찰력 나와

 만일 조주스님에게 “인간 집단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면 어떤 답변이 나왔을까? 조주선사의 답은 역시 “없다(無)”일 것이다. 19세기 이래 세계는 개인 대신에 국가, 민족, 계급 혹은 정당 등 집단이 사람들의 중요한 삶의 원리가 되었지만 집단에 불성이 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업을 짓고 받으며 또 깨닫는 것은 개인이지 집단이 아니다. 집단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며 그 자체의 정신이 없기 때문에 불성도 없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집단의 결정에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정치가 집단의 일을 다루긴 하지만, 진리냐 아니냐의 문제는 머릿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 주장은 수천만의 지지자가 있어도 한명의 개인이 밝힌 진리를 압도할 수 없다. 이것이 진리의 세계이다. 불성이 있다면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 집단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계급을 주역으로 등장시켰고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라는 집단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집단을 내세우는 정치철학은 인류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19세기 이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집단주의적 생각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성불의 주체가 개인인 것처럼 정치의 주체도 어디까지나 개인이다. 정치가 집단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서로 관점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의사를 결집하는 방법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지만 의사표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개인이다. 집단도 집단을 대표하는 개인이 뜻을 모아 결정을 내린다. 개인이 무너지면 민주주의의 모든 기초가 무너진다. 민족주의운동과 전체주의운동 속에 매몰되었던 서구 지성사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확립한 것은 덴마크의 사상가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을 시작으로 나타난 실존철학과 니체였다.
 집단에 의존하면 개인은 익명으로 숨을 수 있고 집단적 이기주의 속에 매몰될 수 있으므로 집단은 진리와 거리가 멀다. 반면 창의력과 도덕적 책임의 원천은 개인이다. 그러한 개인의 활력이 넘치는 사회는 발전하기 마련이다. 개인이 집단 속에 매몰된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개인이 전체라는 이름 속에 매몰되었던 나치즘 치하의 독일, 군국주의 치하의 일본, 그리고 계급독재 치하의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국가들이 어떠했는가를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는 법구경 말씀이나 “자기 마음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는 열반경 말씀은 정치의 세계에도 그대로 통용되어야 한다. 집단은 소중하고 존중되어야 하지만 집단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주의는 다른 사람과 집단을 자아로 삼는다는 점에서 금강경에서 경계한 인상, 중생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아상의 변형이다.

반야-정치적 판단력과 리더십
 금강경은 최고의 지혜인 반야를 다루고 있다. 금강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네 가지 글귀로 된 게송, 즉 4구게는 이런 반야를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4구게를 비롯한 금강경 구절을 남에게 설해주면 어떤 물질적 보시보다도 공덕이 크다고 누누이 설하고 있다. 앞에서 제5품의 4구게를 말했는데 이번에는 제10품 장엄정토분의 4구게를 보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라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 존자가 “아닙니다. 세존님, 보살은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 부처님은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 받을 것이니 색에도 마음을 머물지 말며 성, 향, 미, 촉, 법에도 머물지 말지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고 설하신다. 육조단경은 이 구절에서 육조 혜능 대사가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음속이나 마음 밖이나 어디에도 마음을 머물거나 잡아두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판단력과 지도력과 관련이 있다.
 우리들의 삶은 판단의 연속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어디를 먼저 갈까. 누구와 언제 만날까.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 등등 일상생활은 매 순간마다 판단을 요구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에 사람의 됨됨이를 볼 때, 외모로 상을 보고(身), 말하는 것을 보며(言), 글쓰기를 보고(書), 마지막으로 여행 등을 함께하면서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판단력을 본다는 것이다.
국가와 같은 공동체 일을 맡은 사람은 자기의 판단이 수많은 생명들의 행복과 안위와 관련돼 있으므로, 정확하고 바른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판단력의 요체를 말해주고 있다. 어딘가 마음이 붙들려 있지 않고 마음을 비워야 전체적이고 종합적이며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을 쓴 칸트(Immanuel Kant)는 우리가 맞닥뜨린 특수한 현실 상황에 보편적 원리를 연결시키는 능력을 판단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보편적 원칙이나 공식이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공식을 적용해 문제를 풀면 되지만, 보편적 원리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 경우, 예를 들어 그림이 아름다운지 어떤지를 판단할 때는 이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미적 판단력은 칸트가 말한 취미판단(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적 판단)의 기저에 놓여있다.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 판단은 어떤 관심과 욕구도 없으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이며, 인간의 보편적 미감을 감촉으로 느끼는 판단이다. 촉이 온다고 하는 것과 같다.
 아랜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정치적 판단에 적용해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판단은 연극에서 관객과 같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으나 적극적인 무관심성이 유지될 때 바른 판단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취미판단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연극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배우도 감독도 아니고 바로 관객이다. 따라서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판단은, 연극을 보는 관객의 입장처럼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금강경의 말씀과 같이 보시, 지계, 인욕 등 6바라밀을 행하고 마음을 무심한 상태에 놓아두어야 한다.
 금강경을 통해 반야지혜를 닦는 것은 정치적 리더십을 위해서 특히 필요한 일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의 자질로서 정열, 책임감, 통찰력을 들었는데 여기서 통찰력은 반야의 지혜와 통한다. 그에 의하면 통찰력이란 내적 침착과 평정심으로 사물과 인간에 대해 거리를 두는 습관이다. 정치에 대한 정열만 가지고 쉽게 흥분해 일을 그르치는 단순한 정치적 아마추어와의 구별이 바로 통찰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베버는 정열적인 정치가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찰력이라고 보았다.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사구게를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금강경과 정치는 하나
 이상은 “금강경과 정치철학” 강의내용의 일부이다. 머리말에서 언급한대로 진리에는 두 가지, 즉 승의제와 세속제가 있다. 금강경은 최고의 진리, 즉 승의제로 인도하는 경전이고 정치철학은 세속의 진리에 관해 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서로 연관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한 마음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성사는 일심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두 문으로 나누고, 두 문은 각자 자기만을 지키면 안 되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진리세계와 현상세계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일심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기에 서로 교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여는 옳고 깨끗하다 하여 자기를 절대화 하지 않고, 자기의 법상(法相)을 버림으로써 생멸문으로 나가 속세와 교섭한다. 그리고 심생멸문은 자기의 고향인 일심 속 진여와 소통하여 일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진리를 설하는 금강경과 세속의 이치를 논하는 정치철학이 서로 소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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