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금강경>-금강경과 정치철학 上 … 정천구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나만 힘들다면 그건 분명 당신만의 문제다. 하지만 너와 내가 힘들다면 그건 분명 정치적 문제일 개연성이 크다. 전월세 대란, 국정원의 선거개입, 종북논란 등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고통을 치유해야 할 사람은 정치인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일관성 없는 정책, 대책없는 포퓰리즘 등을 선거철마다 쏟아내는 정치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건 금석같은 말과 천금같은 원칙일 터. 반야부의 중심대승경이며 변치않는 단단한 지혜가 담긴 금강경이 말 많고 탈 많은 정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공동체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정치와 불교와의 접점은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끈다”는 금강경 속 부처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온고지신적 자세로 금강경이 현대 사회에 가지는 함의는 무엇인지 통찰해보자는 의미에서, 본지는 이번 주 부터 ‘금강경과 정치철학’을 싣고자 한다. 매주 본각선교원에서 진행하는 ‘금강경 생활특강’의 일부로 앞으로 금강경을 통해 문화, 법, 기업경영이라는 현대적 주제를 읽는 시간이 마련된다. 이번 주는 정천구 교수(전 영산대 총장)가 진행하는 강의를 통해 금강경 속 풍부한 정치 텍스트와 만나보길 바란다.>

▲ 정천구 교수는한국외대서 정치학 학사를, 고려대 대학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했고,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영산대 초대총장을 지냈다. 현재 서울디지털대 정치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등 10여 편의 저서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연구〉 등 40여 논문이 있다.

금강경과 정치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보살에 따르면 부처님은 세간세속제(世間世俗諦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관습적 진리)와 승의제(勝義諦, 궁극적 진리)라는 두 가지 진리(이제二諦)로 법을 설하신다. 그는 이러한 두 가지 진리를 모르고서는 부처님 가르침 의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분명히 부처님은 정치철학과 같은 세속제에 관해서도 설하셨다. 정치철학은 국가의 조직과 운영, 자유·평등·정의의 본질, 정치와 윤리의 관계, 전쟁의 원인과 평화구축 방법 등 인간이 집단생활에서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다루는 학문이다.
  8만대장경 속에는 국가의 기원과 나라를 지키는 방법, 통치자의 덕에 관한 이론 등 정치철학적 의미를 가진 가르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승의제가 아니기 때문에 현대 정치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 상황에 맞는 세속제를 설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니라 현대 정치철학을 말하려면, 세속제보다는 궁극적 진리를 말하는 금강경에 견주어 논하는 게 합당하다. 승의제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나 세속제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세속을 벗어나 궁극적 진리의 세계, 즉 승의제에 도달할 것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따라서 “금강경과 정치철학” 강의를 통해 금강경의 내용이 정치철학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부처님이 금강경을 통해 설하신 승의제를 기본으로 삼아, 현대 정치철학에 접근해 보는 것이다. 이는 금강경의 교설을 원용하여 정치철학이라는 세속제를 추출해 보는 시도임과 동시에, 정치철학이라는 세속제를 통해 금강경의 승의제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부하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궁극적 진리 담긴<금강경>
세속제승의제도 담겨
국가 지도자에게 필요한
직관력통찰력 길러줘

 금강경을 공부하려면, 먼저 이 경이 세속제가 아니라 언어와 분별로 표현할 수 없는 승의제로 인도하는 경전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승의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염불, 면벽수행과 화두참구, 주력, 간경 등 여러 방법이 제시되어 왔지만, 그 중 경을 독송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누구든 기원정사에서 1,250인의 제자들과 함께 금강경법회에 참여하고 있는 마음으로 경을 읽으면 읽는 사람과 부처님의 정신이 그대로 통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자꾸 읽다보면 나의 정신이 부처님의 가장 밝은 정신과 공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경을 읽는 파동 또는 진동이 우주의 근본에서 나오는 진동과 공명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이 수많은 재물로 보시하는 것보다 복이 크다고 금강경의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금강경과 국가   


 부처님은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셔서 부처님이 되셨다. 기원정사를 짓는데 숲을 기증한 사람은 기타 태자고,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고 각 분마다 제목을 붙인 사람은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다. 그는 아예 태자수업을 금강경으로 받았다고 한다.
 소명태자가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라고 이름 붙인 금강경의 도입부, 제1품은 부처님이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사위성으로 들어가 걸식하시고 본처로 돌아와 발을 씻고 좌정하여 정(定)에 드시는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그려 놓았다.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와 하나가 된 성자(聖者)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부처님이 계시던 사위국을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갠지스강 유역을 따라 서북쪽에 사위성을 수도로 하는 코살라(Kosala)와 동남쪽에 왕사성을 수도로 하는 마가다(Magada) 두 강대국이 있었고 주변에 16개국의 중소국(中小國)이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군주국이었고 밧지, 말리, 사캬 등은 공화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설하시던 당시의 정치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를 존중하는 풍토가 있었다. 부처님은 정치 간섭을 받지 않고 대규모의 승단을 거느리며 자유롭게 설법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국가 정치체제는 민주주의, 권위주의, 전체주의 국가로 나뉜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샤카는 공화국이고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하시던 코살라나 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취산이 있는 마가다는 모두 왕국이다. 당시의 왕국은 오늘날의 권위주의국가와 유사하고 공화국은 오늘날의 민주공화국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구제 안 되면서
나라 구한다고 나서면 안돼
중생이 중생 제도 어려워
정치가는 방하착해야


 전체주의 국가와 유사한 형태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주의는 핵무기와 함께 20세기의 발명품이며 서양정치 철학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군주정치를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해서만 압제를 하지만 전체주의는 인간의 전 생활을 통제하고 생각할 자유마저 주지 않는다. 유태인 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아이히만은 남미에서 숨어살다가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거기서 그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재판을 관찰한 20세기의 위대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이 그렇게 된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전체주의의 통제는 사람들의 생각할 능력까지 말살했던 것이다.
 공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가혹한 정치(苛政猛於虎 가정맹어호)라고 했고, 20세기에 태어난 전체주의 정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인류에게 주었다. 하와이 대학의 럼멜(R. J. Rummel) 교수에 의하면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전쟁으로 3천 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자기나라 정부에 의해 살해된 인명은 그 4배인 1억 7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독일 나치당에 의해 유태인들이 6백만 명이나 학살된 것을 비롯해 구소련의 공산주의 운동으로 6천 1백만 명, 중국공산당에 의해 3천 5백만 명, 북한 공산정권 하에서는 270만 명이 희생되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마오쩌둥 시기에 중국에서 희생된 인명은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금강경과 국가 지도자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처님은 여러 정치체제 중 공화국을 선호하신 것으로 해석되며, 왕조체제 아래서도 정치에 예속되거나 이와 맞서지 않고 바른 길로 정치를 이끄셨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땅은 중생이 윤회하는 6도(六道) 중 지옥, 아귀, 축생 등 3악도에 해당하여 부처님이 태어날 곳은 아니다. 지옥, 아귀, 축생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사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금강경을 읽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그런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장보살 같이 지옥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운 대력보살이라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그런 곳에 간다.
  금강경이 호국경전으로도 애송되어 왔던 것은, 우주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읽는 이에게 직관적 힘과 통찰력을 길러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기의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하나하나를 보는 부분적인 지식보다는 전체적 국면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국가지도자에게는 이런 통찰력과 판단력이 더 요구되기에, 금강경이 호국경전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뒷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보살과 정치가

  금강경은 제2품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존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제3품 ‘대중정종분’에서 부처님의 답변과 질의응답으로 진행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보리 존자는 “최고의 깨달음을 향하여 발심하려면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고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합니까?” 라고 질문 한다. 부처님은 “대보살이 이렇게 마음을 항복받을지니 9가지 종류의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인도하여 제도하리라는 원을 세우라”고 하신다. 한량없는 많은 중생을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했다는 상을 남기지 말라고 하신다. 여기서 중생은 난생, 태생, 습생, 화생 등 결과로 나타난 중생은 물론이요, 그 결과의 원인을 만든 마음속의 중생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난생은 배은망덕하는 마음을 연습해서 그 결과로서 받은 몸이고, 태생은 의지하는 마음을 연습해서 얻은 몸이며, 습생은 감추는 마음을 연습해서 받은 몸이다. 또 화생은 잘난 척 하는 마음이 만든 중생이다. 그러니까 중생을 제도하려면 마음 속 원인 인(因)로서의 중생심을 제도하면서 동시에 결과로서의 중생도 제도해야 한다. 대승보살은 내 마음 네 마음, 안팎의 구별 없이 모두 제도하리라고 원을 세운다.
  사람들은 대개 습관적으로 살아가며 자기 마음 닦기도 어려워한다. 자기 마음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급급한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목표를 정하고 사람들 사이의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을 하는 인간 활동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정치꾼은 될 수 있겠지만 나라를 이끄는 정치가는 될 수 없다. 정치가는 대승보살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려는 것과 비슷한 큰 원을 세운 사람이어야 한다. 20세기 독일의 위대한 사회학자이며 정치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엄중한 책임이 정치를 뒤따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자기도 구제하지 못하면서 공동체와 나라를 구한다고 나서는 사람은 너무 많은 반면, 진실된 정치가는 드물기에 혼란스러운 현실이 초래되는 것이다.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제도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있는가? 수많은 금강경 해설서가 있지만 거기에는 이런 질문을 한 사람도, 해답을 한 사람도 없다. 중생이 중생을 제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내가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하지 말고 그런 중생을 부처님께 바치면 된다. “모든 중생을 남김 없는 열반으로 인도하여 제도하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다.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안팎의 모든 중생을 부처님께 바치면 부처님께서 제도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바친다는 말은 드린다는 말과 같고 조주스님의 선문답으로 유명해진 “내려놓게(방하착 放下着)”라는 법문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의 대의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